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 침목, 석유 찌꺼기, 돌멩이…묵묵히 쓸모 다한 것들, 하찮다고 무시 말라

권근영 2024. 1. 16.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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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가 정현 회고전,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정현 개인전 《덩어리》 전시 전경. 1905년 벨기에 영사관으로 지어진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2층에 채색한 스티로폼 조각들이 놓였다. 사진 임장활


노량진 수산시장을 자주 찾는 조각가 정현(68)은 값비싼 생선 마다하고 잡어를 즐긴다. “삼식이나 청어 같은 잡어들이 1년 중 가장 맛있는 철은 단 2주 정도, 시기만 잘 맞추면 그 어떤 고급 생선보다도 돋보인다”는 그에게 세상에 하찮은 것이란 없다.

지난해 3월엔 여수 장도에 있었다. 바닷가 레지던시에서 조용히 깎고 붙이며 조각만 한 게 아니다. 석 달 가량 머물며 주로 걸었다. 잡념을 비워내고, 몸의 감각에 집중하고, 그러다가 발에 차이는 돌멩이를 하나씩 작업실로 가져왔다.

돌멩이도 하나 하찮은 게 없었다. 섬에서 발견된 위치에 따라 파도에 심하게 마모된 놈도, 거친 질감을 그대로 유지한 놈도 있었다. 둥근 돌, 예민한 돌들은 그대로 일련번호가 매겨져 서울 남현동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2층 테이블에 놓였다. 3D 스캐닝한 모델을 크게 확대해 조각으로 만들어 미술관 앞마당에, 또 전시실에 뒀다. 전혀 새롭지 않아 보이는 것에서도 신선한 걸 찾아내는 조각가의 눈썰미다. 199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작품 30여점을 내놓은 그의 회고전 제목은 ‘덩어리(Mass)’.

한불 수교 130년을 맞은 2016년, 정현은 루이 14세가 살던 왕궁 팔레 루아얄 정원에 48개의 침목 ‘서 있는 사람’ 연작을 설치했다. 곧게 자라는 나무들 사이에 폐침목들이 숲을 이뤘다. 사진 염중호

정현은 사실주의적 인체 조각으로 1985년 중앙미술대전 특선을 차지했다. 이후 파리 유학에서 부서지고 깨졌다. 홍대 조소과와 대학원까지 나온 뒤 서른에 늦게 들어간 파리 국립고등미술학교(에콜 데 보자르)에서다. 장인적 테크닉에 그들은 그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시적 상상력이 안 보인다”는 냉정한 평가를 받았다. 눈코입이 없을수록 더 강하게 인체를 표현할 수 있고, 절제된 표현이 더 많은 생각을 담아낸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각도를 버리고 삽이나 톱, 도끼를 들었다. "주장하기보다 성찰하며, 어디서 왔나, 무엇인가 물었다"고 그는 돌아봤다.

대표작은 침목 연작 '서 있는 사람'. 오랜 세월 철로를 떠받치는 버팀목으로 쓰이다 버려진 침목을 서로 기대어 세웠는데 사람처럼 보인다. 2016년에는 파리 팔레 루아얄(Palais Royal) 왕궁 정원에 48개의 침목을 세워 장대한 인간 숲을 만들었다. 강하게 자기주장 내세운 사람들 못지않게 하찮은 일 하면서 잠잠히 견딘 사람들도 중요하다는 것을, 묵묵히 제 일을 견뎌낸 낡은 것들이 보여줬다.

정현, 〈무제〉, 2003, X-ray 필름에 콜타르, 30x14.3㎝. 석유를 정제하고 남은 찌꺼기인 콜타르가 내는 검정색이 은근해, 버려진 X선 필름 위에 그어 사람을 그렸다. 사진 임장활

값비싼 이탈리아 대리석도, 잘 자란 나무도 아니다. 폐품에서 이야기를 읽어내고 가치를 재발견한다. 폐철근도 그렇다. 거푸집에 사용된 철근을 용접해 만들어낸 인체에는 울퉁불퉁 상처처럼 용접 자국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석유를 정제하고 남은 찌꺼기인 콜타르도 그리기 도구다. 검은색이지만 화학적으로 만든 물감에서 맛볼 수 없는 자연스러운 색감이 있다고 했다. 시너에 희석한 콜타르를 나뭇가지에 쿡 찍어 페 X선 필름 위에 긋는다. 의료기 회사가 버린 필름 위에 사람의 흔적을 남기며 인간의 존엄성을 웅변한다.

석탄이나 석고에 약간의 힘을 가해 움푹 파이게 한 것에서 사연을, 시련을 읽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뒤에 걸린 작품은 녹 드로잉 연작. 사진 임장활


철판을 부러 녹슬게 해 그 녹과 녹물이 만든 흔적을 드러내기도 한다. 흠집을 가리며 매끈함을 추구하는 세상에서 길게는 5~6년씩 상처 난 환부를 노출한 철판은 그대로 드로잉 작품이 됐다. 그에게 조각은, 그림은 시간 예술이다.

이런 남다른 시각으로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2005)가 됐고, 김세중 조각상(2013)을 받았다. 목적을 다 하고 버려진 산업폐기물에 새로운 역할을 부여해 스포트라이트를 비춘 그의 요즘 목표는 "잘 헤매기".

조각을 위한 밑그림이 아니다. 정현은 "드로잉은 내 몸 어딘가에 응축된 감정을 툭 던져놓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진 서울시립미술관


전시가 열리는 서울 시립 남서울미술관은 옛 벨기에 영사관 건물이다. 대한제국기인 1905년 서울 회현동에 세운 벨기에 영사관이 도심 재개발 사업으로 1980년대 남현동으로 옮겨졌고, 이후 서울시립미술관 분관이 됐다. 1층에는 조각가 권진규(1922~73)의 기증작으로 꾸민 상설 전시 '권진규의 영원한 집'이 마련돼 있다. 그의 외조카인 허명회 고려대 통계학과 명예교수가 권진규가 마지막을 보낸 동선동 아틀리에를 안내하는 영상이 나오고 있다. 허 명예교수는 필즈상을 받은 허준이 프린스턴대 교수의 부친이다.

미술관 앞 야외 정원에 놓인 신작. 여수의 돌이 흰 알루미늄 주물 작업으로 다시 태어났다. 대한제국이 중립국화를 꾀하던 1905년 지어진 벨기에 영사관은 원래 용도를 다하지 못하고 버려졌다가 2004년부터 서울시립미술관 분관이 됐다. 사진 정현

벽돌 외관부터 내부의 샹들리에와 마룻바닥까지 고색창연하다. 오래된 건물이다 보니 전시작품의 무게에 제한이 있다. 그래서 철이나 침목이 아닌 스티로폼으로, 한껏 가벼운 신작이 나왔다. 여수에서 주워온 돌들을 3D 스캐닝해 키운 모델을 스티로폼을 깎아 만들었다. 희고 가벼운 스티로폼 조각이 '권진규의 영원한 집'과 조응한다. 3월 17일까지. 무료.

권근영 기자 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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