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파 속 도로 끝에서 만난 '우리들의 둥지'…이동노동자 쉼터 가보니 [데일리안이 간다18]

김하나 2024. 1. 25. 05:1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대리운전기사, 퀵서비스 배달기사 등 한파에 노출된 이동노동자들의 '생명같은 둥지'
이동노동자들 "콜 없는 중간 시간에 갈 곳 없는데…이곳에서 몸 녹이다 낮잠도 자면서 체력 회복"
"강추위 속에 매일 10시간 넘게 강남구·중구 돌아다니는데…야박하게 화장실 문 잠가 서러워"
서울시, 서초·북창·합정·상암·녹번에 '휴(休)서울노동자쉼터' 운영…"각 쉼터 하루 80명 이용"
퀵서비스 배달기사가 휴서울이동노동자 북창쉼터에서 헬멧을 벗고 있다.ⓒ데일리안 김하나 기자

"물에 풍덩 빠져 옷이 젖은 상태에서 한겨울 세찬 바람을 맞는 기분이네요"

한낮에도 영하권의 강추위가 계속되며 동장군의 기세가 연일 기승을 부리던 지난 24일, 서울 중구 북창동 소재 '휴(休)서울이동노동자 북창쉼터'에서 만난 배달노동자 김 모씨의 일성이었다. 김씨가 헬멧을 벗자 장시간 찬바람에 시달린 볼은 빨갛게 터 있었고 마스크에도 입김이 얼어붙은 성에가 새하얗게 끼어 있었다.

그는 "헬멧을 써도 틈새로 찬 바람이 들어오는데 호흡하면 입김까지 언다"며 "헬멧이 뿌옇게 안보이게 되면 본능적으로 헬멧 방풍바이저를 올려버리는데 '이렇게 추울 수가 있나'하는 생각이 든다. 그는 "오전 10시부터 시작해 밤 11시까지 일하는데 콜이 없는 중간 시간에 갈 곳이 마땅치 않다"며 "이곳은 몸을 녹이다 가고 가끔씩은 낮잠을 자면서 체력도 회복할 수 있어 '정말 둥지 같은 곳'"이라고 말했다.

◇ 쉼터 둥지 생기기 전엔 편의점·햄버거 가게 전전

이동노동자 쉼터는 대리운전기사나 퀵서비스 배달기사와 같이 업무장소가 일정하지 않고 이동하면서 업무를 하는 노동자들이 비둘기처럼 모였다 갈 수 있는 공간이다. 365일 매일 11시간 가까이 일하는 김씨는 주 5일 중 4일은 쉼터를 찾는다. 그는 "하루 종일 찬바람을 맞으며 일하다보면 몽롱해지는 때가 있는데 신호대기할 때 특히 아찔하다"며 "취업한 아들 1명, 대학생 4학년 아들 1명이 있는데 나중에 내가 나이 먹어 아이들에게 기대는 상황이 오지 않게 몸이 허락할 때 조금이라도 더 일해 노후 준비를 해야 한다. 사고라도 나면 진짜 큰일"이라고 전했다.

7년간 대리기사 일을 한 김모(55)씨는 장갑, 귀마개, 방한바지 2겹으로 무장한 채 핫팩 2개를 주머니에 가지고 다닌다. 김씨는 "새벽 5시 30분에 일을 시작해 밤 10시까지 일하는데 오늘처럼 살벌하게 추운 날은 일거리가 줄어 밖에 서 있어야 할 일이 많았다"며 "날씨가 괜찮으면 밖에서 버틸만한데 겨울은 죽음이라고 봐야 한다. 쉼터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생명같은 곳'"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동노동자들 수익이 그렇게 많지는 않은데 쉴 때마다 무언가를 사서 먹을 형편이 아니지 않나. 쉼터가 생기기 전에는 햄버거 가게나 편의점을 전전해왔다"고 말했다.

