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중앙] “그냥 깨진 돌이 아니라고?” 구석기 사람들은 어떻게 도구를 만들었을까

2024. 1. 29.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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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하나로 자르고 찍고 썰고 긁고 뚫고 파고…주먹도끼가 구석기 대표인 이유 실감했죠

두꺼운 옷을 여러 겹 입어야 추운 날씨를 버틸 수 있는 요즘입니다. 과학이 고도로 발달한 현대에서도 추위와 싸우는 건 쉽지 않은데요. 수백만 년 전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추위를 견디며 살았을까요. 구석기 시대 인류의 생활과 주먹도끼 등 석기라는 도구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소중 학생기자단이 나섰습니다.

조유진 학생기자와 김태연·오은채 학생모델(왼쪽부터)이 경기도 연천군 연천전곡리유적 내 전곡선사박물관과 전곡리 토층 전시관에서 구석기 시대 인류의 생활과 주먹도끼 등 각종 석기에 대해 알아봤다.


과거 인간이 남긴 유적·유물을 연구하는 고고학에서는 인류가 살아온 시기를 구분할 때 도구를 활용하곤 합니다. 인류가 사용한 도구의 재료 및 제작기술에 따라 석기·청동기·철기 시대 등으로 나누는 식이죠. 그중 가장 이른 석기 시대는 이름대로 인류가 돌로 도구를 만든 시대를 말해요. 석기 시대는 다시 구석기·신석기 시대로 나뉩니다. 주로 돌을 깨뜨리고 떼어내 석기(뗀석기)를 만들어 사용한 구석기 시대는 인류가 나타난 후부터 돌을 갈아서 만든 석기(간석기)를 사용한 신석기 시대(약 1만 년 전) 이전까지를 말해요. 오래전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생활했는지 알아보기 위해 김태연·오은채 학생모델과 조유진 학생기자가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에 있는 전곡선사박물관을 방문했습니다.

구석기 시대 인류의 진화 과정과 생활, 주먹도끼 등 석기를 확인할 수 있는 박물관 2층 상설전시관 앞에서 신지섭 학예연구사와 이형기 연구원이 소중 학생기자단을 반갑게 맞이했어요. 신 학예연구사는 “2011년 개관한 전곡선사박물관은 구석기 시대의 다양한 유물이 발굴된 연천전곡리유적(사적 제268호) 내에 있어요. 연천전곡리유적은 특히 1978년 동아시아 최초로 뗀석기 종류 중 하나인 아슐리안형 주먹도끼가 발견된 곳이기도 합니다”라고 설명했어요.

이형기(맨 왼쪽) 연구원이 소중 학생기자단에게 현재까지 밝혀진 최초의 인류 사헬란트로푸스 차덴시스부터 호모 사피엔스까지 인류의 진화를 설명하고 있다.


인류의 진화와 구석기 생활

상설전시관 입구에선 유인원같이 생긴 모형이 여럿 줄지어 서서 인류의 진화 과정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최초의 인류를 아시나요?” 이 연구원이 그중 가장 앞에 있는 모형을 가리키며 묻자 소중 학생기자단은 고개를 갸웃했어요. “바로 ‘사헬란트로푸스 차덴시스’(Sahelanthropus Tchadensis)예요. 현재까지 밝혀진 가장 오래된 인류죠. 약 700만 년 전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며 2001년 중앙아프리카 국가인 차드 공화국의 주랍 사막에서 두개골과 2개 아래턱, 3개 이빨 등 6점의 화석이 발견됐어요. ‘사헬’은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의 주변 지대를, ‘차덴’은 차드 공화국을 뜻하는데요. 한마디로 ‘사하라 사막이 있는 차드 공화국의 인류(사헬인)’라는 것입니다.”

