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국왕이 선물"... 루스벨트 저택 나전칠기에 얽힌 사연

장소영 2024. 1. 27.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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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여 년 전 이승만과 윤병구의 첫 민간 외교 현장, 사가모어힐 백악관을 방문하다

[장소영 기자]

미국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이가 곧 미국사 리전트 시험을 앞두고 있다. 미국 공립고등학교에서의 리전트 시험이란 각 과목의 필수 졸업 시험쯤 된다. 갑자기 아이가 한숨을 쉰다.

지난 학기 미국사 시간. 아직 냉전(Cold War)을 다루는 장이 아닌데 교재에 '코리아'가 나오길래 반가워 얼른 보니, 단 한 문장이었다고. 26대 대통령인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의 외교력 일환으로 소개된 1905년 태프트-가쓰라 밀약(Taft-Katsura Agreement: 1905년 7월 29일), 당시 일본의 조선 통치를 승인했다는 문장이었단다. 그래서 친구들이 한국을 일본의 노예국인 줄로만 안다며 아이는 집에 와서 펑펑 울었다. 졸업 시험을 앞두고 다시 그 문장을 보고 있자니 아이도, 나도 마음이 쓰렸다. 

일본의 조선 지배,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상호 간 인정한다는 내용의 태프트-가쓰라 밀약. 이 밀약이 실은 그 20여 년 전에 한국과 맺은 조미수호통상조약을 깨뜨린 행위라는 것까지 미국 학교에서 배우길 기대하는 건 무리다. 우리라도 잘 알아야지. 

지난 1월 6일이 미 26대 대통령인 루스벨트 대통령의 기일이기도 하니, 짧은 2주간의 겨울방학이 지나기 전에 그곳을 방문해 보자고 아이와 약속했다. 보훈처의 '1월의 독립운동가' 홍보영상 첫 장면에도 나오는, 쓰라린 역사의 현장 '사가모어 힐(Sagamore Hill)'로. 

뉴욕 롱아일랜드에 있는 루스벨트 별장에 가다 

맨해튼 동쪽의 긴 섬 롱아일랜드. 예부터 성공한 부자들은 자연경관이 수려한 롱아일랜드 북쪽 해안에 거대한 부지를 잡아 크고 아름다운 맨션을 짓고 본가나 별장을 삼았다. 미국민에게 '테디'라 불리며 사랑받는 루스벨트 대통령도 그중 하나였다. 

그는 오이스터 베이가 한눈에 보이는 언덕에 영국식 저택을 지었다. 처음엔 아내의 이름(엘리스 해서웨이 리)을 따 리홈(leeholm)이라 불렀지만 완공도 전에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지도자'라는 뜻의 인디언 언어를 따 사가모어 힐(Sagamore Hill)이라 이름을 고쳐지었다. 루스벨트는 이곳을 무척 사랑했고, 죽을 때까지 살았다. 재혼한 아내에게 '내가 이 집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당신이 알까'라고 말하곤 했단다. 
 
▲ 오이스터 베이 마을 입구의 루스벨트 동상 루스벨트 대통령의 생가는 맨해튼에 있다. 롱아일랜드 북쪽의 아름다운 해변 오이스터 베이는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자 일가를 이룬 후 저택을 짓고 죽을 때 까지 지냈던 지역이다. 때문에 오이스터 베이에는 루스벨트 가족의 일화를 품은 지역 유산이 많이 남아있다.
ⓒ 장소영
 
그는 용맹한 참전용사이자 트로피 헌터(Trophy Hunter - 취미용 사냥으로 잡은 동물을 벽에 걸어 트로피처럼 전시하는 이)였다. 여름이면 워싱턴에서 올라와 사가모어 힐에 머물렀고, 저택은 책과 트로피, 방문객으로 가득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가모어 힐을 대통령의 여름 별장, 아니 여름 백악관이라 불렀다. 오늘은 나도 방문객이 돼보고자 오이스터 베이 코브(Oyster Bay Cove)로 향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한국 측이 테디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며 이루어진 첫 민간 외교는 하와이 동포들로부터 시작되었다. 고된 노역 중에도 러일 두 강대국 사이 조국의 운명에 노심초사하고 있던 동포들은 하와이에 들른 대통령 특사에게 대통령을 만날 수 있도록 추천서를 받아내었다. 

