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적인 게 뭔데? 게임, 웹툰, K팝, 드라마에 녹아든 우리다운 것
‘조선’이 이렇게 전 세계 게임 유저들을 과몰입시킨 적 있었던가. 한·중·일의 특징을 섞어 ‘동양풍’이라는 표현으로 뭉뚱그리거나, 동서양이 모호하게 혼재된 게임 속 배경이 지배하던 시기를 넘어 이제 우리 역사의 아름다운 지명과 풍경은 정확한 고증으로 시각화된다. “우리는 한국인이니까 동양풍 자료에 따라 흉내 내기보다 제일 잘 만들 수 있는 조선을 콘텐츠로 구현했습니다.” 전 세계 150여 개국 12개 언어로 서비스되는 펄어비스 MMORPG ‘검은사막’의 개발진 주재상 게임디자인실장의 말이다. 2023년 6월 글로벌 시장에 선보인 검은사막 ‘아침의 나라’는 금수랑, 무사, 매화 등 한국 출신 캐릭터뿐 아니라 조선의 의복과 건축물, 오브젝트를 철저한 고증을 통해 구현했다. 게임 스토리 또한 우리 신화와 민담, 설화를 따라간다. 예컨대 ‘구미호전’ 퀘스트는 ‘제주 진국태 설화’를, ‘무당령전’ 퀘스트는 ‘선녀와 나무꾼’ ‘별주부전’ ‘바리데기 설화’를 차용하는 식이다. 국악 중에서도 타악기를 녹음해 디지털화한 배경음악도 듣는 순간 ‘한국적’임을 알아챌 것. 유럽 세계관에 익숙함을 느끼던 글로벌 게이머에게 낯선 흥미를 자극하고, 국내 유저에게는 익숙한 정서를 건드리며 과몰입을 최대로 끌어올리려는 선택. “중세시대 게임에 담긴 고유 문화가 있듯, ‘아침의 나라’는 초가집과 한복, 삶의 애환이 담긴 우리 이야기를 품고 있습니다. 한반도의 자연과 전통문화를 게임에 조화롭게 녹여 글로벌 유저에게 ‘조선의 미(美)’를 자연스럽게 전할 겁니다.”이를 위해 실제 건축물과 유물을 찍어 스캔하고, 문화재청과 협력했다. 게임 속의 실사 같은 금동향로, 조선백자, 고려청자와 마주하면 짜릿해진다.
미국의 인류학자 로렐 켄달은 1970년, 평화봉사단원으로 한국을 찾았다가 ‘굿’에서 문화적 의의를 발견한다. 후에 몇 년간 신딸로 살며 체험한 기록을 책 〈무당, 여성, 신령들〉로 펴내기도 했던 그가 ‘굿’이라는 가장 한국적인 제의에서 발굴한 특이사항은 ‘남존여비 사상이 강한 당시 한국에서 대감이나 장군 역할을 하는 이는 모두 여성’이라는 지점이었다. 비록 굿 자체는 집안 남성의 건강과 복을 기원하기 위해 치러졌을지언정 굿을 주도하고 신령에게 소원을 비는 것은 만신과 집안의 여성들이었다는 것. 한국 웹툰은 현 IP 사업의 ‘핵심’이다. 픽코마 · 태피툰 · 콰이칸만화 등 해외 웹툰 플랫폼을 통해 지평을 넓혀가는 가운데 한국의 많은 드라마와 영화 또한 웹툰을 원작으로 자라난다. 작가 1인의 창작의식을 토대로 피어난 무한한 상상력을 말풍선과 선으로 표현하는 웹툰은 가장 진보적인 이미지와 서사가 구현 가능한 매체이기도 하다. 다른 미디어에서 제대로 조명된 적 없는 1950년대 여성국극단의 이야기를 탄탄한 서사로 일궈내며 연극은 물론, 드라마로도 제작 중인 서이레 · 나몬 작가의 〈정년이〉가 좋은 예. 일찌감치 민속신앙과 사후세계를 만화화해 큰 사랑을 받은 주호민의 〈신과 함께〉, 의류 · 게임 · 식음료 등 다양한 분야와 협업하며 연재 9년 차에 접어든 이상규 작가의 〈호랑이형님〉 또한 전통 설화에 근간한 창작물의 힘을 보여준다. 이 흐름에서 최근 눈에 띄는 장르적 성과가 있다면 여성 서사와 동양 신앙적 요소를 한데 엮어낸 작품들의 약진일 것이다.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을 수상한 고사리박사의 〈극락왕생〉은 불교 윤회의 세계관을 토대로 한다. 지장보살의 협시 중 하나인 도명존자가 ‘당산역 귀신’이 돼버린 고등학생 박지언을 극락왕생시켜야 하는 임무를 받으며 전개되는 이야기 속 캐릭터들은 대다수가 여성이다. 불교미술을 전공한 작가의 작화는 한국의 주요 문화 중 하나인 불교 유산부터 구전 설화의 영역인 십이지신, 도깨비, 산할머니를 완벽하게 담아낸다.