인류와 유인원은 허리를 세워 두 발로 걷는 ‘이족보행’으로 구분할 수 있어요. 이족보행을 하는 포유류의 특징으로는 두개골 아랫부분에 있는 큰 구멍인 ‘대후두공’을 들 수 있습니다. 대후두공을 통해 머리와 척추가 연결되고 뇌에서 척수가 이어지죠. “이족보행을 하는 인간은 머리와 척추가 위아래로 이어져 대후두공이 두개골 아래 정중앙에 있어요. 하지만 네 발로 걷는 짐승들은 머리가 앞에 있고 척추는 뒤에 있어 대후두공이 두개골 뒷부분에 있죠.” 사헬란트로푸스 차덴시스는 화석 양이 적은 탓에 DNA 추출 분석 등이 어려워 이족보행을 한 최초의 인류인지 아닌지 학계에서 논란이 일었는데요. 2022년 프랑크 기 프랑스 푸아티에대 고생물학과 교수 연구팀이 추가로 화석 20점을 발견·분석해 사헬란트로푸스 차덴시스가 이족보행했음을 확인했어요.

인류는 불을 사용하는 법을 깨우치면서 고기를 많이 먹게 돼 사냥 도구를 발전시켰고, 석기를 비롯한 각종 도구로 코뿔소·매머드 등 위험한 동물을 멀리서도 공격할 수 있게 됐다.


사헬란트로푸스 차덴시스가 발견되기 전에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Australopithecus)가 최초의 인류였어요. ‘남쪽의 유인원’이라는 의미로, 약 300~400만 년 전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며 지금의 남아프리카 공화국 지역에서 처음 발견됐죠. 태연 학생모델이 “그렇다면 돌로 도구를 만든 첫 인류는 누구인가요?”라고 물었어요. “현재까지 학계의 정설은 라틴어로 ‘손재주가 있는 사람’이란 뜻을 가진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예요. 호모 하빌리스는 약 250만 년 전에 살았는데요. 아프리카 탄자니아 올두바이 지역에서 처음 발견됐죠. 돌의 한쪽 면에서 박편을 떼어내 만든 외날찍개 형태의 올도완 석기를 만들어 썼습니다.”(이)

약 190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살았던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는 아슐리안형 주먹도끼를 만들고 불을 다룬 최초의 인류예요. 프랑스의 생트 아슐 지방에서 다량 발견돼 ‘아슐리안’이라는 이름을 얻은 아슐리안형 주먹도끼는 타원형으로 가공해 다듬은 전형적인 구석기 시대 주먹도끼를 지칭합니다. 아슐리안형 주먹도끼는 약 160만 년 전 호모 에렉투스가 처음 만들어 사용한 것으로 추정돼요. “호모 에렉투스는 약 80만 년 전 돌을 부딪치거나 나뭇가지를 비벼서 일으킨 불꽃을 풀이나 나뭇잎에 옮겨 붙여 불을 만들었어요. 불을 사용한 호모 에렉투스는 어둡지만 밖보다 따뜻한 동굴에서 살 수 있었고, 아프리카를 벗어나 무리지어 이동하면서 지구 전체로 퍼져나갔죠.”(이)

오은채·김태연 학생모델과 조유진 학생기자(오른쪽부터)가 매머드 뼈로 만든 막집에 들어가 구석기 시대 사람들의 생활 공간을 엿봤다.


약 30만 년 전 등장한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Homo Neanderthalensis)는 호모 에렉투스보다 더 체계적으로 돌을 떼어낸 석기를 사용했어요.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 때부터 날카롭고 작은 석기를 나무에 묶거나 붙여서 던지는 무기를 만들었는데요. 이전까지는 근접거리에서 무겁고 큰 돌을 던지고 찌르는 것에 불과했죠. 불의 사용으로 고기를 많이 먹게 된 인류는 사냥 도구를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이러한 무기의 발전으로 코뿔소·매머드 등 위험한 동물을 멀리서도 공격할 수 있게 돼 생명도 보전할 수 있게 됐죠.”(이)

