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 잃었는데 웃어?' 세상이 무서운 아버지가 유일하게 입 여는 곳

정윤영 2024. 1. 30.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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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참사, 10년의 사람들 17] 4.16희망목공협동조합 유해종

2014년 4월 16일, 세월호참사가 났던 날을 우리는 모두 기억하고 있습니다. 함께 울었고, 분노했고, 행동했던 날들이었습니다. 그날 뒤로 많은 사람들이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10년의 시간 동안 여전히 기억의 장소를 지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족을 잃은 피해자들도 긴 시간을 견뎌내고 있습니다. 기억 속의 그 장소들을 가보고, 그곳을 지켜온 이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아울러 피해자들의 견뎌온 이야기들도 풀어냅니다. 이 이야기들이 세월호참사를 기억하는 시민들의 이야기로 이어지길 바랍니다. <기자말>

[정윤영]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순환로 416길. 광덕산 아래 꽃빛공원 끝자락에 컨테이너 두 개가 나란히 붙어 있다. 4.16희망목공소 작업장과 전시장이다. 작업장에서 체험 수업이 한창이었다. 매주 목요일 오전 10시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어머니들과 DIY 수업을 하는 시간으로 매년 4·16재단에서 신청을 받아 10주 동안 수업을 진행한다. 인터뷰를 한 지난해 11월 30일은 주걱을 만드는 날, 올해 마지막 수업이었다.

주걱은 미리 재단해 둔 나무의 표면을 사포질한 뒤 오일을 발라 말리면 끝나는 비교적 간단한 작업이다. 수업을 시작하자 어머니들이 앞치마를 두르고 마스크를 쓰고 작업장 앞에 섰다. 목공 어렵지 않냐는 물음에 한 어머니가 "우리 이제 베테랑이야" 하자 다른 어머니들도 깔깔 웃는다.

어머니들은 목공소가 편해 보였다. 노랗게 익은 고구마를 입에 넣어주는 순범 어머니 손길에, 작업을 멈추고 난로 주변에 모였다. 지난주에 김장한 사소한 일상부터 시시콜콜한 농담이 오갔고, 서로 '누구 엄마'라 부르며 자녀들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마지막 수업을 앞두고 어머니들은 너무 아쉽다고 입을 모았다. 나무를 만지고 있으면 '잡념이 없어' 져서, 시간이 빨리 가서 좋았다.
 
 난로에 올려놓은 고구마는 해남에서 왔다. 동수 어머니가 해남에서 연극공연을 하고 받아온 고구마였다. 목공협동조합의 조합원인 동수 어머니는 4.16가족극단 노란리본의 배우이기도 하다.
ⓒ 정윤영
 
수업을 맡은 사람은 4.16희망목공협동조합(이하 4.16목공소)의 조합원 유해종씨, 세월호 단원고 희생자인 고 유미지의 아버지이다. 처음엔 목공이고 뭐고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딸을 아직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미지를 기다리던 팽목항과 진도체육관을 그는 잊을 수 없다. '쭈그리고 앉아서 언제 올까' 바다를 바라보던 때를, 아이들을 구한다고 헬기와 잠수정 몇백 대가 와 있다는 뉴스를 보고 배를 타고 따라 나갔지만 아무것도 없던 그 바다를, 진도체육관에 몇 남지 않은 사람들끼리 실없는 얘기를 주고받으며 가족이 오기만을 기다리던 그곳을.

미지는 29일 만에 가족들 품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목공을 시작했다. 전부터 함께 하자던 가족들이 있기도 했지만 뭔가에 집중할 게 필요했다. 미지의 마지막 모습을 봤어야 했을까 싶다가도 봤으면 본대로 후회할 것 같았다. 제주도 가서 반장들끼리 대회가 있다고 늦게까지 춤 연습을 하던 미지가, 친구들에게 한 달 동안 생일 선물을 받고 환하게 웃던 미지가 계속 떠올랐다. 미지를 찾아 다행이었지만 진도체육관에 남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미안함에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시시콜콜한 얘기할 수 있었던 유일한 장소

목공은 참사 직후 정부합동분향소 앞 천막에서 처음 시작됐다. 매주 '목요기도회'를 함께한 박인환 목사가 주도해 목수인 안홍택 목사가 합류했다. 작은 천막에서 시작한 목공은 분향소를 철수한 뒤에도 계속됐다. 4.16희망목공소라고 이름 붙이고 2015년 9월 협동조합을 설립했다. 안산시의 지원으로 지금의 공간으로 옮겼다.

