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가 삶 자체" 시청자를 웃고울린 두 배우의 고백

이준목 2024. 1. 26.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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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리뷰] tvN 예능 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럭>

[이준목 기자]

"'설렌다'는 말은 아이들이나 쓰는 것 같은데, 노인들이 좋은 작품을 만나는 설렘도 다르지 않다. 더하면 더하지 못하지 않다. '어머, 나를 왜 선택해줬지?' 하고 대본을 읽다보면 너무나 고맙고 기쁘다. 그만큼 인정을 받았다는 느낌 때문에 아직도 더 잘하고 싶고 욕심이 난다. '이 작품이 마지막일까?' 그런 기분으로 연기한다."

여전히 연기에 대한 열정에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는 배우 김영옥의 진솔한 고백이 공감을 자아냈다. 관록은 어쩌면 '위대하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 아닐까. 연기 경력만 도합 131년 차를 자랑하는 대한민국의 두 베테랑 배우 김영옥과 나문희의 가슴 찡한 인생 이야기가 시청자들을 뭉클하게 했다.

24일 방송된 tvN 예능 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럭> '파수꾼' 특집 편에서는 67년 차 배우 김영옥과 64년 차 배우 나문희가 함께 출연했다. 두 사람은 최근 또다른 원로 배우 박근형과 함께 공연한 <소풍>(2월 개봉 예정)을 통해 노년에 다시 만난 고향 동향 친구들의 애틋한 우정을 그려냈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모습으로 레드카펫에 함께 등장하며 화제가 되기도 했다.

김영옥은 "우리들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라고 소개하면서 가수 임영웅이 OST에 참여했다는 사실에 고마움을 표했다. 나문희는 "우리 나이쯤 된 할머니들의 사는 모습이 비슷하다. 그래서 정말 사실적인 연기를 할 수 있었다"고 공감했다.

친한 언니-동생 사이로 60년 넘게 우정을 지켜오고 있는 두 사람은 연륜에서 나오는 유쾌한 입담으로 웃음을 자아냈다. 나문희는 "명짧은 사람은 그렇게 오래 만날 수도 없다"고 농담을 던졌다. 김영옥은 나문희와 함께 <유퀴즈>에 출연하러 오면서 "너하고 이런 프로그램을 할 수 있어서 얼마나 좋냐라는 이야기를 했다"고 말했고 나문희는 "영옥 언니가 터를 닦아놔서 나는 앉기만 하면 된다"고 화답했다.

오늘날에는 배우로 더 알려졌지만 원래 두 사람은 당대를 주름잡던 성우 출신이었다. 김영옥은 <태권브이>의 훈이, <마징가제트>의 쇠돌이 <마린브이> 등 여러 유명 만화에서 힘찬 목소리의 남주인공 소년 역할을 도맡았던 것은 유명한 일화다. 나문희는 마릴린 먼로, 미아 패로, 소피아 로렌 등 외화에서 주인공 역할을 도맡으며 고혹적인 목소리를 선보이기도 했다.

김영옥은 "내가 변두리(?)를 할 동안, 나문희는 주인공을 많이 했다"면서도 "우리 둘이서 다 해먹었다. MBC 기둥뿌리 하나는 우리가 세운 것"이라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1960년대 MBC의 전신인 HLKV가 개국하고 'TV의 시대'가 도래했다. 김영옥과 나문희도 본격적인 연기의 길에 도전했다. 초창기 당시만 해도 전국을 다합쳐 TV가 8천여 대 밖에 보급되지 않았고, 드라마가 생방송으로 진행되던 믿거나 말거나한 이야기들이 넘쳐나던 시대였다.

배우들에 대한 처우도 열악하기 그지 없었다. 출연료로 적었고 외부에서 캐스팅한 배우들에 비해 차별대우도 받을 때였다. 그럼에도 김영옥은 "돈을 본 게 아니라 장래를 보고 연기했다"고 고백했다.

MBC에서 충분한 기회를 얻지 못한 김영옥은 KBS의 제안을 받고 이적할 때 당시 간부였던 한 국장으로부터 "이제 뭐 어느 정도 됐으니까 가서 좀 뽐내고 싶다 이거야?"라며 모욕적인 이야기를 들었던 일화를 털어놓았다. 김영옥은 침착하게 "여기서 인정을 안 해주셨지 않나. 많이 못뽑히니까 하고 싶어서 그렇다. 약속한거라 안 할 수 없다"며 차분하게 대응했다. 세월이 흘러도 당시의 이야기에 섭섭함이 많이 남았다고 회상한 김영옥은, 그래도 그때 이후로 배우들의 방송사 진출이 활발해졌다며 뿌듯해했다.

나문희의 연기 인생에 전환점이 된 작품은 1995년작 <바람은 불어도>였다. 나문희는 이북에서 피난 온 할머니 변덕네 캐릭터를 연기하며 54세의 나이에 조연으로서는 최초로 연기대상까지 수상하는 기록을 세웠다.

김영옥은 '배우 나문희'에 대해 "남이 상상도 못하는 것을 천재적으로 해내는 능력이 있다"고 극찬했다. 아카데미상에 빛나는 후배 배우 윤여정도 "문희 언니는 남이 예측하지 못하는, 아주 멋있는 연기를 해낸다"며 감탄했다고.