1905년 7월. 이미 루스벨트 대통령의 은밀한 지시를 받고 일본으로 향하던 국무장관 윌리엄 태프트(William H. Taft, 후일의 미 대통령). 대체 태프트는 무슨 생각으로 추천서를 써줬던 것일까. 그의 일행 중에는 명성왕후 능에서 철없이 모욕적인 언행을 일삼았다고 알려진 대통령의 딸, 엘리스 루스벨트도 있었다. 이미 한국의 운명을 알고 있었던 그녀의 눈에는 추천서를 받으러 온 한인 동포들이 어떻게 보였을까.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지고, 미 대통령의 특사 일행은 하와이에서 서쪽으로, 동포들의 대표로 발탁된 윤병구 목사는 동쪽으로 엇갈린 여행을 시작했다. 미국 대통령에게 조미수호통상조약(조선과 미국의 우호를 약속한 불평등 조약, 1882년)을 상기시키고 대한제국의 자주적인 국권을 지켜달라는 '청원서'와 태프트의 추천서를 들고서 말이다.
 
▲ 사가모어힐 위의 대통령 저택 한적하고 풍광이 아름다운 해변 길을 달리다 언덕길을 올라서면, 국립 역사 공원으로 지정된 사가모어힐 지역을 만난다.
ⓒ 장소영
 
현재 미국 사가모어힐 일대는 국립 역사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맨해튼에서 고속도로를 타고 오다 보면 사가모어힐을 놓칠 수 없도록 표지판이 쉴 새 없이 나타난다.

공원 입구에서 왼쪽으로 대통령의 일가가 살던 집을 개조해 만든 박물관(Old Orchard Museum, 무료)이 있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일대기와 유품이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되어 있어서, 그곳을 둘러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실속 있는 방문이 된다.

오른쪽 나지막한 언덕 위에 테오도르 루스벨트 대통령의 저택이 자리하고 있다. 저택 내부는 미리 가이드 투어를 예약해야 입장이 가능하다. 
 
▲ Old Orchard 비지터센타와 루스벨트 대통령의 생애를 간소하게 전시한 박물관이다. 원래는 루스벨트 3세를 비롯 후손들이 살던 집이다. 작지만 알찬 구성에 무료라 만족도가 높았다. 11시부터 4시까지만 연다.
ⓒ 장소영
1905년, 두 청년의 뜨거웠을 여름

1905년 7월 마지막 날, 하와이에서의 먼 여정 끝에 워싱턴 D.C. 에 도착한 윤병구 목사는 유학 중이던 이승만을 만났고, 뉴욕으로 올라오는 중에 필라델피아에 들러 서재필에게 청원서를 꼼꼼하게 검토받았다. 청원서, 태프트의 추천서, 그리고 귀한 선물을 가지고 뉴욕으로 향했다.

선물의 유래에 대해서 정확한 기록이 남은 것은 없지만, 아마도 청년 이승만이 대한제국을 떠나 올 때 고종의 충복인 민영환 대감으로부터 건네받은 것이 아닌가 역사학자들은 짐작한다. 

두 독립운동가의 선물이 아직 그곳에 있는지, 다른 곳에 보관되어 있는지, 어떤 모양인지에 대한 정보를 찾지 못하고 걸음 했기에, 내부 투어를 하는 동안 가이드에게 꼭 물어봐야겠다고 다짐을 하며 언덕을 올랐다. 

8월, 뉴욕은 더위가 한창일 때다. 100여 년 전 그분들은 한여름 더위보다 더 뜨거운 열정을 안고 언덕을 올랐을 테다. 이 만남의 결과를 아는 나는 겨울 바람보다 서늘한 비통함을 안고 언덕을 올랐다. 미일 수교 50주년을 기념해 저택 앞에 식수된 두 그루의 벚나무가 미워 보인다.
 
▲ 사가모어힐 저택 정문앞의 커다란 벚나무 두 그루 미일수교 50주년을 기념하여 일본에서 선물한 나무이다. 일본은 전략적으로 미국에 벚꽃나무를 선물해 왔다. 수도 워싱턴 D.C.와 인근 북버지니아, 메릴랜드는 봄이 되면 벚꽃이 사방에 가득하게 핀다. 뉴욕은 무궁화와 개나리, 철쭉이 많이 피고 소나무가 울창한데 차츰 도그우드라는 나무만큼이나 벚꽃나무를 흔히 보게 되었다.
ⓒ 장소영
아이와 나는 저택 가이드의 안내를 따라 저택에 들어섰다. 명랑한 가이드와 테디를 사랑하는 방문객들이 서로 해박한 지식과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 내 관심은 온통 조선에서부터 온 선물 도자기에 있었다. 
동물 트로피가 가득한 복도의 첫 번째 방은 대통령 집무실. 그가 존경했던 역대 대통령들과 아버지의 초상화, 빼곡하게 꽂힌 책. 여기는 둘러봐도 동양의 것이라 할 만한 작품이 없다. 
 