한편 2022년 대통령만화상과 부천국제만화대상을 수상한 구아진 작가의 〈미래의 골동품 가게〉는 한국형 오컬트 판타지라는 장르 최전선에 서 있다. 바리만신의 제자였던 할머니와 뛰어난 재능을 가진 어머니, 그리고 주인공 도미래까지. 3대에 걸친 여성을 중심으로 한국 근현대사를 ‘악귀’와 이에 휩쓸린 인간사를 구하려는 만신의 대결로 엮어낸다. “가장 많이 인용된 책은 〈주역〉이지만 〈화엄경〉 〈금강경〉 〈대학〉 〈중용〉 등의 고전과 〈어우야담〉 〈청구야담〉 〈숙향전〉 등 우리나라 야화들을 참고했다”고 매체 인터뷰에서 답한 적 있는 구아진 작가는 인간사에 깊이 있는 통찰을 전한다. “인간이란 신기하죠. 좋은 것들은 3대가 계승되기도 어려운데, 사악하고 추잡한 것은 몇천 년 동안 끊임없이 이어지며 잊히지도 않으니 말입니다”라고 현실을 꼬집는 한편, 궁극적으로는 ‘선’에 대한 믿음 또한 잃지 않는 것도 두 작품의 공통점이다. 로렐 켄달이 또 하나 발견한 것이 있다. 여성이 주도하는 굿판에서는 출가외인으로 여겨지던 딸, 가부장제에서 소외됐던 며느리, 전처 소생의 딸도 함께하며, 만신은 동네 여성의 속앓이까지 달래준다. 2023년 한국 장르물 팬들의 큰 관심을 받았던 〈악귀〉와 〈천박사 퇴마연구소: 설경의 비밀〉, 2024년 개봉을 앞둔 풍수사와 무속인을 다룬 〈파묘〉 등 한국식 오컬트물이 대중문화의 한 장르로 자리 잡아가는 가운데 한창 연재 중인 〈극락왕생〉과 〈미래의 골동품 가게〉 또한 순조롭게 영상화가 진행 중이다. 강인한 여성들의 연대, 남성을 주변부 역할에 두고 기존 질서 대신 새로운 ‘선’과 가치를 여성 캐릭터의 입을 빌려 전하는 지금의 K웹툰은 우리가 본 적 없는 장르를 기필코 일궈낼 것이다.
