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한 모금] 철거 앞둔 서울 힐튼, 유산으로서 가치는?

박병희 2024. 1. 28.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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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힐튼' 40년 역사 기록집
'철거와 보존 사이' 대안 모색
사진·38쪽 분량 설계도면 수록

고(故)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은 1977년 가을의 어느 날, 미국 시카고의 시어스 빌딩을 방문했다. 경기고등학교 2년 선배 건축가 김종성과의 만남 때문이었다. 친화력이 좋은 김 회장은 이내 선배를 형이라 부르며 힐튼 프로젝트를 맡아달라고 했다. 서울역 앞에 남산으로 올라가는 경사진 땅에 특급호텔을 짓는 계획이었다.

현재 서울역 앞에 있는 서울스퀘어는 본래 대우그룹 본사 빌딩이었다. 대우그룹이 1973년 정부로부터 이 빌딩을 인수했다. 당시 해당 빌딩은 교통공사 건물로 사용하려고 골조 공사만 하고 마감이 안 된 채 방치된 상태였다. 제3공화국 정부는 김 회장에게 빌딩을 넘겨주는 대신 관광 산업 진흥을 위해 그 뒤의 경사진 땅에 특급호텔을 짓도록 했다.

그렇게 한국 1세대 건축가 김종성은 남산 자락의 서울 힐튼 건설을 맡았다. 김종성 건축가는 1978년 초 설계를 시작해 1983년 12월에 서울 힐튼을 완공했다. 서울 힐튼은 대우그룹에서 싱가포르계 CDL호텔을 거쳐 현재 부동산투자사 이지스자산운용 소유가 됐다. 이지스자산운용은 호텔 주변 일대 대규모 개발을 추진 중이다. 서울 힐튼은 바닥과 기둥 정도만 남길 계획이다. 호텔은 이미 2022년 12월31일 영업을 끝내고 처분만 기다리고 있다.

'힐튼이 말하다'는 서울 힐튼의 40년 역사 기록집이다. 호텔을 설계한 건축가 김종성을 비롯해 다양한 이들의 글이 실렸다. 글은 쓴 이들은 모두 유산으로서 서울 힐튼의 가치를 강조한다. 현재 이지스자산운용의 개발 계획은 사실상의 철거이며 이에 대한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글쓴이들은 이지스자산운용의 재산권도 인정하면서 철거와 보존 사이의 합리적인 대안도 제시한다. 서울 힐튼을 설계한 김종성과 후배 건축가들의 다양한 글과 인터뷰, 지난해 4월에 열린 특별좌담회 '건축가 김종성과의 만남: 힐튼호텔 철거와 보존 사이'의 토론 내용, 서울 힐튼의 사진 자료와 38쪽에 이르는 서울 힐튼 설계 도면 등이 수록됐다.

인구 천만 명을 오래전에 넘어서 메가시티로 향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은 물리적인 측면에서 보면 매우 풍요롭고 첨단을 달리는 도시이다. 비물리적인 측면에서 보면 600년 역사를 지닌 문화 수도, 다이내믹한 대한민국의 수도로서 '활기'차고 '역동'적인 '첨단'도시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거부할 수 없는 이미지가 공존한다. 서울은 '척박', '삭막', '번잡', '혼란스러움' 등 현대의 대도시가 지닌 부정적인 이미지를 피하지 못한다. 도시인문학에서는 도시를 외면적 도시(External city)와 내면적 도시(Internal city)로 나눈다. 외면적 도시란 기념비적인 상징물로 구성되는 랜드마크 중심적인 도시다. 고층빌딩, 대형복합건물, 넓은 도로, 고가도로, 도시철도, 혹은 지하철 등이 도시를 구성하는 주요 인프라다. (중략) 이에 비해 내면적 도시는 내면지향적인 기억의 도시를 가리킨다. 도시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포용하고 소외되는 곳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도시인의 라이프스타일, 다양성, 다문화주의를 추구한다. (중략) 서울의 경우 외면적 도시를 완성해 가고 있는 중이다. 동시에 내면적인 도시에도 관심을 기울이면 좋을 것이지만 자본의 논리가 가장 힘을 발휘하는 세상인지라 결과는 우리가 목도하는 대로이다.(104쪽, 함혜리, 도시와 이미지, 그리고 기억)

서울건축에서의 28년 작업 동안 육군사관학교 도서관(1982), 청주대학교 중앙도서관(1986), 제주도 우당도서관(1984), 대우증권 빌딩(1984), 대우문화재단 빌딩(1984), 동양투자금융빌딩(1987), 서울올림픽 역도경기장(1986), 서울대학교 박물관(1984), 부산 파라다이스비치 호텔(1988), 양정 중·고등학교(1988), 이수화학 사옥(1989), 목동도서관(1990), 경주 선재미술관(1991), 스위스그랜드 호텔, 서울역사박물관(1988), SK 사옥(1999) 등 많은 건물을 설계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완성도 높은 것은 역시 서울 힐튼이다.(134~135쪽, 김종성, 모더니즘 건축물 서울 힐튼의 탄생)