▲ 사가모어힐 내의 집무실  루스벨트 대통령의 서재이자 집무실이다. 오른쪽으로 그가 존경했던 여러 대통령들 사이에 가장 큰 아버지의 초상화가 중앙에 배치되었다. 생전에 사용하던 책상 위에 바쁘게 연결되던 전화기가 놓여있다. 사냥꾼답게 저택 어딜 가나 사냥한 야생동물의 머리로 만든 장식품 트로피가 걸려있고 카펫 위에 동물 모피의 깔개도 방마다 깔려있다. 활동가 답지 않게 하버드를 나온 수재고 독서광이었다고 한다. 죽기 직전까지도 글을 쓰던 저술가이기도 하다.
ⓒ 장소영
 
가이드 안내를 받으며 몇 개의 방을 지나 복도 끝에 있는 노스룸(North Room)에 들어섰다. 국외 사절과 국내 명사들의 방문이 끝이 없자 좁은 응접실을 대신할 큰 공간이 필요해 만들었다 한다. 에티오피아 황제의 선물인 커다란 상아를 시작으로 각국에서 보내온 진귀한 선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중앙에 놓인 쇼군의 칼과 갑옷이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사무라이를 미화한 소설에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본인의 전장에서의 활동(스페인전쟁, 'Rough Rider' 기병대)이나 탐험가 기질 때문인지, 진기함 때문이었는지, 일본으로부터의 선물들을 반기고 아꼈단다.
 
▲ 접견실인 노스룸(North Room) 두 독립운동가가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났다는 복도 끝의 큰 공간이다. 각국 사절단과 친구들의 선물, 작품들이 가득하다. 사무라이 갑옷과 칼이 중앙 테이블에 보란듯이 전시되어 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일본을 가깝게 여기고 (실제 존재하지는 않았던) 무사도를 소설로 접하며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 장소영
 
가이드의 상세한 설명을 들으면서 혹시나 남아있을지도 모르는 두 독립운동가의 선물을 찾기 위해 재빨리 큰 방을 눈으로 훑었다. '자개 도자기' 정도로 알고 왔던 터다. 단번에 벽 한쪽에 얌전히 달려있는 작품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도자기라 하여 어딘가 세워져 있을 줄 알았더니 사슴 머리 장식 사이, 생뚱맞은 위치에 달려있다니. 멀리서 봐도 한국 나전칠기 작품 같다. 

나는 가이드에게 저 작품이 어디서, 어떻게 온 것인지 아느냐고 물어보았다. 어떤 질문에도 거침없이 명랑하게 답하던 그녀는 좀 당황한 듯 보였다. 그전에 아무도 관심을 가지거나 질문을 한 적이 없어서 저 작품은 모르겠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둘러선 방문객들이 중국 아니면 일본에서 온 거겠지 저마다 한 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나는 "내 생각에 저것은 한국에서 왔다"라고 말을 꺼내며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이 선사한 작품'이라고 말을 이어가는데, 방에서 다음 공간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벨 신호가 나오며 내 말이 덮이고 말았다. 아쉬웠다. 소수의 방문객들에게만이라도 제대로 말해주고 싶었는데. 독립운동가들도 나도 그들에겐 지나가는 작은 목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 두 독립운동가의 선물, 자개 작품 나전칠기로 보이는 작품이 방 안에 걸려있다. 이승만, 윤병구 두 독립운동가는 청원서와 함께 이 작품을 선물했다고 한다. 공원 기록에는 17세기 작품으로 조선 국왕(the King of Korea)이 보내왔다고만 적혀있다고 나중에 연락을 받았다.
ⓒ 장소영
 
그대로 물러 나올 수는 없었다. 확인을 하고 싶었고, 가이드에게라도 이 공간에서 일어난 중요한 시간과 만남을 일러주고 싶었다. 투어가 끝나고 가이드를 불러 부탁했다. 그녀는 재빨리 내 의도를 파악했고 친절하게도 내 이메일을 물으면서 확인하는 대로 바로 알려주겠다고 했다.
 
