유의·의학자·실학자·역학자… 네 얼굴의 허준

김남중 2024. 2. 1.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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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준 평전
김호 지음
민음사, 280쪽, 2만원
서울 강서구 허준박물관에 걸려 있는 허준 얼굴. 생전의 허준을 그린 초상도가 있었지만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민음사 제공


조선시대 명의 허준(1539∼1615)과 그가 쓴 의학서 ‘동의보감’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허준의 일대기를 그린 ‘소설 동의보감’은 1990년대를 대표하는 베스트셀러 중 하나였고,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MBC 사극 ‘허준’은 평균 시청률이 50%가 넘을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그런데 소설과 드라마로 알게 된 허준은 역사 속 실제 인물이었던 허준과 얼마나 같을까.

드라마에서는 허준의 스승으로 유의태가 나오는데, 극 중 유의태의 실제 모델인 유이태(1652∼1715)는 허준보다 후대의 인물이었다. 허준의 실제 스승은 허준보다 먼저 내의원 수의로 활동했던 양예수(?∼1597)였다.

허준의 출생지도 확정되지 않았다. 경기도 양천(현재의 서울 강서구 가양동)이 허준의 고향이라는 주장이 통설이고, 강서구에는 허준박물관이 있다. 하지만 허준의 양천 출생을 확인해 줄 문서나 사료는 없다. 허준의 모친이 전라도 사람이고 1927년 발행된 ‘장성읍지’에 지역을 대표하는 인물로 허준이 기록돼 있다는 점에서 전라도 장성이 허준의 출생지였을 가능성도 있다.

서자 출신으로 내의원 의관으로 일하며 자기 목소리를 낼 일이 거의 없었던 탓에 허준에 대한 기록은 매우 빈약하다. 그래서 우리가 아는 허준에는 역사와 허구가 뒤섞여 있다. ‘허준 평준’은 역사학자가 고증을 바탕으로 쓴 본격적인 허준 평전이다. 저자 김호 교수(서울대 아시아연구소)는 동의보감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조선시대 의학사와 법의학을 연구해 왔다.


이 책은 평전이되 인물의 생애를 연대기적으로 서술하는 방식을 택하지 않는다. 역사 속 허준의 초상을 네 가지 얼굴로 그려내 제시한다. 저자는 먼저 허준의 정체성을 ‘유의(儒醫)’로 규정한다. 유의는 유학의 기본 경전을 공부했지만 과거에 응시할 수 없는 서자이거나 과거에 합격했지만 이러저러한 이유로 출사를 포기하고 지방에서 의업에 종사한 지식인이었다. 허준은 서자로 태어나 유교 경전을 섭렵했고, 젊은 시절 전라도 지역에서 유의로 이름을 날리다가 30세에 내의원에 출사한 이후 76세를 일기로 사망할 때까지 인생의 대부분을 내의원 어의에 종사했다.

저자는 허준이 깊게 교류한 인물로 호남 사림의 거두 미암 유희춘과 내의원에서 만난 스승 양예수를 들고 이들의 철학이 허준의 의술에 끼친 영향을 분석한다. 허준의 ‘동의보감’에서 두드러지는 조선의 생물에 대한 실증적 태도는 기초 학문을 강조했던 유희춘의 영향으로 보이며, 유학을 중심으로 하되 불교나 도교를 포괄하려던 허준의 지향은 도가의 성향을 강하게 띤 양예수 의학과 닿아 있다는 것이다.

사진은 '동의보감' 속 '신형장부도'(왼쪽)와 온역이라는 감염병 처방을 집대성한 '신찬벽온방'이다. 민음사 제공


허준은 당대 최고 의사였던 어의였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의서 저술가이자 편찬자였다. 71세에 25권으로 완성한 ‘동의보감’ 외에도 ‘언해두창집요’ ‘언해구급방’ 같은 일상의 구급 의서나 ‘신찬벽온방’ ‘벽역신방’ 등 역병 의서도 펴냈다. 저자는 허준이 편찬한 의서들을 들여다보며 허준을 조선 고유의 의학인 ‘동의(東醫)’를 구축한 의학자로, 조선 땅의 식물과 동물에 대한 포괄적이고 실증적인 연구로 조선의 자연학을 개척한 실학의 선구자로 평가한다.

허준은 조선의 유구한 의약학인 향약의 전통을 종합했으며, 여기에 중국의 새로운 의학을 수용했다. ‘동의보감’에는 고려 말 이래 전해져 온 조선 고유의 처방인 ‘속방’이 고스란히 수록돼 있다. 술독을 해독하기 위해 칡즙을 먹인다거나 중풍 초기에 우황청심원이 효과가 있다 등의 속방은 ‘동의보감’에 기록돼 현대에까지 이어지게 됐다.

저자는 ‘동의보감’이 이룩한 가장 중요한 학문적 성취는 중국 의서에 수록된 약재가 조선에서는 어떤 식물과 동물에 해당하는지 밝힌 것이라고 본다. 중국 의서에서 보약으로 활용된 토사자는 조선에서 무엇에 해당하는가? 인동초는 조선에서 무엇이라고 부르는가? 허준은 토사자가 ‘새삼의 씨앗’이고, 인동초가 겨우살이덩굴이라는 걸 확정해 백성들이 치료에 사용할 수 있게 했다. 약재의 이름과 실물을 확인하고, 조선에 자생하는 재료의 약효를 밝힌 허준의 작업은 조선의 자연학을 열었다.

허준은 말년에 역병과 싸우는 임무를 맡았다. 감염병 연구자, 역학자로서의 허준은 그동안 거의 알려지지 않은 모습이다. 저자는 허준이 70대에 펴낸 역병 대처 의서들을 통해 허준이 감염병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응했는지 보여준다. 허준은 역병의 이유를 설명해 백성들이 미신에 빠지지 않도록 했으며, 새로운 의학 지식을 수용하며 치료법을 제시했다. 특히 ‘전염되지 않는 법’을 수록해 지방관의 선정과 향촌의 상호 보조, 가족관계를 강조했다.

허준은 그동안 신묘한 의술을 지닌 전설적 인물로 묘사돼 왔다. 이 책은 허준의 의학에 초점을 맞추며 과학적이고 실용적이며 공공적인 지식인으로서의 면모를 부각한다. 비로소 역사 속 인물 허준이 보이는 듯 하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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