유진 학생기자가 “석기라는 도구를 사용하면서 인류의 신체에도 변화가 생겼을 것 같아요”라고 하자 이 연구원이 긍정했죠. “맞아요. 인류는 석기를 만들기 전에는 부러진 나무나 동물의 뼈를 사용했어요. 손으로 직접 석기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인류의 손이 진화했죠. 유인원은 손바닥과 손가락이 현재 인간보다 길고 상대적으로 엄지손가락은 짧아요. 인간은 유인원보다 짧은 손가락과 긴 엄지손가락을 가져 정밀한 작업이 가능하죠. 또한 유인원은 나뭇가지 등을 움켜쥐는 것 이외의 다른 행동이 어렵지만 인간은 손가락을 교차해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어요. 손을 사용하면 기억력·사고력 등 고등행동을 관장하는 뇌의 전두엽을 자극해 창의적인 활동을 돕죠.”

전곡선사박물관에 전시된 동굴벽화를 살펴보는 소중 학생기자단. 프랑스 쇼베 동굴벽화, 스페인 알타미라 동굴벽화 등 수만 년 전 인류가 동굴에서 생활하면서 안전한 사냥과 풍부한 먹을거리를 얻고자 하는 마음을 나타낸 동굴벽화는 ‘기원미술’이라고 한다.


구석기 시대 인류의 창의적인 활동은 약 16만 년 전 등장한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때 빛을 발합니다. 소중 학생기자단이 프랑스 쇼베 동굴벽화(약 3만4000년 전), 스페인 알타미라 동굴벽화(약 1만6000년 전) 등을 복제한 전시물을 살폈어요. “호모 사피엔스는 동굴벽화·조각상 등 다양한 예술 활동을 했어요. 특히 동굴벽화는 인류가 동굴에서 생활하면서 안전한 사냥과 풍부한 먹을거리를 얻고자 하는 마음을 나타낸 것이죠. 이를 ‘기원미술’이라고 하는데요. 동물의 피나 식물 등 자연에서 얻은 천연물감을 석기·나뭇가지·동물 힘줄에 묻혀 벽에 그리고, 돌을 파서 생긴 흔적으로 인한 색의 차이로 그림을 그리기도 했죠. 들소·말·사슴·사자 등 사냥 장면은 사실적으로 묘사됐어요.”(이)

호모 사피엔스는 동굴에서 주로 생활했지만 사냥하러 오랫동안 들판에 나갈 때는 나뭇가지나 동물의 뼈·가죽을 이용해 간단하게 지낼 막집을 짓곤 했습니다. 전시관에는 우크라이나에서 발견된 매머드 뼈로 만든 막집 복제품이 전시돼 있었어요. 소중 학생기자단은 크고 두꺼운 뼈들을 만져보면서 매머드가 얼마나 컸을지 상상해봤죠. “이 막집은 1만50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돼요. 매머드 아래턱뼈로 울타리를 치고, 어금니로 지붕 아치를 만들었죠. 높이와 길이는 약 3m 정도 되는데요. 이 정도의 막집을 지으려면 적어도 매머드 95마리(뼈 15톤)가 필요하죠.”(이) 수렵·채집 등 외출 시 추위를 더 잘 견디기 위해 옷도 만들어 입었습니다. “정교한 석기로 구멍을 뚫어 귀 달린 바늘을 만들고 순록·소 등의 동물 가죽이나 나무껍질을 얇게 잘라 바느질해 옷과 신을 만들었죠. 따뜻하고 튼튼한 옷은 추위 등의 위협에서 살아남을 수 있게 도와 인류의 활동 영역을 넓혀줬어요.”(이)

2만2000년 전의 이탈리아 아레네 칸디데의 ‘어린왕자’ 무덤 복제 전시물을 확인하는 소중 학생기자단.