1987년 봄, 서울은 올림픽을 준비하는 분주함과 기대가 가득했습니다. 빠른 성장과 변화가 일상의 모든 영역에서 이뤄지던 시기였죠. 이탈리아어로 '다리'를 뜻하는 '일 폰테(Il Fonte)'가 서울 힐튼에서 운영을 시작한 것도 이즈음입니다. 국내엔 아직 정통 이탈리아 음식이 익숙하지 않던 시기, 대부분의 사람에게 다소 생소한 메뉴이기도 했죠. 그러나 오픈 이후 인기는 대단했습니다. 이탈리안 사관학교란 별명이 생길 정도로 국내 유수의 셰프들이 이 레스토랑을 거쳐 가기도 했고요. (중략) 당시 호텔들은 주로 프렌치 레스토랑을 선보이고 있었죠. 호텔 바깥에서도 이탈리안 레스토랑은 흔치 않았습니다. 1980년대 후반에야 점차 서울에도 웨스턴 메뉴를 다루는 식당들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그 이전에는 양식이라고 하더라도 거의 돈가스, 오므라이스와 같은 메뉴들이 주를 이뤘습니다. (중략)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는 국내에서도 호텔 문화가 점점 익숙해지기 시작했던 때입니다. 일 폰테에도 참 많은 손님이 와 주셨어요. 밸런타인데이 같은 성수기 때는 하루 매출이 5000만원에 육박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어요(163~166쪽, 힐튼의 사람들)

서울 힐튼을 디자인한 건축가 김종성의 생각은 아트리움 공간과 외부 커튼월 시스템을 보존하자는 것이다. 서측 11~12m를 수평 증축해 확장하고, 보관해 두었던 커튼월을 재설치하자는 의견이다.(181쪽, 홍재승, 보존과 철거 사이)

한 번 사라져 버린 건축은 되돌릴 수도 기억할 수도 없고, 그것은 건축계의 손실을 넘어 결국 일반 시민들이 생활하는 우리 도시가 점점 얄팍해져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략) 근현대 우리 건축계에서 중요한 남산의 '밀레니엄 힐튼 서울'의 영업 종료와 복합개발을 위한 철기 위기 상황도 그렇다. 원 건축가 김종성뿐만 아니라 의식 있는 건축계의 안타까움 속에 있지만, 일반 시민사회와 그들을 상대하여 개발 계획을 세우는 새 주인에게는 잘 와닿지 않는 '고상한 이슈'로 치부되는 듯하다. (중략) 서로 바라보는 방향이 다르고 서로 무관심한 사이, 이전의 중요한 도시공간들이 사라졌듯 어느 순간 완전 철거가 진행된다면 큰 손실일 수밖에 없다.(186~187쪽, 지정우, 시간복합개발과 도심 시민공간으로서의 가능성)

경관이 중요했던 호텔들은 남산을 중심으로 주로 세워졌다. 이 중에서 남산 꼭대기의 하얏트 호텔과 시청 앞의 프라자 호텔은 도시 경관 측면에서 늘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남산 절경에 절벽처럼 서 있는 하얏트 호텔은 안에 있는 사람들은 좋겠지만 남산 자락에 떡하니 앉아있는 형상이 비판의 대상이 됐다. 프라자 호텔은 시청을 마주하고 있고, 광화문을 바라보고 있다 하여, '어찌 호텔이 이렇게 중요한 자리에 있느냐?'면서 도시 경관,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철거 논란이 있었다. 서울 힐튼은 그러한 경관적, 역사적으로 신랄한 비난의 대상은 아니었다. (중략)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공공의 관점에서 심하게 비판받았던 하얏트 호텔이나 프라자 호텔은 건재하다. (중략) 이 두 호텔의 건축적 완성도나 도시적 가치는 떨어져도 서울을 보기에 너무도 좋은 자리이기 때문이다. (증략) 두 호텔보다도 가장 건축적 완성도가 높은 서울 힐튼은 원주인이었던 대우가 망하면서 사양길을 걷게 되었다. (증략) 역사성, 경관성, 도시성보다 우선은 역시 경제성이란 말인가? 씁쓸한 대목이다.(206쪽, 전이서, Demolish? or Not?)

서울 힐튼이 지어진 곳은 1960년대 말 도심재개발사업이 추진되던 양동지구 재개발지역이었다. 당시 서울의 대표적 사창가 중 한 곳이었던 양동의 구릉지는 기차를 이용해 서울에 도착한 사람들이 마주하는 서울의 첫 장면이었다. 정부에서는 이곳을 가리는 대규모 공공시설을 짓기 시작했다. 지금도 많은 사람이 대우 빌딩으로 기억하는 이 건물(현 서울스퀘어)은 양동의 사창가를 가리는 효과를 지닌 종합교통센터로 시작되었다. 1968년에 착공된 종합교통센터를 1973년에 '대우'가 매입하면서 양동지구 재개발사업을 주도하였고, 서울 힐튼은 양동 지구 재개발사업의 중심이 되었다.(261~262쪽, 지속가능성을 위하여)

박병희 기자 nu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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