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달 간 어머님께 내 직업을 말하지 못했다

김지영 2024. 1. 24.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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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택시 운전사] 어머니의 노동, 나의 노동

[김지영 기자]

1931년생 아버지는 50세 되던 해 몇 년 투병 끝에 암으로 돌아가셨다. 1934년생 어머니는 당시 47살이었고 대학원생부터 초등학생까지 줄줄이 다섯 아들과 홀로 투병 생활을 견디느라 진 빚이 잔뜩이었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남긴 유언은 혼자 어렵겠지만 아들들 대학까지는 꼭 마치게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아버지의 최종학력은 고졸이었다. 그마저도 농사나 지을 일이지 당장 써먹을 데 없는 공부는 왜 하느냐며 가방을 길바닥에 패대기치고 교과서는 아궁이에 던져버리는 할아버지를 피해 혼자 시내로 나와 학비를 스스로 벌고 고학을 하면서 받은 졸업장이었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남긴 마지막 말의 대가는 어머니에게는 가혹했다. 지방 언론사 간부를 지낸 아버지 덕에 젊은 시절부터 사모님 소리를 들으며 곗방이나 다니던 어머니에게 다섯 아들을 먹이고 입히고 학교까지 보낸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과업이었다. 게다가 집마저도 아버지 투병 빚으로 사라진 후였다.

그러나 어머니의 공부에 대한 역사가 아버지와 비슷했다. 부잣집 큰 딸로 남부러움 없이 자랐지만 무학자인 외할아버지가 중학교 진학을 막아서면서 가로막힌 공부 길에 대한 원망과 상처가 평생 아물지 않은 어머니였다. 

초등학교 선생님들이 집까지 찾아와 종순이는 공부를 해야 할 아이라고 외할아버지 결심을 돌리려 했지만 자잘한 집안일을 알아서 처리하는 영민한 큰 딸을 옆에 두고 싶었던 외할아버지는 끝내 중학교 진학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자식들 공부는 자신들이 이루지 못한 꿈이었고 대학 졸업장은 그 표상이었다. 어머니는 다섯 아들 중에 애초부터 공부와는 담을 쌓은 아들 하나를 빼고는 모두 대학 졸업장을 받게 만들었다. 

1985년 대학에 입학한 이후 줄곧 학생운동만 하다 졸업도 못하고 군에 갔다 와서 졸업장 따위 의미 없다며 복학을 거부하던 내 손을 간곡하게 붙잡고 어머니가 했던 말이 아버지의 유언이었다. 나는 대학 입학 10년 만에 가을학기 졸업장을 받아 어머니에게 드렸다. 

그런 어머니를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들은 불가능한 일을 해냈다고 혀를 내두르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해낸 대부분의 시간은 여자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가혹했던 노동으로 채워졌다.

내 나이 사십 언저리가 되어서야 어머니가 내게 실토를 했는데 화장품 외판원부터 식당 일에 파출부까지 돈이 되는 일이라면 종류를 가리지 않았다. 한 번은 일당이 세다는 '노가다'를 하기 위해 무조건 건설 현장을 찾았다가 반나절 만에 소장이 주는 하루치 일당을 받고 쫓겨난 일도 있었다. 

남자도 하기 어려운 생면부지의 '노가다' 현장을 여자 몸으로 찾아가 일을 부탁하고 어설픈 삽질을 하다 쫓겨나는 어머니의 모습이 지금 내 가슴 한쪽에 아프게 새겨져 있다. 

개인택시 운전사의 노동
 
 서울역 앞 택시 승강장 모습. 자료사진.
ⓒ 연합뉴스
개인택시 면허를 내게 양도한 사람은 1951년생이었다. 면허는 1981년에 발급되었다. 그의 나이 서른한 살 때다. 당시 개인면허 자격이 지금처럼 법인택시 무사고 경력 3년 이상이었다면 20대부터 그는 택시 운전을 했다.   

서류상 흔적만으로도 그의 평생의 직업은 택시 운전이었다. 한창 푸르렀을 20대부터 시작한 법인택시 운전으로 성실하게 일한 그는 서른이라는 이른 나이에 당시 대기업 직원들보다 더 벌이가 좋다는 개인택시 운전사가 되었다. 

내게 면허를 양도했던 지난 9월 이전까지 50여 년간 그는 서울과 전국을 택시로 누비며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가족을 지키고 집을 늘렸을 것이다. 편견 어린 시선으로 택시 운전사가 어느 순간 우리 사회의 가장 밑바닥 직업이 되면서 선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순간도 그는 함께 했을 것이다. 

온갖 군상의 사람들을 태우고 보내면서 그가 겪었을 고초도 눈에 선하지만 50여 년 개인택시 운전사의 보편적 삶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면 그와 그의 가족은 이제 내게 넘겨진 번호를 달고 달린 택시 덕분에 지금 살고 있는 삶이 가능했다. 

그의 한결같은 노동이 택시 운전대를 잡은 20대부터 운전대를 놓은 70대 그날까지 그 면허를 살아 있게 만들었다. 마지막 10년 정도는 어쩌면 손주들 용돈 버는 재미로 운전했기를, 그만큼 순전했던 노동이었기를. 