호모 사피엔스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는 무덤을 만든 겁니다. 이 연구원이 2만2000년 전의 아레네 칸디데의 ‘어린왕자’ 무덤 복제 전시물을 소개했죠. “이탈리아 북서부 리구리아주의 아레네 칸디데 동굴에서 발견된 이 무덤에는 키가 170cm인 12~14세 소년이 묻혔어요. 머리에는 조가비가 붙은 그물이 있고, 목에는 고둥과 사슴 송곳니로 만든 목걸이, 손에는 석기가 들려있었죠. 화려하게 치장돼 ‘어린왕자’라는 별명이 붙었는데요. 치아 동위원소 분석 결과 바다에 접한 곳에 살면서 해산물을 즐겨 먹었다고 해요.” 태연 학생모델이 “땅에 묻은 것과 그냥 파묻힌 것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나요?”라고 물었어요. “무덤을 자세히 보면 뼈가 가지런하게 놓여있어요. 마치 사람이 편안하게 침대에 누운 것처럼요. 만약 산사태 등 어떤 사고에 의해 파묻힌 거면 생존을 위한 행동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죠. 무덤은 혼자서 만들 수 없잖아요. 그래서 무덤은 그 당시 인류가 집단생활을 했다는 증거가 되죠.”(이)

경기도 연천전곡리유적은 구석기 시대 유적으로 그 중요성을 인정받아 1979년 사적 제268호로 지정됐다.


전곡리와 주먹도끼

1940년대 미국의 고고학자 H L 모비우스 교수는 아슐리안형 주먹도끼가 인도를 기준으로 서쪽(서양)에만 존재한다는 ‘모비우스 이론’을 주장했어요. 그때까지 아슐리안형 주먹도끼는 아프리카와 유럽 등지에서만 발견됐고 동아시아에서는 발견되지 않았죠. “주먹도끼가 구석기 시대를 대표하는 유물인 것은 이 도구 하나로 자르고, 찍고, 썰고, 긁고, 뚫고, 파는 등 용도가 다양했기 때문이에요. 주먹도끼에 당시 인류의 기술력이 총집합됐다고 할 수 있죠. 그래서 모비우스 이론은 구석기 시대부터 서양의 석기 제작 기술을 비롯한 지능과 신체가 동양보다 뛰어났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었어요.”(이)

동아시아 최초로 아슐리안형 주먹도끼가 발견된 것은 1978년의 일입니다. “당시 주한미군으로 한국에 온 그렉 보웬은 미국 대학에서 고고학을 전공했어요. 그는 고고학적 호기심을 보이며 한탄강 근처를 답사하다가 주먹도끼를 발견하게 됐죠. 이후 프랑스 고고학자 프랑수아 보르드 교수에게 관련 보고서를 보냈고, 보르드 교수는 당시 서울대 박물관장이었던 김원용 교수에게 내용을 전달했어요. 김 교수는 제자 정영화 교수와 함께 현장을 조사해 주먹도끼를 포함한 여러 석기를 발견했어요. 연천전곡리유적에서 주먹도끼가 발굴된 이후 모비우스 이론은 폐기됐고, 주먹도끼 연구·발굴·조사가 활발해지면서 국내 다른 지역을 비롯해 중국·베트남 등에서도 주먹도끼가 많이 발견됐어요.”(이)

전곡리 선사유적지발굴단은 1979년부터 2011년까지 19차 발굴 작업을 통해 약 4500여 점의 석기를 발견했다.