▲ 대통령을 급히 만났을 거라 추정되는 부엌 테디 루스벨트 대통령은 평소에도 손님맞이로 바빴지만, 이승만이 찾아온 당일에는 러시아 사절단을 맞느라 더 바빴다. 그들과 밖으로 나갔다가 잠시 들어와 작은 부엌쪽에서 두 독립운동가를 만났다고 이승만은 기록했다. 응접실도, 노스룸도, 대통령의 서재도 아니었다. 이미 가쓰라-테프트 조약을 체결하고 대한의 운명을 일본에 넘긴 상태에서 그들을 잠시 만나준 테디 대통령은 예의있게 반기고, 정식 문서로 올리면 포츠머스 회담에서 청원서를 두고 의논해 볼 것처럼 격려해준뒤 워싱턴DC로 돌려보냈단다. 서글픈 현장이다.
ⓒ 장소영
   
100여 년 전 윤병구, 이승만 두 청년 독립운동가는 루스벨트 여사의 응접실에서 하염없이 기다렸을 것이다. 눈치를 보아하니 러시아 사절단을 맞느라 분주하고 바빴다고 한다. 그들과 함께 밖으로 나가던 루스벨트 대통령이 잠시 안으로 들어왔다.

'접견하기엔 작은 부엌방'이었다고 이승만은 민영환에게 보내는 서신에 적었다(<이승만 동문 서한집(연세대 출판부, 2009년)> 참조). 출입이 가능하고 부엌으로 보이는 작은 방은 응접실 맞은편, 다이닝룸 뒤로 보이는 내실 쪽의 이 방뿐이다. 여기였을까. 대통령의 서재도, 응접실도, 근사한 노스룸도 아닌 이 작은 부엌 한구석이라니. 

두 독립운동가를 대면(8월 4일)하기 전에 이미 데프트-가쓰라 밀약(7월 29일)이 체결되었음을 루스벨트 대통령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당시 청원서를 정식 외교 문서로 등록시키라는 대통령의 말에 희망을 가졌을 두 청년 독립운동가를 생각하니 그만 서글퍼졌다.
 
▲ 시오도어 루스벨트 부부의 묘소 영스 기념묘지(Youngs Memorial Cemetery)에 합장된 루스벨트 부부의 묘소. 근처에 루스벨트 일가의 다른 묘소도 있다. 영스 기념묘지는 사가모어힐로 들어가는 입구의 작은 언덕에 있다. 차로 채 5분이 걸리지 않는 가까운 이웃 언덕이다.
ⓒ 장소영
 
한편, 루스벨트 대통령은 생전 대단한 활동가였다. 미국-스페인 전쟁에 자원한 참전 용사이자 공화당 소속 진보적인 정치인, 아프리카로 원정 사냥을 떠날 정도로 사냥에 미친 인물이지만 아기곰을 놔주는 바람에 '테디 베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고, 무분별한 자연 채굴을 막고 그랜드 케년을 보호하기도 했다. 지금도 쓰이는 미국 국립공원의 모토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연설에서 가져왔을 정도다(For the benefit and enjoyment for people). 
다방면으로 왕성한 활동을 했던 그도 대선 도전에 연이어 실패하고, 1차 세계대전에 참여했던 막내아들이 불과 19세에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자 기력이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그토록 사랑했던 사가모어 힐의 집에서 자던 중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The Old Lion is dead. 아들 아치는 유럽에 있는 형제들에게 아버지의 죽음을 이렇게 전했다. 유명한 그 전문을 지나 루스벨트 대통령의 묘소 앞에 섰다.
 
▲ 루스벨트 대통령이 숨을 거둔 방 늦게까지 저술 작업을 하다 하인에게 불을 꺼달라고 했던 것이 그의 마지막이었다. 아들 아치는 아버지의 죽음을 유럽에 있는 형제들에게 알리면서 'The Old Lion is Dead.'라는 유명한 전언을 남겼다. 땅을 밟고 서서 별을 쫓으라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명언이 묘소 앞에 놓여있다.
ⓒ 장소영
 
1919년 1월 6일 테디 루스벨트는 영면에 들었다. 그의 관심밖에 있던 작은 나라, 강대국 간의 친선 밀약만으로도 쉽게 국권을 앗을 수 있었던 힘없는 나라, 왕의 면전에서 딸이 안하무인 방종할 수 있었던 '이미 운명을 다한 듯한' 나라, 지도에서 지웠다고 생각했던 그 나라에서 그가 숨을 거둔 지 두 달이 채 지나지 않아 거센 태극기의 물결, 3.1 운동이 일어날 것을 그는 몰랐을 것이다.