이제 ‘갓’과 ‘댕기’를 모르는 한국 드라마 팬은 아마도 없지 않을까. K문화의 영향력이 넓어지며 시대극에서 역사적 고증, 그중에서도 직관적으로 눈길을 사로잡는 복색 고증은 작품 세계관을 구현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됐다. 그 선두에 2023년 공개 이래 글로벌 OTT를 휩쓴 〈연인〉이 있다. ‘병자호란’이라는 뼈아픈 역사를 배경으로 하기에 의상 팀은 단지 의복이 눈요깃거리로 소비되지 않도록 고심했다. 〈연인〉의 이진희 의상감독은 말한다. “기존 사극은 대중적 인기를 우선으로 하다 보니 주로 화려하고 자극적인 의상을 선보였습니다. 특히 사극 로맨스는 시대적 배경보다 주인공이 예쁘게 보이는 데 치중돼 있었죠. 〈연인〉은 병자호란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만들어졌기에 사실적이면서도 생동감 있게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고증에 충실해 시대 인물들의 삶을 제대로 비추는 일은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인 것 같아요.”가장 신경 쓴 부분은 색과 원단이다. “원단은 각각 지닌 물성과 그 본질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과 품위가 있는데, 한복 소재에서 느껴지는 담담하지만 힘 있고 본질에 가까운 미학은 우아함을 넘어 격이 느껴집니다.” 병자호란 한가운데서 진짜 자신을 찾아 나서는 여주인공 길채(안은진)의 옷에는 사계를 녹였다. 전쟁 이전 복색에는 꽃과 나비처럼 생명력이 넘친다. 전쟁이 시작되는 겨울은 흰색 누비 두루마기로 설원 풍경을 담아냈다. “우리 흰옷이 흙에 뒹굴어 회색으로 변해가는 변주를 통해 전쟁의 상흔이 짙어가는 걸 표현했습니다.” 특히 전 세계가 주목한 부분은 액세서리다. 여주인공이 착용한 볼끼는 실제 해외 팬으로부터 구매처를 묻는 DM을 무수히 받았다고. “전쟁을 겪으며 볼끼가 벗겨집니다. 이는 점차 드러나는 여주인공의 내적 자아를 의미하죠. 볼끼는 역사 속 인물을 드러내는 상징성 있는 소품입니다.”
사극이 K시리즈를 대표하는 장르가 된 가운데 〈혼례대첩〉이 지닌 특별한 점은 갓과 망건, 잠망과 부채 등 소품 디테일에 있다. 특히 〈혼례대첩〉이 포착한 것은 16~17세기 한복의 디테일이다. 예컨대 주인공 심정우(로운)의 연분홍색 단령은 초상화로 남겨진 실제 역사지만, 그간 사극에서 담지 않았던 색감이다. 어설프게 짜인 채 등장했던 갓은 무형문화재 박창영이 제작했고, 부채 또한 전주 장인 박계호 선자장의 작품이다. 장인의 손길이 그대로 묻어나는 소품들은 정확한 고증은 물론, 전 세계를 홀릴 만한 미학을 구현한다. 총 32부작으로 예정된 정통 사극 〈고려 거란 전쟁〉은 전투복 고증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이다. 강감찬이 쓴 고려 상원수 투구는 역사적으로 가장 비슷한 모습. 1월 공개될 사극 〈세작, 매혹된 자들〉과 과부 이야기를 다룬 〈밤에 피는 꽃〉 또한 한국적 미학을 더욱 끌어올릴 것으로 기대된다. K드라마의 인기로 그 속에서 보여지는 한국적 아름다움 또한 한층 더 무게감을 띤 상황. 이진희 감독은 이 흐름에서 반드시 짚어야 할 점을 언급했다. “한복의 원형적 아름다움으로 동시대적 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한복의 본질과 아름다움을 매 작품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알려나가려 합니다. 〈연인〉뿐 아니라 〈성균관 스캔들〉 〈구르미 그린 달빛〉 등으로 해외 시청자에게 의복에 관한 DM을 많이 받았는데, 이들이 호응하는 가장 큰 이유는 한복이 가진 심미적 색감이 동시대적 감각과 통했기 때문입니다. 요즘 세대는 다양한 국가의 전통문화를 선입견 없이 있는 그대로 보고 즐길 줄 아니 더욱 중요해진 지점이죠.”한국적 아름다움에 대한 본질적 고민은 K콘텐츠의 영향력이 커갈수록 반드시 해야 하는 과제다. 그런 고민이 바탕이 돼야 한국 콘텐츠의 힘이 더욱 명확하게 발휘될 것이다.