김영옥은 이정재의 어머니 역할로 출연한 화제작 <오징어게임>을 통해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월드스타가 됐다는 칭찬에 김영옥은 "여든 넘어서 무슨 월드스탸냐"고 민망해 하면서도 "제목이 '오징어게임'이라고 해서 무슨 이야기인가 했는데, 완성된 걸 보니 너무 이상한 영화를 그렇게 잘 만들었더라"고 말했다.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 <디어 마이 프렌즈> 등에서 호흡을 맞춘 노희경 작가와의 각별한 인연도 화제가 됐다. 나문희는 노 작가에 대해 "배우를 정말 잘하게 만든다. 노 작가는 배우가 정말 연기하기 좋게 사실적으로 글을 써준다"고 말했다. 김영옥 역시 "건드릴 수 없는 부분을 건드려주는 천재"라고 극찬했다.

노희경 작가는 나문희와 처음 만났을 때 들었던 조언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나문희는 "너무 잘난 사람들 하고만 어울리지 마. 책 많이 읽어. 재래시장에가서 채소 파는 아줌마, 할머니들 손 주름을 봐. 그게 이쁜 거야. 우리 자주 보지 말자. 그냥 열심히 살자"며 조언들을 아끼지 않았다고.

두 사람은 이구동성으로 연기가 어느덧 인생의 동반자이자 삶 그자체가 되었다고 고백했다. 김영옥은 "연기는 내가 사는 과정의 한 부분이다. 그냥 내 삶이다. 정의를 내려서 생각해본 적이 없다.떼려야 뗄 수도 없는 부분"이라고 밝혔다. 나문희 역시 "이제 점점 연기가 그냥 내 자체가 되가는 것 같다. 내가 해야할 것은 연기"라고 공감했다. 김영옥은 "고맙고 행복한 것은, 연기로 남의 인생을 너무 많이 들여다보면서 인간의 됨됨이에도 도움이 된 것 같다"고 덧붙였다.

어느덧 두 사람 모두 한 분야의 '장인'이 되었다는 찬사에 대해 나문희는 "돈(출연료)을 받고 한 일인데"라고 말했다. 김영옥은 "나는 너무 돈을 좋아한다. 돈 안 받고 하는 일도 해봤는데 열의가 안 나더라. 솔직히 <유퀴즈> 출연도 크게 돈벌이가 돼서 하는 건 아니다"라며 특유의 입담으로 폭소를 자아냈다.

두 사람은 오랜 연기 인생 동안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도 꺼냈다. 나문희는 남편을 최근 안타깝게 하늘나라로 먼저 떠나보냈다. 교사 출신이었던 남편의 잔소리가 한때는 싫었다는 나문희는 건강문제로 남편과 떨어져 지내면서 그 빈 자리를 느꼈다고 고백했다. 나문희는 "시간이 상당히 귀하다. 젊은 엄마나 노인이나 (남편과 함께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좋다는 걸 알아야할 것 같다"고 담담하게 전했다.

나문희는 세상을 떠난 남편을 회상하며 "남편은 백과사전같은 사람이었다. 조금 허전하기도 하고, 날개를 단 것 같기도 하다"라고 먹먹한 심경을 전했다. 영화 <소풍> 촬영 당시 나문희는 "촬영 끝나고 집으로 오는 날 '나가서 운동 좀 해. 그래야 나랑 내일 또 운동하지'라고 했다. 그런데 그날 넘어지셨다"라며 남편이 뇌 수술을 하게 됐다고 설명하여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또한 나문희는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김영옥이 장례식장에서 무려 6시간을 함께 있어줬다며 고마움을 전했다. 나문희는 "정말 감동이었다. 우리 나이에 어떻게 6시간을 있을 수 있나"라고 고백했고, 김영옥은 "문희를 많이 추켜세워준 훌륭하신 분"이라며 나문희의 남편을 추모했다.

노래로 위안을 받는다는 두 배우는 이날 각자의 애창곡을 부르기도 했다. 나문희는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김영옥은 '찔레꽃'을 열창했다. 가사에 인생의 연륜이 묻어나는 감성을 묻혀내는 두 배우의 따뜻한 열창은 시청자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특히 나문희가 "매별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라는 애절한 가사를 덤덤하게 소화하는 대목에서 듣고있던 김영옥이 참지 못하고 눈물을 터트리기도 했다. 나문희는 애써 감정을 추스르며 "남편이 떠나고 나서 한동안 저녁이 되면 집에 홀로있는 게 우울했다. 그런데 노래를 부르면서 위안을 얻었다. '서른 즈음에'가 나하고 가까워서 싫었는데, 노래하다 보니 이번엔 가까워서 좋더라"라고 솔직히 고백했다.

나문희는 "한때 남편이 불편했던 적도 있었는데 병원에 있을 때 진짜 사랑을 하게 됐다. '내가 남편을 정말 많이 사랑했구나'라는 걸 알았다"고 고백하며 "여보 사랑해요"라는 그리움을 담은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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