세계 최초라 할 수 있을 전국적 비폭력 만세 운동이었다. 러일 전쟁을 종결시킨 공으로 그는 1906년 '노벨평화상'을 받았었다. 조선을 건네주고 얻은 상이나 다름없었다. 

만남 당시 밀약 체결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을 루스벨트 대통령. 그럼에도 그는 선물은 받아 걸고, 두 독립운동가들은 워싱턴으로 돌려 보냈다. 아마도 루스벨트는 그가 돌려세운 젊은이가 후일 그가 끝장낸 나라의 초대 대통령이 될 것을 짐작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묘소가 있는 언덕에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데, 이메일 한 통이 도착했다. 헤어진 가이드였다. 내 부탁을 받고 바로 큐레이터에게 문의를 했더니, 다음 두 문장의 정보만을 찾을 수 있었단다. 

"The item is black lacquer with mother of pearl inlay. It's from the 17th century and was given to Theodore by the King of Korea. (17세기에 만들어진 검은 칠기 위에 새겨 넣은 자개 작품으로, 조선 국왕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선물했습니다.)" 

생뚱맞은 위치에 걸린 나전칠기가 이승만, 윤병구 두 분에 의해 전달된 것임을 빠르게 확인하게 되어서 감사했다. 가이드에게 답장을 썼다. 한국 역사에서도 사가모어힐은 중요한 곳임을 짧게 설명하고 1905년 8월의 뉴욕타임스 기사를 첨부했다. 그리고 부탁했다. 앞으로는 빼놓지 말고 한국의 독립을 위해 여기까지 왔던 이들이 드린 나전칠기 작품도 소개해 달라고. 

방문하고 기억하길 바라며 

저택에 가볼 생각이라면, 번거로워도 꼭 예약을 하고 저택 가이드 투어를 꼭 하면 좋겠다(https://www.recreation.gov/ticket). 특히 미국 뉴욕과 롱아일랜드에 살고 계신 분들이 자녀와 함께 가보시길 바란다.

나전칠기 작품을 소개하지 않고 건너뛰려 하는 가이드를 붙들고, 저것이 뭔지 아느냐 꼭 물으셨으면 좋겠다. 구구절절 슬픈 역사를 다 말해주지 않아도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여기까지 왔었음을 알려주면 좋겠다. 

국민적 사랑을 받으며 승승장구했던 루스벨트 대통령은 당시 3선, 4선에 도전하려는 야심을 부리다 저물었고, 그를 만났던 이승만 대통령 역시 장기집권 끝에 하야했다. 초심을 잃은 야욕의 결과 같다. 

공과 흠결이 이미 널리 알려진 분보다는, 잊히고 잘 알지 못하는 분들을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면 좋겠다. 그분들을 기리고, 알고, 살필 수 있는 일에 이미 시간을 너무 지체했으니까.

보훈처의 홍보 영상 첫 화면 두 초상 중 오른쪽에 계신 분. 이 분이 바로 평생을 독립운동과 교육, 목회를 하며 독립을 후원했던 헤이그 밀사의 통역관, 우리가 기억해야 할 윤병구 목사이다.
 
▲ 보훈처 홍보 영상속 윤병구 목사 사진 오른쪽이 하와이로부터 동포들의 청원서를 가지고 뉴욕까지 온 윤병구 목사이다. 윤병구 목사는 한인 최초의 하버드 입학생이다. 학비를 마련하지 못한 탓도 있었고 독립을 위한 외교전에 투업되다보니 학업은 마치지 못했다. 평생을 독립운동에 쏟았지만 늘 자금난에 시달리셨다고 한다. 뉴욕한인교회와 뉴욕한인감리교회를 담임하기도 했다. 목회자로, 교육가로, 독립운동가로 지내다 현충원에 영면해 계시다.
ⓒ 보훈처 홍보영상 켑쳐

덧붙이는 글 | 사가모어 힐은 https://www.recreation.gov/ticket/facility/251573 에서 예약하실 수 있습니다. 사가모어 힐로 들어가는 입구에 루스벨트 대통령의 묘소가 있는 영스 메모리얼 묘지(Youngs Memorial Cemetery)가 있습니다. 자료를 열람할 수 있도록 해주신 옥성득 교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개인 브런치에도 중복게재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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