나무를 깎고 펜을 만들고, 의자를 만드는 동안에는 다른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게 좋았다. 목재는 안산시에 버려진 가로수를 쓴다. 수명을 다한 느티나무를 시에서 수거해 집하장에 갖다 두면, 목공소에서 나무를 가져와 목재로 만든다.

컴퓨터로 도면을 설계하고, 목재 위에 치수를 표시한다. 치수대로 목재를 자르고 장부맞춤이 필요한 곳은 목재를 파서 조립을 한다. 그런 다음 샌딩기로 목재를 매끄럽게 다듬고 구석구석 목공 오일을 발라 마감하면 끝난다. 도면대로 목재를 재단하고 깎으면 끝이라고는 하지만, 나무가 제품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은 쉽지 않다. 치수에 딱 맞게 자르지 않으면 장부맞춤이 안 된다. 애써 재단하고 손질한 나무가 0.05mm만 안 맞아도 쓸 수가 없다.

"처음에 되게 힘들었어요. 때려치우려고 그랬어(웃음). 치수가 안 맞으면 못 쓰는 거야. 그러니까 너무 화가 나는 거예요. 그래서 이걸 어떻게 해야 되나(싶다가) 그냥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조금씩 하다 보니까 이제 조금 맞는 거죠. 이거라도 안 하면 너무 힘들잖아. 맨날 우울하고 죽고 싶은 생각만 들고. 그런데 여기 목공소에 나와 나무를 잡고 있으면, 신경을 여기 쓰다 보면 그런 잡념이 없어지죠."
 
 미지 아버지가 작업하는 공간. 책상 위에는 8각 소반의 다리가 될 목재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나무에 코팅을 입혀 말리는 중이다. 이곳에서 세월호 리본을 만들고 고래키링을 만들어 시민들과 나누었다.
ⓒ 정윤영
 
무엇보다 목공소에 있으면 마음이 편했다. 유가족들과 있었기 때문이었다. 목공소가 아닌 곳에서는 듣고 싶지 않은 말들을 너무 많이 들어야 했다. 미지 아버지는 두 눈을 꽉 감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귀에 막 들려 와. '자식 잃었는데 웃어?' 이런 소리가 많이 들려서 너무 싫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야 되는데 이게 여기(가슴) 차 있는 거야. 바깥에서는 어떤 말도 못 해. 집에서 농담 같은 것도 힘들어. 다들 자기 마음이 아니야. 10년 됐지만 똑같아. 죽기 전까지는 똑같을 것 같아. 그나마 여기 오면은 담아놓지 않고 말을 할 수 있잖아. 유가족이니까. 어떤 말을 해도 넘어가. 농담도 하고 웃기도 하고. 여기서는 다 얘기해요. 시시콜콜한 얘기들이죠."

미지 아버지는 목공소 상근자로 활동하면서 매일 아침에 출근해 저녁까지 집회나 회의가 있을 때를 빼고, 또 일주일에 한 번 미지가 있는 효원공원에 가는 날을 빼고는 목공소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는 목공소가 있어서, 유가족들과 얘기할 수 있어서 세월이 흘러갔다고, 여기까지 오게 됐다고 여겼다.

10년 되돌아보니 남은 건...
 
 목공으로는 생계가 유지되지 않아 다른 일을 해야할 것 같다면서도 미지 아버지는 자기 손으로 만든 세상 하나뿐인 작품을 보며 사람들이 웃는 걸 보면 얼마나 뿌듯한지, 또 이곳에서는 유가족들이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편하게 대화할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거듭 얘기했다.
ⓒ 정윤영
세월은 흘렀지만, '자식을 잃은 부모'의 시간이란 지옥이라고밖에는 표현할 말이 없었다. 가정은 망가졌고 삶에 아무 재미가 없었다. 특별법 제정을 위해 매일 서울로 올라가 열심히 싸웠다. 그 자리에는 정치인들이 있었고 대선후보도 있었다. 유가족들과 같이 단식하고 세월호 진상규명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미지 아버지는 '동고동락'한 사람들의 그 말과 행동을 믿었다. 매주 효원공원에 가서 미지에게 '무슨 수를 써도 진상을 밝히겠다' 약속하고 다짐했다. 그 약속에 기대 살아졌다.

