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림택권 (13) 볏짚 지붕, 사과 궤짝 강대상에서 시작된 첫 목회

임보혁 2024. 2. 1.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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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서울 성북구 정릉동 정원교회에 부임한 나는 67년 초 미국으로 건너갈 때까지 첫 목회 사역을 했다.

당시 교회는 직전까지 한 목사님이 몇 개월 동안 개척을 준비하시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떠나게 돼 대신 맡았다.

인근 교회를 다니던 한 고등학생이 주일학교 선생으로서 사역을 돕기도 했다.

한편 당시 정릉의 교회는 상수도 시스템이 변변치 않아 물탱크에 물을 받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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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두 가정 남은 성도와 열악한 시설에
한 목사님이 준비하던 개척 교회 맡아
“성도도 없는데 큰소리…” 아내 핀잔도
림택권(원 안) 목사의 총회신학교 졸업식 사진.


1963년 서울 성북구 정릉동 정원교회에 부임한 나는 67년 초 미국으로 건너갈 때까지 첫 목회 사역을 했다. 당시 교회는 직전까지 한 목사님이 몇 개월 동안 개척을 준비하시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떠나게 돼 대신 맡았다. 교회라고 해봐야 한두 가정만 남아 성도가 거의 없었다. 교회 시설도 열악해 인근 당면 공장 임시 건물을 빌려 예배를 드렸다. 공장에서 쓰던 사과 궤짝을 주워와 강대상 삼았고 의자는 제재소에서 쓰다 버린 나무쪼가리를 모아 못질해서 썼다. 볏짚으로 된 지붕은 비가 오면 물이 샜다.

비가 많이 오는 어느 주일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비를 피해가며 어렵사리 예배를 마치고 귀가하니 아내가 이렇게 물었다.

“신학교에서 설교하는 법 안 배웠어요? 아니, 교회에 성도라고 해봐야 당신하고 저뿐인데 무슨 목소리가 그리 크셔요. ‘여러분’은 무슨 여러분이에요.”

이렇게 핀잔 아닌 핀잔을 줬던 기억이 있다. 교회처럼 신혼생활도 녹록지 않았다. 당시 정릉에는 처음으로 부자들이 사는 고급주택 단지가 막 들어서고 있을 때였다. 우리 부부는 그 단지 집의 방 한 칸에 세 들어 살았다. 키가 큰 편에 속했던 나는 대각선으로 누워 자야 할 정도로 작은 단칸방이었다.

교회는 주로 주일학교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15명 남짓했다. 인근 교회를 다니던 한 고등학생이 주일학교 선생으로서 사역을 돕기도 했다. 그러다 당시 ‘북한산예술학교’라 불리는 한 음악학교와 연결이 돼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게 됐다. 교인도 점점 늘어 30명 정도 출석하는 교회가 됐다. 교회는 작았지만 교회에 나오는 성도들의 면면은 화려했다. 군 장성 출신 가정도 있었고 외과 병원장도 있었다. 그들 모두 하나같이 신앙이 깊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특히 한 여성 집사님이 기억에 남는다. 그분은 원래 부잣집의 소실(小室), 속된 말로 첩이었다. 하지만 그 집의 주인이자 남편은 오랫동안 집을 비우게 되면 외모가 출중했던 그 집사님의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게 했다고 한다. 이후 집사님은 견디다 못해 신앙의 힘으로 마음의 결단을 내리고 그 집을 나와 다른 집에서 식모살이를 했다. 그런 처지와 형편에도 열심히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며 하나님께 매달리는 모습을 보면서 큰 은혜를 받았다.

한편 당시 정릉의 교회는 상수도 시스템이 변변치 않아 물탱크에 물을 받아 썼다. 그러다 상수도 시스템이 정비되며 남는 용지를 매입할 기회가 생겼다. 그렇게 제대로 된 교회를 짓게 됐다. 이후 65년 당시 내가 속한 총회 경기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목사 안수는 효창장로교회에서 받았다.

교회 용지를 마련하고 교회도 점점 안정됐다. 목사 안수까지 받고 나니 다시 또 공부가 하고 싶어졌다. 그것도 미국 유학이 가고 싶어졌다. 유학을 마치고 나면 귀국해 목회보다는 가르치는 직업을 갖고 싶었다. 총회신학교에 다닐 때 학교 초청으로 미국 커버넌트신학교의 레어드 해리스 박사가 방한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그분을 안내하며 통역을 도왔다. 그 일이 인연이 돼 커버넌트신학교에 전액 장학금으로 입학할 기회를 얻게 됐다.

정리=임보혁 기자 bosse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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