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초청한 신필 화원 김명국

김삼웅 2024. 1. 16.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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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의 인물 100선 61] 김명국

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자말>

[김삼웅 기자]

신라의 골품제로부터 발원하는 신분제는 조선시대에 절정을 이루었다. 양반과 상민 사이에 중민(中人) 계급이 있었다. 반상의 중간이라 해서 중인이란 명칭이 있었다는 설과 이들의 집단거주지가 한양의 중간지점이어서라는 설이 있다.

이들은 주로 역관·의관·산관·율관·음양관·화원 등 기능과 기술 분야를 담당했다. 양반들은 생산노동은 상민이나 노비들에게 맡기고 복잡하고 기예가 필요한, 그리고 민심을 잃기 쉬운 대민업무는 이들 중인에게 맡겼다.

지금이야 통역사·의원·율사·화가 등이 존경받는 직업이지만 1세기 전만 해도 아무리 영특해도 과거의 대과에는 응시할 수 없었고 행정관직에 들어갈 수 없었다. 반쪽 양반의 핏줄인 서자(서얼)과는 또 다른 부류였다.

중인에 대해 살펴 본 것은 중인출신 화가 김명국(金明國)을 소개하기 위해서이다. 조선 중기인 1600년경 태어난 것뿐, 집안과 생몰연대가 알려진 바 없다. 뒷날 하도 유명하고 유별나서 본관은 안산, 자는 천여(天汝), 호가 연담(蓮潭)이라고 문인들의 문집에서 전한다.

그의 탁월한 그림 솜씨와 오연한 행동거지는 조선의 화단을 물론, 일본에서 더욱 많이 알려지고, 일본 조정에서 통신사의 수행원으로 그를 포함시켜 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조선 후기의 문신 남유용(南有容, 1698~1773)의 문집 <뇌연집>에 <김명국전>이 실렸다. 문장·시·서예에 뛰어난 양반 선비가 중인의 전기를 지은 것도 특이하다. 여기 실린 김명국의 모습이다.

김명국은 화가다. 그의 그림은 옛것을 배우지 않고 오로지 마음에서 얻은 것이었다. 인조 때 조정에서 머리 손질에 필요한 빗·빗손·빗치개 같은 것을 넣어 두는 화장구인 빗접을 노란 비단으로 만들어 주면서 명국에게 거기에 그림을 그리라고 했다. 그가 열흘 뒤에 바쳤는데, 그림이 없었다. 인조는 노해 그를 처벌하려 했다. 그러자 명국이 말했다.

"정말 그렸사옵니다. 나중에 자연히 아시게 될 것이옵니다."

어느 날 공주가 새벽에 머리를 빗는데 이 두 마리가 빗 끝에 매달려 있었다. 손톱으로 눌러도 죽지 않아 자세히 보니 그림이었다.

이 일로 명국의 그림이 사방에 알려졌다.

그의 성품은 매이지 않아 자유로웠고 해학을 잘했다. 술을 좋아해서 한 번에 여러 말을 마셨다. 그에게 그림을 구하려는 이들은 반드시 술을 많이 가져갔고, 그는 흠뻑 마신 뒤에야 그림을 그렸다. 많이 취하지 않으면 그리지 않았으므로, 그의 그림에는 기이한 기풍이 많았다.(최기숙, <문 밖을 나서니 갈 곳이 없구나>)

호방하고 술을 좋아해서 이에 따른 일화도 적지 않게 전한다.

하루는 영남에 사는 스님이 비단을 잔뜩 가지고 와서 '지옥도'를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여러날 후 다시 찾았으나 아직 손도 대지 않은 채였다. 비단을 돌려달라 재촉하자 술을 마시고 붓을 잡았다. 승려들의 잘못을 적나라하게 그려 놓았다.

스님이 깜짝 놀라 말했다.

"아이고 참! 당신은 어쩌려고 내 큰일을 그르쳐 놓으셨소?"

김명국이 두 발을 앞으로 쑥 내뻗고 웃으며 말했다.

"스님들이 일생 동안 저지른 악업이 바로 세상을 미혹시키고 백성을 속이는 짓이니, 지옥에 들어갈 자는 스님들이 아니고 누구겠소?"

스님이 화가 나 말했다.

"그림은 태워 버리고 비단이나 돌려주시오."

김명국이 웃으며 말했다.

"스님이 이 그림을 완성시키고 싶다면, 가서 술이나 더 사 가지고 오시오. 내가 스님을 위해 그림을 고쳐 주겠소."

스님이 술을 사 왔더니 김명국이 술잔에 가득 담아 마시고는 기분 좋게 취해서 붓을 쥐고는 머리 깎은 자에게는 머리털을 그려 주고, 수염을 깎은 자에게는 수염을 그려 주었다. 또 잿빛 옷을 입은 자와 장삼을 입은 자에게는 채색을 하였다.(허경진, <조선의 르네상스인 중인>)

그는 두 차례 통신사의 화원으로 일본을 다녀왔다. 두 번째는 일본의 요청으로 수행원이 되었다. 200여 년 동안 조선통신사가 10여 차례 다녀왔지만 일본이 원했던 인사는 그가 처음이다. 일본인들은 김명국의 그림에 반하여 그의 숙소에 장사진을 쳤다. 그림은 고가에 팔렸다. 현재 남아 있는 작품은 한국과 일본에 30여 점,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된 <달마도>는 일본에서 구입해온 것이다.

두 번째 방일 때의 일화이다.

한 왜인이 김명국의 그림을 얻기 위해 많은 돈을 들여 잘 지은 세 칸 건물의 사방 벽을 주옥으로 장식하고 좋은 비단으로 바르고 천금을 사례비로 준비하고 그를 맞아 벽화를 그려 달라고 청탁하였다.

그러자 김명국은 술부터 먼저 찾았다. 실컷 마신 다음 취기에 의지하여 비로소 붓을 찾으니, 왜인은 그림 그릴 때 쓰는 금가루 즙을 한 사발 내놓았다. 김명국은 그것을 받자 들이마셔 한 입 가득히 품고서 벽의 네 모퉁이에 뿜어서 다 비워 버렸다. 왜인은 깜짝 놀라 화가 나서 칼을 뽑아 죽일 것처럼 하였다. 그러자 김명국은 크게 웃으면서 붓을 잡고 벽에 뿌려진 금물가루로 그려가니 혹은 산수가 되고 혹은 인물이 되며, 깊고 얕음과 짙고 옅음의 구별이 형세와 손놀림에 따라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 더욱 뛰어나고 기발하였으며, 붓놀림의 힘차고 살아 움직이는 것이 잠시도 머뭇거림 없이 순식간에 완성되었다.

작업이 끝나고 나니 아까 뿜어 놓았던 금물가루의 흔적이 한 점도 남지 않고, 울울한 가운데 생동하는 모습이 마치 신묘한 힘의 도움으로 된 것 같았다. 김명국 평생의 득의작이었다. 왜인은 놀랍고 기뻐서 머리를 조아리며 다만 몇 번이고 감사해할 따름이었다.(남태웅, <청죽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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