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림택권 (8) 미군 부대서 청소일 맡으며 학업과 신앙생활도 이어가

임보혁 2024. 1. 25. 03:08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1951년 11월 중순 날이 제법 쌀쌀해지기 시작할 무렵 병원에서 퇴원했다.

그러나 일가친척 하나 없는 남한 땅에 혈혈단신 던져진 내가 갈 곳은 없었다.

'왕이신 예수님도 이런 곳에서 태어나셨다는데 맡은 일에 일단 최선을 다하자'고 마음먹었다.

당시 나는 한 미군 상병을 '미스터 홀(Hall)'이라 부르며 곧잘 따랐는데 그가 어느 날 "미국에 같이 한 번 가볼래" 하며 물었다.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통사정해 어렵게 잡은 화장실 청소일
최선 다해 일하자 사무실 청소로 진급
출석 교회에서 아이들 공부 가르치며
야간엔 고등학교 입학 학업 다시 시작
림택권 목사가 1953년 춘천제일장로교회의 ‘성경구락부’에서 교사로 활동하던 모습.


1951년 11월 중순 날이 제법 쌀쌀해지기 시작할 무렵 병원에서 퇴원했다. 그러나 일가친척 하나 없는 남한 땅에 혈혈단신 던져진 내가 갈 곳은 없었다. 서울 종로구 효자동의 병원에서 나와 하염없이 걷다 보니 광화문의 중앙청사(구 조선총독부 청사)에 이르렀다. 길 한쪽에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서 있었다. 멋도 모르고 일단 사람들 뒤에 따라 섰다. 군용 트럭 등을 수리하던 미군 부대에서 일할 사람을 뽑는 줄이었다. 서양 사람을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운이 좋게 뽑힌 난 군용 트럭을 타고 당시 부대가 주둔한 용산구 남정국민학교로 갔다. 다음 날 아침 통역관이 영양실조로 비쩍 마른 날 보더니 “넌 여기서 일 못 할 것 같다”며 돌아가라고 했다. 난 통역관의 다리를 끌어안고 “여기서 돌아가면 전 갈 데가 없어요!”라며 애원하듯 매달렸다.

내 처지가 딱했는지 그 통역관은 내게 변소(화장실)라도 청소하라며 소일거리를 줬다. 화장실에 휴지가 있는 건 그때 처음 봤다. 교회 다닐 때 예수님이 말 구유에서 태어나셨다는 성경 구절이 생각났다.

‘왕이신 예수님도 이런 곳에서 태어나셨다는데 맡은 일에 일단 최선을 다하자’고 마음먹었다. 변소 청소를 깨끗이 하고 미군이라도 만나면 잘 모르는 영어로 연신 “생큐” “생큐” 하며 살갑게 대했는데 이를 부대에서 좋게 봤는지 6개월 뒤 사무실 청소 담당으로 나름 진급도 하게 됐다.

당시 나는 한 미군 상병을 ‘미스터 홀(Hall)’이라 부르며 곧잘 따랐는데 그가 어느 날 “미국에 같이 한 번 가볼래” 하며 물었다. 하지만 당시 내 유일한 소망은 빨리 이북으로 올라가 부모님을 만나는 것이라 거절했다.

이후 난 부대를 따라 강원도 원주로 이동하게 됐다. 주일이면 나는 미군 차를 얻어 타고 춘천제일장로교회에 출석했다. 그곳에서 나보다 두 살 많은 원익환 형님을 알게 됐다. 3형제였던 그분의 가족은 날 잘 챙겨주셔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러던 중 53년 7월 무렵 드디어 전쟁이 끝났다. 정전협정이 이뤄진 것이다.

휴전 후 부대를 나온 나는 춘천제일장로교회 종탑 밑에 있는 작은 ‘하꼬방’(판잣집)에서 제2의 남한 생활을 시작했다. 사람이 거주할 만한 곳은 아니었지만 그마저 감사했다. 당시 교회에서는 야간반으로 ‘성경구락부’를 운영했다. 초등학교도 못 마친 이들을 가르치는 학교와 같은 곳이었다. 전쟁 전 중학교라도 다녔던 나는 그곳에서 선생 겸 허드렛일을 하며 지냈다.

미처 못 마친 학업도 다시 이어가게 됐다. 당시 야간제로 운영되던 춘천고등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된 것이다. 원익환 형님과 학교에서 만난 여러 친구의 도움 덕분에 신앙생활도, 학교생활도 이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는 전쟁 직후라 학교 건물이라고 해봐야 천막에 불과했다. 먹을 것도 구하기 힘들 때라 매일 학교에 나갈 여건이나 형편도 못 됐다. 계속해서 이렇게 살아야 하나 싶던 차에 다니던 교회에서 서울 남산 아래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교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다. 결국 ‘다시 서울로 올라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리=임보혁 기자 bossem@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