K팝 아티스트들이 지금 가장 강력하고 충실한 한국문화 전도사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국악과 한복의 활용은 BTS의 ‘IDOL’(2018)이나 2023 코첼라 페스티벌에 헤드라이너로 선 블랙핑크의 무대의상으로 이미 정점을 찍은 지 오래. 윷놀이나 투호 문화를 즐기는 모습, 명절마다 공개되는 한복 영상 덕에 K팝 팬들에게 ‘설날(Seollal)’과 ‘추석(Chuseok)’은 제법 익숙한 고유명사로 자리 잡았을 정도다. 10월 27일 공개된 레드벨벳의 정규 3집 티저 이미지는 공개와 동시에 화제의 중심에 섰다. 연화도, 호랑이 조각상, 분재, 자개 등 새로운 컨셉트에 대한 기대감을 증폭시켰기 때문. “K문화가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지금 시점에 의도된 디렉팅이기도 하지만, 가능하면 범인류적 가치를 콘텐츠에 담고 싶었습니다. 진흙탕에서 고고한 꽃잎을 피워내는 연은 이번 앨범에서 레드벨벳의 성장과 경험을 통해 피어난 열매였어요. ‘견자개길(見者皆吉: 연꽃을 꿈에 보면 길하다)’과 의미가 상통하기도 하고요.”정고운 크리에이티브 비주얼 리더의 말이다. 한편 2023년 10월에 발표한 〈Fact Check〉 앨범 발매를 기념해 진행된 영국 매체 〈NME〉와의 인터뷰에서 한국계 캐너디언인 NCT127의 멤버 마크는 이런 말을 남겼다. “127은 서울의 경도를 의미해요. 팀으로서 우리의 영원한 정체성이죠. 전통적 바이브를 표현하는 건 우리에게 이상하다기보다 자연스럽게 느껴져요.”이처럼 꾸준히 서울을 배경으로 한 비주얼을 선보여온 NCT127은 ‘불가사의(Mystery) in Seoul’ ‘서울의 신(Deities of Seoul)’이라는 기획하에 팀 정체성을 여느 때보다 힘 있게 밀어붙였다. 경복궁에서 진행한 타이틀곡 ‘Fact Check(불가사의; 不可思議)’ 뮤직비디오 촬영은 디자인과 실루엣 면에서 동서양의 미학을 결합하는 한국 디자이너 브랜드 송지오의 2024 S/S 컬렉션 의상을 착용해 시너지를 냈다. 이와 관련해 송지오 측은 “이번 컬렉션은 동양적인 패턴 메이킹을 기반으로 날카로운 각을 살리며 우아한 곡선을 섬세하게 만들어냈다. 한국을 대표하는 장소인 경복궁과 만나 더욱 완성도 있는 장면이 탄생했다”고 소감을 밝히기도.
가사도 중요한 요소다. “우르르쾅쾅쾅쾅 천둥 구름 타고 두둥(소리꾼)”에 이어 “여긴 Seoul 특별시(특 S-Class)”를 선창한 스트레이키즈, “좀 다른 Spicy 청양고추 Vibe(Bouncy)”를 가사에 활용한 에이티즈처럼 말이다. ‘늴리리야 옹헤야(가자)’를 부르던 원어스, 〈춘향뎐〉에서 가져온 ‘이리 와서 더, 업고 놀자(Sugar Rush Ride)’를 활용한 투모로우바이투게더는 조금 더 적극적이다. 이런 시도들이 K팝 신에서 꾸준히 이뤄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다수 K팝 아티스트는 한국 국적 혹은 한국인 부모를 갖고 있다. 그렇지 않은 경우라도 인생의 상당한 시간을 한국(서울)에서 보내며, 한글로 소통한다. 모든 예술이 자신의 정체성과 경험을 토대로 한 이야기를 전할 때 가장 큰 힘을 발휘한다는 점을 상기하면 이런 요소를 활용하는 것은 K팝 아티스트에게 주어진 무기이기도 한 것. 그럼에도 아티스트를 통해 재현한 특정 이미지에 갇히는 것을 경계하는 정고운 리더의 다음 말은 염두에 둘 만하다. “외국 동화 속에 나오는 파랑새나 해적, 인어 등이 어린 시절의 제게 꿈같은 요소였던 것처럼 〈해님달님〉 같은 전래 동화가 해외 팬에게는 새로울 거예요. 외국 동화에 늑대가 종종 등장한다면 우리 영토에는 호랑이가 살았죠. 범세계적으로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같은데 등장하는 ‘종’만 다를 뿐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파생한 문화를 나누며 함께 재미있게 살았으면 해요.”K팝이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것은 결국 다양성과 여러 문화에 대한 존중임을 상기시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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