“전곡리 선사유적지발굴단이 조직돼 1979년 1차 발굴을 시작으로 2011년까지 총 19차에 걸쳐 발굴이 진행됐고 그 결과 약 4500여 점의 석기를 발견했어요. 2011년 이후 정기적인 추가 발굴 작업은 진행하지 않지만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지역은 선사문화 중심지로 신규 건축 및 도로 공사 시 반드시 발굴을 진행해야 하죠. 최근에는 박물관 주변 아파트 단지 건축 전 발굴을 통해 일부 구석기 유물을 수습하기도 했습니다.”(신) 태연 학생모델이 “전곡리에서 발견된 석기들은 언제 만들어진 건가요?”라고 물었어요. “호모 에렉투스가 아프리카에서 동아시아까지 이동해서 약 30만 년 전에 만든 것으로 추정하고 있어요. 연천전곡리유적 일대는 약 50만 년 전 현재 북한의 강원도 평강군 오리산에서 분출한 용암이 한탄강을 흘러 들어와 크고 작은 용암대지와 거의 수직에 가까운 현무암 절벽을 형성하고 있는데요. 이 현무암층에서 규암·화강암 등으로 만들어진 석기들이 발견됐죠.”(이)

유진 학생기자가 석기 종류에 대해 궁금해했어요. “주먹도끼는 돌의 양면을 다듬어 좌우 대칭을 이루도록 만들고 양쪽 가장자리 끝부분 날을 날카롭게 다듬은 것이에요. 여러 용도로 활용이 가능해 구석기 시대 대표 석기로 꼽히죠. 찍개는 돌의 가장자리 일부를 크게 떼어내 날을 만들어 동물의 뼈나 나무를 찍을 때 썼는데요. 한쪽 면을 떼어낸 외면찍개와 양쪽 면을 떼어낸 양면찍개가 있어요. 긁개는 돌의 가장자리에 연속적이고 고른 잔손질을 해서 곧거나 볼록하거나 오목한 날을 만들어 나무·가죽·뼈를 긁어 다듬는 용도로 썼고, 찌르개는 돌의 양쪽 가장자리를 다듬어 끝부분을 뾰족하고 날카롭게 만든 것으로 나뭇가지에 매달거나 붙여 동물을 사냥하는 데 사용했죠.”(이)

1978년 한탄강 근처에서 동아시아 최초로 아슐리안형 주먹도끼를 발견한 그렉 보웬(위 사진)과 연천구석기유적에서 출토된 석기들.


은채 학생기자가 “석기와 일반 돌(자연석)은 모양이 비슷할 수 있는데 어떻게 구분하나요?”라고 질문했어요. “석기는 사람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인위적으로 돌을 내리쳐서 만들기 때문에 돌에 규칙적으로 떼어낸 흔적이 남아요. 석기는 일정한 형태도 가지고 있는데, 주먹도끼의 경우 끝이 뾰족하고 좌우 대칭의 물방울 모양이죠. 가장 확실하게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은 석기 표면에 남아있는 여러 흔적을 현미경으로 자세히 분석하는 것이에요. 이를 통해 진짜 석기인지 알 수 있고 가죽·나무 등 무엇을 대상으로 사용했는지 용도도 확인할 수 있죠.”(이)

석기를 만드는 데 사용되는 돌은 입자가 균일하고 균열이나 흠집이 없어야 해요. 입자가 다르고 금이 있다면 의도한 방향과 모양대로 깨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죠. “동양과 서양 석기는 그 지역에서 많이 나는 돌의 차이 때문에 모양이 조금 다른데요. 서양 석기는 주로 가공하기 쉬운 무른 돌을 사용해서 날이 날렵해요. 동양 석기는 단단한 돌을 사용해 대부분 두툼한 형태를 띠죠. 석기에 많이 사용되는 재료 중 하나로 흑요석을 들 수 있어요. 용암이 급속하게 굳어 만들어진 흑요석은 유리와 비슷한 강도를 가지면서 가볍게 때려도 예리하고 정밀한 날을 만들 수 있죠. 흑요석으로 만든 석기는 우리나라 중부 및 동해안 지역에서 출토됐는데요. 흑요석은 화산지대에서 나오기 때문에 흑요석을 가지고 오려고 먼 길을 이동했을 수도 있고, 중간에 그 지역 사람과 만나 교류를 했을 수도 있다고 추정하죠.”(이)

동물 뼈에 날카로운 석기를 결합한 찌르개(위 사진)와 창을 멀리 정확하게 던지기 위해 만든 창던지개.

