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윤의 딴생각] 육수가 코인이라니

2024. 1. 27. 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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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간 남자가 우리 집에 들어와 주인 행세를 하고 있다. 이러이러한 사정으로 외국에서 오랫동안 지내던 남자친구가 저러저러한 사연으로 한국으로 돌아와 내 방에 짐을 풀어놓은 것이다. 명실상부 애인이긴 하지만 결혼은 하지 않았으니 법적으로는 엄연한 남이 아닌가. 낯선 이와의 생활은 이따금 나를 놀라게 한다. 내 몸에서 떨어지지 않았음이 분명한 털과, 운동화를 빨기라도 한 것처럼 처참하게 벌어진 칫솔과, 신체 각 부위를 활용해 “뿡! 빵! 꺽!” 비트박스를 하는 모습에는 그런대로 익숙해졌으나 씻지도 않은 얼굴을 거울에 들이밀며 자아도취에 빠지는 모습은 봐도 봐도 적응이 되지 않는다. 저 남자, 아무래도 왕자병 말기인 듯싶다.

단점밖에 없어 보이는 저이에게도 장점은 존재한다. 요리를 좋아하는 그는 한 끼도 허투루 먹으려 하지 않기에 시키지도 않은 진수성찬을 저녁마다 차려낸다. 그 덕에 일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길이면 복도에서부터 맛있는 냄새가 진동한다. 델리만주의 맛이 그 황홀한 냄새만은 못하듯 그가 만든 음식이 그 냄새만치 맛있다고는 할 수 없으나, 집에 들어가자마자 곧장 밥을 먹게 해 준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이전에는 지지고 볶고 먹고 치우는 일까지 온전히 내 몫이었으니 큰일을 던 셈이다. 나는 내일도 모레도 밥을 차리고 싶지 않다. 그저 그가 지어 주는 밥을 얻어만 먹고 싶다. 그리하여 나는 그의 요리를 향한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밥을 얻어먹기 위한 노력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대형마트를 자신의 식량 창고로 여기는 그의 장단을 맞추기 위해 피곤함을 무릅쓰고 하루에도 두 번씩 그곳을 찾는다. 사실 그와 함께 마트를 둘러보는 일이 싫지만은 않다. 한국 식재료가 귀한 외국에서 지낸 탓에, 대파 한 단을 꽃다발처럼 품에 안은 채 기뻐하기도 하고 코인 육수를 집어들며 이렇게 진귀한 물건이 세상에 다 있냐며 눈이 동그래지기도 하는데 그런 그의 모습이 꽤나 우습기 때문이다. 한번은, 내일 아침에 먹을 깻잎을 사러 마트에 가야겠다는 그를 만류하며 로켓 배송을 시키면 눈도 뜨기 전에 현관문 앞에 도착한다고 일러주었더니만 “대~한민국! 짝짝짝짝짝!” 하는 뜬금없는 반응이 돌아와 포복절도하기도 했다.

“풍족하구먼, 아주 풍족해! 이렇게 물자가 넘쳐나는 나라가 세상에 또 어딨어?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걸 몰라!” 마늘에 미나리에 삼겹살에 소주까지. 장바구니에 저녁거리를 쓸어 담으며 우리나라를 찬양하는 그에게 물었다. 이다지도 한식을 좋아하는 사람이 도대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역만리까지 날아가 오트밀만 먹고 살았느냐고 말이다. 아픈 데를 찔리기라도 한 듯 나를 흘겨보는 그를 더는 추궁하지 않았다. 꿈속에서 본 보물을 찾기 위해 먼 여정을 떠났으나 결국 그 보물을 찾은 곳은 자신의 고향이었다는 소설 ‘연금술사’의 내용처럼, 우리나라보다 더 살기 좋은 곳은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 그 고생을 자처한 모양이다.

애국자가 된 그 사람 덕에 내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게 되었다. 그러자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육수가 코인이라니. 정말 간편하잖아! 배송이 로켓이라니. 정말 빠르잖아! 어디 이뿐만이랴. 버스는 심야까지 다니고 화장실은 공중에게 열려 있으며 인터넷은 초고속이기까지 하다. 이곳이야말로 무릉도원 아닌가. 물론 이러한 편의가 제공되기 위해 많은 이의 노동력이 필요하지만, 그리고 그 많은 이에 나 역시 속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지만, 그러한 이유로 내 나라에서의 삶이 힘겹게 느껴지는 날이 있기도 하지만, 그럴 때마다 이런 식으로 달리 생각하며 현재의 삶에 만족해 보아야겠다.

오늘도 그는 식량 창고 구경을 가자며 나를 재촉한다. 잠옷 윗도리를 훌렁 벗어젖히고 외출복으로 갈아입는 움직임에 따라 뱃살이 신나게 출렁인다. 외국에서 지낼 때는 분명 복근이 보일락 말락 했었는데 한국에 온 지 얼마나 됐다고 저게 다 뭐람. 그 꼴을 하고서도 거울 앞에서 왕자 행세를 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그만 정신이 아득해졌다. 나는 정녕 저 남자와 평생을 살아야 할까? 혹시 어딘가에 더 괜찮은 남자가 있지는 않을까? 아니야, 이놈 저놈 다 만나봐도 결국 요놈이 제일 괜찮은 놈일 거야. 그래, 나에게 밥을 차려 주는 저 고마운 사람을 달리 생각해 보자. 남자친구가 왕자라니. 정말 낭만적이잖아!

이주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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