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콘크리트 정글' 사이에서 길어낸 한국적 정서
[김형순 기자]
갤러리현대에서 임충섭(1941~)의 '획(劃)' 개인전이 1월 21일까지 열린다. 2017년 '단색적 사고'와 2021년 '드로잉-사잇'에 이어 이번이 세 번째다. 임충섭은 이번 주제인 '획'에 대해 "오랜 전통의 서예에서 보여주는 '획'은 우리의 중요한 미학적 근원이다"라고 설명한다.
▲ 임충섭 전시가 열리는 '갤러리현대' 입구 |
ⓒ 김형순 |
에드워드 호퍼의 50년 후배인 임충섭은 뉴욕에 거주하면서 한국적 관점으로 미국을 그렸다. 그는 미국에 오래 살수록 어린 시절에 대한 그리움에 몸서리쳤다. 고향 진천의 냇가에서 물장구치며 놀던 행복과 9살에 어머니를 장티푸스로 여의고, 그 풀리지 않는 마음의 한과 응어리, 그런 타는 갈증을 평생 해소하지 못했지만, 오히려 그게 예술의 우물에 몰입하게 했단다.
그는 뉴욕 거주 6년인 된 1969년, 드디어 길이 열렸다. 800명 응모에 14명 선발하는 뉴욕 '퀸즈뮤지엄'에 초대받았다. 당시 '아트포럼(Artforum)' 편집장인 미술평론가 '로버트 핀커스 위튼(R. Pincus-Witten)'가 그를 발탁했다. 그의 단칸방까지 찾아와 임충섭을 격려했단다.
한 달 치 생활비만 가지고 뉴욕으로 간 그는 제일 싼 월세 50달러 셋집에 살았다. 집 위로 지하철이 지나가는 곳이었다. 뉴욕 지하철을 타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 굉음이 귀청이 찢어질 듯하다. 뉴욕 대학을 다니면서 한국에서 배운 낡은 프레임은 벗어나 시원했단다.
그에게 예술은 마음을 파는 것이기에 성취가 아니고 '도취'라고 말한다. 순간마다 도취하라는 '보들레르' 시처럼 가난한 화가지만 절대적 초월을 맛보면서 시간의 승자로 살았다. 모 일간지 인터뷰에서 그는 혼자 외로울 때 가까이 사는 백남준으로부터 위로와 용기를 많이 얻었고 또 백 선생이 자신의 작품도 사준 적이 있다고 자랑도 했다.
▲ 임충섭 I '수직선 상의 동양 문자' Acrylic, oil, crayon, rice paper, U.V.L.S. gel on shaped canvas, 264×156.5×6cm 2000 |
ⓒ 김형순 |
▲ 임충섭 I '하얀 한글' Acrylic, oil, crayon, rice paper, U.V.L.S. gel on shaped canvas, 243×159×6cm 2020 |
ⓒ 김형순 |
임충섭은 동양의 사유는 모든 것의 근원을 찾는 데서 시작한다면서 '음수사원(飮水思原)'이라는 말을 꺼낸다. 즉 물이 어디서 나오는지 그 시원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처럼 뉴욕의 한복판에서 반세기를 머물렀지만 그의 사유의 진원지는 여전히 동양이었다.
그는 우선 동서양 차이를 은은한 '달'과 눈부신 '해'로 비유했다. 또 동양문화를 시냇물이 평평하게 흐르는 정감 어린 '수평 문화'로 봤고, 서양문화를 고층건물이 높이 솟은 즐비해 삭막해 보이는 '콘크리트 정글'의 '수직 문화'로 규정했다. 그는 동서의 대척점에서 문명과 자연을 잇는 사잇길 역할을 하려 했다. 다른 말로 하면 일종의 '브릿지(Bridge) 아트'다.
위 두 작품의 캔버스 모양이 특별하다. 네모반듯한 캔버스를 늘리고 깎아, 둥그런 타원 형태로 만들고 그 위에 그린 것이다. 먼저 '수직선상의 동양 문자'를 보면 서구의 수직성을 상징하는 선 사이로 한자가 빼곡히 적혀 있어 동서의 미학이 어우러지는 화면을 연출한다.