“돌을 때리는 것도 여러 방법이 있을 것 같아요.” 은채 학생모델이 말했어요. “구석기 시대 초반에는 석기를 정교하게 만들 기술이 없어서 크고 무겁고 투박한 석기를 만들었어요. 돌로 돌을 깨서 모양도 예쁘지 않죠. 시간이 지나면서 정밀하게 가공할 수 있도록 발전해 성능은 뛰어나지만 크기는 작고 섬세한 석기를 만들게 됐죠. 뗀석기 기술에는 땅에 있는 큰 돌에 손에 든 돌을 내리쳐 떼어 내는 ‘모루떼기’, 한 손에 든 돌·뿔·나무 등을 다른 손에 든 돌에 부딪혀 떼는 ‘직접떼기’, 돌을 직접 때리지 않고 뼈·뿔 등을 정으로 쓰고 다른 돌을 망치로 삼아 떼어내는 ‘간접떼기’, 뼈·뿔 등을 힘껏 눌러 돌을 떼어내는 ‘눌러떼기’ 등이 있어요.”(이)

소중 학생기자단이 구석기 시대 사람처럼 석기로 가죽을 잘라보고 불을 피워봤습니다. 이 연구원이 소중 학생기자단을 위해 직접 만들었다는 주먹도끼를 선보였죠. 소중 학생기자단은 주먹도끼의 날카로운 부분을 이용해 가죽을 잘라봤어요. 요령이 없어 쉽게 자르지 못하자 이 연구원이 “주먹도끼를 위아래로 왔다 갔다 해서 자르는 것보다 위에서 아래로 힘을 줘 한 번에 쭉 긋는 게 더 잘 잘린답니다”라고 팁을 줬어요. 팁대로 해보니까 주먹도끼가 마치 칼인 것 마냥 쓱쓱 잘 잘렸죠. 불 피우기는 야외에서 해야 하는데, 이날 눈이 많이 와 실내에서 어떤 식으로 불을 피우는지만 배웠어요.

■ 구석기 시대의 다양한 석기

「 구석기 시대 인류는 돌을 떼어내 다양한 석기(뗀석기)를 만들었습니다. 대표적인 주먹도끼를 비롯해 어떤 석기들이 있고 어떤 용도로 사용됐는지 알아볼까요.


주먹도끼: 돌의 양면을 다듬어 좌우 대칭을 이루도록 만들고 양쪽 가장자리 끝부분 날을 날카롭게 다듬은 양면 석기. 찌르고 긁고 파는 등의 여러 용도로 활용이 가능해 구석기 시대 대표 석기로 꼽힌다.


찍개: 돌의 가장자리 일부를 크게 떼어내 날을 만든 석기. 한쪽 면을 떼어낸 외면찍개와 양쪽 면을 떼어낸 양면찍개가 있다. 동물의 뼈나 나무 등 무언가를 찍을 때 사용했다.


긁개: 돌의 가장자리에 연속적이고 고르게 손질을 해서 곧거나 볼록하거나 오목한 날을 만든 석기. 주로 나무나 가죽, 뼈를 긁어 다듬는 용도로 쓰였다.


찌르개: 돌의 양쪽 가장자리를 다듬어 끝부분을 뾰족하고 날카롭게 만든 석기. 자루에 매달아 던져 동물을 사냥하는 데 사용했다.


밀개: 돌의 한쪽 끝을 둥글게 손질해 만든 석기로, 사냥한 동물의 가죽을 벗겨낸 다음 살점과 피막 등을 제거하거나 나무껍질을 벗기는 데 쓰였다.


새기개: 돌의 끝부분을 비스듬하게 떼어내 날을 만든 석기. 동물 뼈나 나무에 홈을 파고 새기는 데 썼다.