15년간 퀵서비스 배달기사로 일해온 김모(64)씨는 쉼터에 오자마자 화장실부터 찾았다. 오토바이로 도로를 달리면서 화장실을 이용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김씨는 "양말 2겹에 방한장화를 신고 내복, 조끼, 점퍼를 입어도 춥다"며 "강남구와 중구를 돌아다니는데 가끔 야박한 곳은 화장실 문을 잠가두는 곳이 있어 서럽기도 하고 불편했다"고 토로했다. 김씨는 "주말 빼고 매일 오전 9시쯤 출근해 오후 7시까지 10시간 동안 일하며 갈 데가 없었다"며 "상가 주차장에서는 오토바이를 주차하는 걸 싫어해서 오토바이 센터나 공원 벤치에서 대기하는 일이 많았는데 쉼터가 생기고 나서는 이런 걱정이 없어졌다"고 밝혔다.

퀵서비스 배달기사, 대리기사 등 이동노동자들이 휴서울이동노동자 북창쉼터에서 전신안마기를 이용하고 있다.ⓒ데일리안 김하나 기자

◇ "배달 단가 올라 눈이나 비는 우리에겐 금가루"

10년 넘게 퀵서비스 배달 일을 해온 신모(61)씨는 걸을 때 온도와 오토바이를 타고 달릴 때 온도가 다르다고 강조한다. 신씨는 "기온이 영하 10도면 오토바이 탑승시 체감온도는 영하 20도"라며 "금천구 가산동에서 박스 2개, 서류 등 물건을 픽업해 중구 도착지점에 배달하기까지 2~3시간 칼바람 맞으며 도로를 달리면 발이 얼어버린다. 장갑을 껴도 손이 부르트고 손이 쭈글쭈글해진다"라고 전했다. 이어 "하늘에서 내리는 눈이나 비는 우리한테 금가루"라며 "날씨가 안 좋으면 배달 단가라도 오르기 때문에 뭐라도 내리길 간절히 바랬는데 이렇게 오늘처럼 눈비는 안내리고 춥기만 한 날이 가장 힘든 날"이라고 토로했다.

쉼터에는 간단한 차와 전신안마의자 2개, 발 마사지기 2개, 목 마사지기 5개, 휴대전화 충전기가 각 테이블마다 6개씩 총 30여개가 꽂혀 있어 이동노동자들의 고단함을 잠시나마 달래주었다.

그러나 배달기사들의 휴식은 길지 않았다. "삐비비빅삐비비빅" 휴대전화 3~5대에서 알람이 흘러나오자 커피를 마시며 몸을 녹이고 있던 퀵서비스 배달기사 박모(57)씨는 핫팩 2개만 챙겨 곧바로 헬멧을 썼다. 수원에서 서울 중구 소재 회사까지 서류, 휴대전화, 부품을 2시간 40분 걸려 배송한 박씨는 "수원까지 너무 멀다보니 해가 지기 전에 가야 한다"며 "해가 지고나면 너무 춥다"고 말했다. 헬멧을 쓴 채로 들어온 다른 퀵서비스 배달기사도 따뜻한 물 한 잔을 마신 뒤 입에 사탕 하나만 넣고 바로 다시 오토바이에 올라탔다.

퀵서비스 배달기사가 휴서울이동노동자 북창쉼터에서 휴대전화 4대를 충전하고 있다.ⓒ데일리안 김하나 기자

서울시는 서초, 북창, 합정, 상암, 녹번 등 5곳에 거점형 쉼터인 '휴(休)서울노동자쉼터'를 운영하고 있다. 휴서울노동자 북창쉼터는 평일 오전 8시30분부터 오후 8시까지 문을 연다. 첫 방문 후 등록을 통해 QR코드 발급을 받으면 이동노동자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 쉼터는 핫팩을 하루 2개씩 무료로 제공하며, 장갑 등 방한용품도 꾸준히 제공하고 있다. 이성근 휴서울노동자북창쉼터 운영간사는 "하루 평균 80명 정도 온다"며 "지난 15일과 22일 월요일에는 90~100명 정도 왔다. 주로 오는 시간대는 오후 12시~3시"라고 전했다.

서울시는 이런 고정형 쉼터 외에도 이동식 '찾아가는 쉼터'를 운영하고 있다. 겨울에 한해 운영되는 이동식 쉼터는 소파와 테이블이 비치된 캠핑카 4대를 개조해 만들었으며 종로구 동화면세점 앞과 서초구 서울고속버스터미널 등 이동노동자들이 주로 일하는 지역 약 30여곳을 순회한다.

Copyright © 데일리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