또한, 흰 여백들 사이로 한글 자모의 형태로 그려진 '하얀 한글'은 동양의 여백과 한글 자모가 가진 조형성을 잡아냈다. 세종대왕이 창안한 세계문화유산으로서 한글의 위대함을 보여주려 한 것 같다. 이 작품은 중국의 한자와 한글의 초성이 만든 작품을 나란히 배치해, 상이한 문자 문명의 차이점을 관객에게 구별해서 보게 해준다.
▲ 임충섭 I '사잇' - 잿빛 도심 속 아기 새들의 첫 비행' 회색은 뉴욕의 콘크리트 정글을 은유한다. 그런 도시의 바다에서 아기 새가 비행을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모습이다. 많은 상상을 하게 한다. Acrylic, oil, pencil crayon, U.V.L.S. gel on shaped canvas, 223.5×173.5×6cm 2014 |
ⓒ 김형순 |
그의 색채도 또한 특이하다. 은은하게 스며드는 단색조의 무채색 계열이다. 기름기 빠진 느끼하지 않은 무채색, 향토색, 흙내 나는 한국 목재 농기구에서 보는 그런 색이다.
▲ 임충섭 I '화석-풍경@다이얼로그(시리즈)' Mixed media found object box etc 26×46.5×17cm 2011 |
ⓒ 김형순 |
전시장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오브제가 보인다. 그가 20년간 뉴욕 허드슨강 주변을 산책하면서 우연히 '발견한 물건(found object)'들, 예컨대 나뭇가지와 깃털, 젓가락, 공업용 못과 지퍼, 방충망, 휴지, 녹슨 고리, 운동화 끈, 전구 등 폐기물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이는 일종의 '레디메이드' 아트로 스스로 만드는 게 아니라 이미 만들어진 걸 작품화한 것이다.
▲ 임충섭 I '흙' Mixed media with soil, 가변설치 2000-2023 |
ⓒ 김형순 |
'흙' 하면 우리는 흔히 향토적인 것만 연상하기 쉬운데, 그는 흙을 첨단 현대 문명을 은유한다. 도시 문명이라는 것이 콘크리트와 플라스틱이 대세지만 역시 모든 생명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흙을 나란히 놓아, 자연과 문명 사이의 조화를 추구했다.
임충섭은 흙을 어린 시절에 경험과 강과 산 그리고 어머니와 연결된다. 어린 나이에 그가 어머니와 사별을 통해 깨달은, 생명의 유한성과 자연의 순환, 인간한계에 대한 통찰을 담았다. 서구적 건축미에 동양적 곡선미를 뒤섞다 가며 흙으로 작업을 하다 보니 유적지같다.
▲ 임충섭 I '무제-날개', Acrylic, oil, U.V.L.S. gel on canvas, 59×71.5×3.8cm 1985 |
ⓒ 김형순 |
▲ 임충섭 I '길쌈' Mixed Media with Korean cotton. Dimensions variable 1999-2023 |
ⓒ 김형순 |
2층에는 길쌈을 연상시키는 1985년 유화작품 '무제(날개)'가 있고, 또 2023년 작 움직이는 키네틱 아트인 '길쌈'도 보인다. 길쌈(직조)하면 단원의 <풍속도첩>에 등장하지 않나. 왠지 한국적 정서를 물씬 풍긴다. 그는 이런 개념을 현대화해 옷감을 짜는 직조 행위가 단절과 연결을 통해 결국 소통의 기능을 잇는다고 보는 것이다.
▲ 작품 해설 중인, 올해 83세가 되는 임충섭 작가 |
ⓒ 이영란 |
위 베틀을 보니, '뒤샹'의 자전거 '바퀴'(1913)가 연상된다. 베틀이 인간에게 '의류의 혁명'을 줬다면, 바퀴는 '교통의 혁명'을 가져왔다. 베틀과 바퀴는 근대 산업혁명의 근간이 아닌가.
'임충섭' 작가 전시장 다른 작품들 |
ⓒ 김형순 |
덧붙이는 글 | 임충섭 I '길쌈' Mixed Media with Korean cotton. Dimensions variable 1999-2023 / 이 작품은 아래 유튜브 주소 https://www.youtube.com/watch?v=DnSM9iJ_BIg 들어가면 움직이는 영상으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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