“곡선 형태의 나무 막대기 양쪽 끝에 끈을 연결해 만든 활의 끈 중간에 짧은 나무 막대기를 묶어요. 구석기 시대에는 동물 힘줄이나 질긴 나무줄기로 끈을 만들었어요. 바닥에 짧은 나무 막대기가 들어갈 정도로 홈이 파진 나무판을 놓고 짧은 나무 막대기를 홈에 끼운 뒤 손에 쥘 수 있는 크기의 받침돌로 눌러 막대가 그 자리에 있게 고정합니다. 활을 좌우로 왔다 갔다 하면 짧은 나무 막대기가 돌면서 나무판이 갈려 검은 재가 생겨요. 재들이 하나의 불똥을 이뤄 굉장히 뜨겁죠. 재를 모으고 태울 수 있는 나뭇잎이나 풀을 갖다 놓은 다음 입으로 불어 공기를 넣어주면 연기가 나면서 불이 붙죠.”(이)

전곡선사박물관은 계절에 따라 실내·야외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매달 새로 구성한 교육프로그램을 홈페이지(jgpm.ggcf.kr)에 안내합니다. 소중 학생기자단이 체험한 석기로 가죽 자르기, 불 피우기는 올해 4월 이후 진행 예정인 캠프 프로그램에서 해볼 수 있죠. 올해 31회를 맞는 ‘연천 구석기 축제’에선 구석기 체험프로그램·공연마당·고고학아카데미 등을 진행하며, 5월 3~6일 개최 예정입니다.

소중 학생기자단은 구석기 시대 사람들처럼 활로 작은 막대기를 돌려 불을 피우는 방법(맨 위 사진)을 알아보고, 주먹도끼의 날카로운 부분을 이용해 두꺼운 가죽을 잘라 봤다.

체험을 마친 소중 학생기자단은 박물관에서 나와 같은 연천전곡리유적 내에 있는 전곡리 토층 전시관을 찾았습니다. 4차 발굴(1981년 10~11월) 장소를 당시 모습으로 복원해 2005년부터 전시하는 곳이죠. 연천군청 문화체육과 이혜숙 전곡리 토층 전시관 담당 직원이 4차 발굴 현장 구덩이가 있는 곳으로 소중 학생기자단을 안내했어요. "4차 발굴 때 주먹도끼·찍개·긁개 등 유물이 가장 많이 출토됐고 구덩이에서 길이 약 50cm의 큰 암석이 나왔어요. 그 전까지는 발굴 작업 중에 이런 암석이 발견되지 않았죠. 구덩이 오른쪽을 보면 그 암석이 있는데요. 암석에는 모서리가 많이 닳은 흔적이 있었고, 이 흔적이 자연적으로 생성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석기를 제작할 때 사용했던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어 연천전곡리유적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됐죠. 이러한 이유로 4차 발굴 현장이 중요하다고 판단해 사람들에게 보여주고자 복원했답니다.”

전곡리 토층 전시관은 유물이 가장 많이 출토된 4차 발굴 현장을 보존·전시해 당시 지층과 발굴 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


“이때 발견된 유물들과 큰 암석은 발굴용 구덩이 깊이 200cm 부근의 현무암층 표면에 집중적으로 있었는데요. 현무암층 위에는 진흙으로 된 두꺼운 퇴적층이 쌓여있었죠. 퇴적층은 하천이 범람하면서 주변에 진흙이 두껍게 쌓이며 오랜 시간을 걸쳐 형성되며 그 과정에서는 진흙 이외에 다른 것은 쌓이지 않아요. 그 퇴적층을 걷어내자 깨진 돌들이 발견된 거죠. 이는 아주 오래전 누군가가 깨진 돌을 버렸거나 그대로 놔둔 걸 진흙이 덮어버렸다는 걸 의미해요. 조사 결과 이곳에서 깨진 돌, 즉 석기를 사용하며 생활한 인류가 있었고 발견된 돌들이 석기라는 걸 알 수 있었죠."