정권이 바뀌고 '촛불정부'가 들어섰다. 대통령의 진심을 믿었기에 유가족들은 기다렸다. 임기가 끝나가도록 밝혀지는 게 없었다. 미지 아버지는 매주 가던 효원공원을 전처럼 찾아가지 못한다. 아무것도 밝히지 못한 채 미지를 만날 자신이 없었다. 모든 게 분노스러웠다.

"우리가 잘못했지. 끝까지 싸웠어야 했는데. 이태원 참사 났을 때 어떤 유가족이 그러는 거야. 내가 왜 세월호 때 발 벗고 나서지 않았을까, 발 벗고 나섰더라면 이런 사고는 나지 않았을 거라고. 그 말을 듣는데 너무 가슴이 아프더라고. 우리가 제대로 못 해서 또 사고가 났구나 싶고. 너무 미안한 거야."
 
 또 한 번 정권이 바뀌고 세월호 관련 예산이 줄어든 지금, 목공소도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공간을 빼라고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하고 있지만 ‘갈 데가 없다.'
ⓒ 정윤영
     
십 년을 되돌아보면 '솔직히 화나는 것밖에' 없다. 배신감뿐이다. 이렇게 사는 건 '올바르게' 사는 게 아니었다. 끓어오르는 화를 억누르며 자신을 달래기도 하지만 언제고 폭발할 것 같아 조마조마하다. 터질 것 같은 마음을 어떻게든 달래야 했다. 미지가 매일 했다던 기도가 있다. 아빠가 술과 담배를 끊고 교회에 나오기를 바랐다던 기도였다. 아버지는 미지가 매일 아빠를 위해 기도했다는 걸 가끔 떠올린다. 술과 담배를 모두 끊었고 매주 교회에 나간다.

아버지는 목공소에서 안산 길거리에서, 팽목항과 광화문에서 만난 사람들도 떠올린다. 특별법 제정 서명을 받을 때 가까이 다가와 안아준 사람들, 유가족을 대신해 싸워준 사람들, 함께하겠다고 끝까지 진실을 밝히겠다는 약속해준 사람들이었다. 위로의 말을 많이 받았다고 느낀다. 협동조합을 시작할 때 받은 만큼 돌려주고 싶다고 얘기한 이유였다. 위로가 되는 말은 또 있다. 5.18 부모님들이 4.16 유가족에게 해준 말이다. 부모님들이 해준 말을 미지 아버지는 가슴에 품고 살며 종종 떠올리게 되었다.

"광주도 30년, 40년 지나면서 조금씩 밝혀지듯이 우리도 오래 가지 않겠냐고 얘기하셨어. 정부를 상대하는 건 (진상을) 밝히기 힘드니까 참고 느긋하게 즐기는 사람이 이긴다, 조바심 내지 말고 천천히 싸우라고 그러시는 거야. 당시엔 속으로 빨리 싸워서 이겨야지. 그랬는데 그분들이 진리가 있는 말씀을 하셨구나(싶어요). 오래 참는 자가 승리한다는 말을 명심하고 살아가면 될 것 같아."

미지 아버지는 분노가 차오를 때는 그 말을 되새기며 마음을 다독이고 아무 생각 없이 나무를 도닥인다. 어그러진 진상규명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 수는 없다. 다만 해결돼야만 할 일이므로 언제고 해결이 될 것이라고 '그냥 무심코 기대할' 뿐이다. '우리 같은 사람 나오면 정말 안 되'므로 그럼 또 한 번 '세상이 박살 나는 것'이므로.

최근 정권이 바뀌고 다시 한번 싸울 때가 되지 않았나 아버지는 생각한다. 그때가 되면 '열 일 제쳐놓고' 세월호의 진실을 밝혀내겠다고 다짐한다. 지금은 버려진 가로수를 대패질하고 사포질하면서. 목공소를 찾는 사람들과 주걱을 만들고 소반을 만들면서. 그 사람들과 함께 웃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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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숨은노동찾기> 공저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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