어머니의 노동

다섯 아들 중에 공부를 가장 잘했던 내 큰형님은 수재면서 세상 둘도 없는 효자다. 대학원을 마치고 더 하고 싶은 공부를 포기한 채 취업을 선택한 이유도 몰락한 가정사가 한몫했다. 회사에 들어간 첫 달부터 은퇴한 지금까지 큰 형님은 어머니에게 매달 주는 생활비를 단 한 달이라도 건너뛴 적이 없다. 

지방 중소기업 최고경영자로 예순일곱에 은퇴한 형님 덕에 어머니의 말년은 부족함이 없다. 어머니는 오래전부터 노동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살 수 있었다. 하지만 70대 나이에도 건물 화장실 청소를 하며 노동을 그치지 않았던 어머니가 은근하게 형님 몰래 노인일자리 사업으로 하던 도시락 배달까지 완전히 그만둔 건 불과 4~5년 전이다. 그때 어머니는 80대 중반을 넘어가고 있었다. 

어머니는 매달 받은 20여만 원 되는 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통장에 따로 모았다가 손주들 대학 등록금으로 200만 원씩을 순서대로 내놓았다. 여든이 훌쩍 넘은 할머니의 노동으로 1년을 모은 돈이 제 첫 등록금이었다는 사실을 내 아들은 잊지 못한다. 

남편을 잃은 40대부터 자식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던 60대 후반까지 자식들을 지키기 위해 어머니가 고통스럽게 쏟았던 땀과 눈물을 나는 감히 계량 할 수 없다. 어머니의 노동으로 지금 살고 있는 내 삶이 가능했다. 

60을 목전에 둔 나는 어머니가 해낸 노동의 가치가 무엇이었는지를 어렴풋이나마 이제 겨우 알아가는 중이다. 하지만 손주들 첫 대학 등록금까지도 자신의 순전한 노동으로 기여하고 싶었던 여든다섯 어머니의 그 깊은 마음까지는 도무지 닿지 못한다. 

자식들 입히고 먹이고 키워내느라 어떤 노동도 마다하지 않았던 간절하고 혹독했던 시절을 어머니는 고통스럽게 기억하지만 원망하지 않는다. 그 기억들 대부분도 자식들을 마음껏 해주지 못한 미안함으로 가득 채우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 누리는 말년의 행복을 내게 환한 표정으로 보여주며 어머니는 마지막에 행복한 삶이 결국은 다 행복한 거라며 과거의 고통을 웃어넘긴다.

고향 작은 아파트에 혼자 살며 아침 밥을 지어 먹고 산책을 하고 맘에 맞는 이웃들과 10원짜리 화투를 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 후 다시 저녁 밥을 지어 먹고 일찍 잠에 드는 어머니는 지금 이 순간이 너무너무 감사하고 행복한 시절이라고 전화기 너머 씩씩한 목소리로 전한다. 

택시 운전사가 된 내 노동

내가 제주에 살 때 시작한 형틀 목수 일을 7년 만에 그만두고 서울로 불려 올라와 팔자에 없는 사무직으로 일하고 있을 무렵 어머니는 비로소 내게 이제 안심이라는 듯 고백했다. 어딘가를 지나다가 건설 현장에서 못 주머니를 차고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무거운 자재를 들고 건물을 오르내리는 목수들을 볼 때면 그 자리에 망연하게 서서 같은 처지의 아들 생각에 눈물까지 나더라고 했다. 

목수로 일한 7년 동안 어머니는 오래전 품에서 놓은 아들을 생각하며 말없이 속을 끓였다. 그 노동이 내 아이들을 먹이고 키워냈다는 사실을 모르는 어머니가 아니었다. 본인이 겪었던 노동과 자식이 하는 노동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어머니는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나는 회사원보다는 훨씬 자유롭고 건강한 목수 일을 즐거워하고 있었지만 그런 말도 소용없이 어머니에게는 아들의 짠한 노동만 눈에 선할 뿐이었다. 

어머니의 노동과 택시 운전사가 된 지금의 내 노동은 그게 빚어내는 결과와 무관하게 등가되지 못한다. 어머니는 그 세대로는 보기 드문 열린 생각을 가진 노인이지만 결국 자식이 하는 노동은 그 수고로움만이 오로지 자신에게 전이된다. 

그런 어머니에게 나는 택시 운전을 시작하고 두 달이 지나서야 그 사실을 말씀드렸다. 어머니는 담담한 표정으로 내 말을 받았지만 그 표정 뒤에 숨은 걱정까지 지울 수는 없었다. 나 또한 내 자식들의 노동을 그런 시선으로 바라볼 게 틀림없다는 걸 알고 있다. 부모에게 자식은 그런 존재다. 

2023년 8월 어머니는 자식들이 주는 구순 생일상을 환하게 받았다.
 
 구순 생일잔칫날. 어머니의 밝고 환한 웃음. 어머니의 말년은 행복하다. 자신의 노동으로 만든 웃음이다.
ⓒ 김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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