은채 학생모델이 전시관을 나와 눈 내리는 하늘을 보면서 “구석기 시대에도 눈이 많이 내리고 엄청 추웠을 텐데 다양한 석기를 만들고 그 석기를 이용해 생활하며 생존했다는 게 대단한 거 같아요”라고 말했어요. 태연 학생모델과 유진 학생기자도 맞다면서 고개를 끄덕였죠. 소중 학생기자단이 오늘날처럼 첨단 기술이 없던 구석기 시대 인류의 생활 방식에 대단함을 느꼈나 봅니다.

■ 학생기자단 취재 후기

「 구석기는 저의 관심 분야라서 취재 전부터 많이 설렜어요. 연천전곡리유적에 있는 전곡선사박물관에서 구석기 시대 인류가 어떻게 진화하고 생활했는지 알아보고, 주먹도끼 등 다양한 석기들을 보고 체험을 통해 주먹도끼도 만져봤죠. 주먹도끼로 가죽을 잘라봤는데 제 손보다 큰 돌을 잡고 사용하는 게 쉽지 않았어요. 하지만 주먹도끼로 질긴 가죽을 잘 자르면서 재미를 느꼈답니다. 구석기 시대 동굴벽화를 재현한 섹션도 인상적이었어요. 동굴벽화를 보면서 구석기 시대 사람들이 어떻게 그림을 그리게 됐는지 알아 신기했죠. 취재 날 눈이 많이 와서 연천전곡리유적을 다 둘러보지 못했는데요. 겨울방학 동안 다시 방문해 야외 유적 전체를 돌아다녀 보려고 합니다.

김태연(인천 진산초 4) 학생모델

경기도 연천군에 있는 전곡선사박물관에 다녀왔습니다. 박물관에서 인류의 진화 과정, 주먹도끼 등 다양한 석기에 대한 여러 설명을 들었어요. 저는 동굴벽화가 기억에 많이 남았는데요. 옛날 사람들이 동굴 벽에 그림을 그렸다는 것과 한눈에 봐도 무슨 동물인지 알 수 있는 그림들이 있어 신기했어요. 주먹도끼를 사용해 가죽을 잘라보는 체험도 했는데, 날이 뾰족한 부분을 이용해 힘을 줘 그어보니 쓱쓱 잘 잘려 신기했습니다. 날이 좋았으면 밖에서 불 피우기 체험도 할 수 있었을 텐데 이형기 연구원님의 시범만 봐서 아쉬웠어요. 다시 박물관을 방문한다면 제대로 불 피우기 체험을 해보고 싶습니다.

오은채(서울 가동초 5) 학생모델

전곡리선사박물관은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규모가 컸어요. 신지섭 학예연구사님과 이형기 연구원님의 설명을 들으며 상설전시관을 돌았는데, 구석기 시대에 인류가 진화하면서 어떻게 생활했는지 알 수 있었고 석기들도 가까이서 볼 수 있었죠. 구석기 시대에도 땅에 사람을 묻는 무덤이 있다는 게 신기했어요. 동굴벽화를 보면서 당시 사람들이 어떤 동물을 사냥하고 다녔는지도 알 수 있었죠. 박물관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전곡리 토층 전시관에도 갔는데요. 연천전곡리유적 발굴 현장을 보존해둬 생생하게 발굴 당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답니다.

조유진(인천 부원초 6) 학생기자

글=박경희 기자 park.kyunghee@joongang.co.kr, 사진=임익순(오픈스튜디오)·전곡선사박물관, 동행취재=김태연(인천 진산초 4)·오은채(서울 가동초 5) 학생모델·조유진(인천 부원초 6) 학생기자, 참고서적=『왜 호모 사피엔스만 살아남았을까?』(채륜서)·『고고학으로 만나는 구석기 사람들』(평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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