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숙인의 조선가족실록] “아들 일은 해소 못 할 고통” 89세에 손자뻘 왕 앞에서 눈물

2024. 1. 12.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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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 정승과 그의 자녀들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신의 아들이 장물죄를 범해 관직을 삭탈 당한 지 11년이 되었습니다. 신의 나이 지금 89세이니 죽음이 조석(朝夕)에 달려 있습니다. 늙은 소가 새끼를 핥아 주는 심정이고 보니 아들의 일은 목숨이 다할 때까지 해소되지 못할 고통이옵니다. 부자의 정은 천성인지라 감히 천위(天威)를 범하고 죽음을 무릅쓰며 아룁니다.”(『문종실록』 1년 2월 2일)

아들의 죄를 구원해달라는 구순의 늙은 아버지는 20년을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자리에서 세종의 시대를 빛낸 명재상 황희(1363~1452)다. 차남 황보신(1401~1456)이 부정한 재물을 수수한 죄로 관직에서 파면되고 전답을 몰수당한 것이다. 조선에서는 뇌물을 먹은 관리를 다루는 법이 엄격했는데, 장리(贓吏-탐관오리라고 하는 경제사범)로 판결 나면 일신(一身)의 추락은 물론 그 자손들의 과거 응시가 금지되었다. 영의정 아들이라고 봐 주기는커녕 더 혹독하게 다루었다.

「 차남 황보신 부정축재 11년 추방
손자에 화 미칠까 아들 용서 빌어

자녀에겐 관대, 3남1녀 모두 말썽
“영상 자리 안 맞아” 사퇴 간청도

세종과 품격의 정치 보여줬으나
집안 다스리기는 실패 평가 나와

세종의 정치 파트너 27년 보좌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황희 정승 초상. 현재 여러 점이 전하는 황희 정승 초상은 한결같이 두 손을 마주 잡아 공수 자세를 취하는 반신상이다. 조선 후기 모사본으로 추정된다. 가로·세로 57x88.5㎝. [사진 국립중앙박물관·문화재청, 이숙인]

아들 황보신이 부정 축재로 서인(庶人)이 된 지 10년, 아비의 멍에를 지고 살아갈 손자들의 현실이 가시화되었다. 청백리의 상징 황희는 세상의 영예를 내려놓고 손자뻘 왕 문종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자식의 죄를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는 황희, 그의 마지막 호소와 의미를 알고자 한다면 개인 황희가 걸어온 길을 따라가 보는 것이 한 방법이겠다.

명군(名君) 세종의 정치 파트너로 백성들에게는 ‘진재상(眞宰相)’으로 불리던 황희는 사실 남들 은퇴할 나이 60에 왕 세종을 처음 만난다. 그는 87세의 영의정으로 은퇴하기까지 무려 27년을 정승의 자리에서 때론 보조하고 때론 주도하면서 세종의 정치를 빛낸 독보적인 존재였다. 잘못된 왕의 판단을 견제하는 황희의 방식은 이러했다. “하고자 하는 바를 하는 것은 임금의 큰 법이오나 할 수 없는 것을 그치게 하는 것은 미신(微臣)의 지극한 충정(衷情)입니다.”(세종 14년) 어떤 권력이 정승 황희를 거부할 수 있겠는가.

어느 날 세종은 부왕 태종의 실록을 열람하고 싶었다. 실록은 누구든 임의로 볼 수 없다는 원칙론이 통용되던 시대였다. 세종은 중국의 역사 사례를 들먹이면서 『태종실록』을 보게 해달라고 대신들을 졸랐다. 이에 황희는 임금이 그 부왕의 실록을 본다면 생존해 있는 실록 편수자의 마음이 편치 못할뿐더러 사관들이 제대로 기록을 하지 못하는 문제가 생긴다며 왕을 설득한다(세종 20년). 마침내 세종은 실록 보기를 그만둔다. 황희의 많고 많은 업적 가운데 역사 기록의 공정성을 환기한 이 사례는 두고두고 음미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명재상 황희의 면모는 세종과 만나기 이전부터 두드러졌다.

은거했던 고려 관료, 태조가 발탁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금승리에 있는 황희 정승묘. 묘 둘레 34m, 높이가 4m로 봉분의 규모가 크다. 1976년 경기도 기념물 제34호로 지정됐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문화재청, 이숙인]

고려의 관료 황희는 나라가 망하자 은거에 든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인데, 태조 이성계에게 발탁되면서 조정으로 돌아온다. 특히 태종은 황희를 늘 곁에 두고 싶어 했다. 왕에게 황희는 ‘공신은 아니지만 공신 대접’을 해야 할 신하이자 ‘나와 그대 둘만 아는 사실’을 공유하는 사람이었다. 태종이 본 황희는 “임금이 말을 내면 뭐든 추켜세우는” 신하들과는 달랐다. 아부하지 않으면서 교만하지 않은 황희의 매력을 왕이 제대로 본 것이다.

그런데 장남 양녕을 폐세자하고 충녕(세종)을 후계자로 세우는 과정에서 의견이 갈린 태종과 황희는 결별할 수밖에 없었다. 양녕을 옹호하고 충녕을 반대한 황희는 관직과 과전(科田)을 몰수당하고 유배형에 처해진다. 남원에서 유배를 산 지 4년, 죽음이 임박한 태종은 세종을 편안하고 충성스럽게 보좌할 재목으로 황희를 발탁한다. 자신을 반대한 신하와 그 왕이 의기투합하여 벌인 세종 시대의 국정 대화는 최상의 품격을 보여주었다. 한번은 남원부사가 대신들에게 뇌물을 뿌렸는데, 황희만이 사실을 말하고 죄를 청하자 세종은 ‘거짓말하지 않는’ 황희에게 더 큰 신뢰를 가진다. 세종은 79세의 영의정 황희에게 초하루와 16일에만 조회에 참석하도록 했고(세종 23년), 83세의 영의정 황희에게 서무(庶務)를 번거롭게 맡기지 말도록 했다(세종 27년).

살인죄 저지른 사위는 영영 퇴출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사목리에 있는 반구정. 87세의 나이로 관직에서 물러난 황희 정승이 갈매기를 벗 삼아 여생을 보낸 곳이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문화재청, 이숙인]

이러한 아버지의 격조에 어울리지 않게 황 정승의 3남 1녀는 크고 작은 시빗거리를 달고 다녔다. 차남 황보신이 늙은 아버지를 머리 조아리게 한 것 외에도 장남과 삼남 그리고 사위까지 나서서 정승 아버지를 부끄럽게 했다. 먼저 장남 황치신(1397~1484)은 유감동(兪甘同)과 성 추문을 일으킨 사대부 중의 한 사람이었다(세종 9년). 관리로서 창기와 유숙한 죄로 파직된 황치신은 공식석상에서 사라졌다가 6년이 지나서야 정3품 동부승지로 복귀한다(세종 15년). 그의 행보가 유별난 것인지 정승의 아들이라 감시의 눈이 많아서인지 황희의 장남 황치신은 이후에도 잦은 구설에 휘말렸다.

황희 정승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영당.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황희 선생 유적지 안에 있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문화재청, 이숙인]

하나뿐인 사위 서달(徐達)은 인사를 하지 않는다며 아전을 때려 숨지게 한 사건으로 의금부에 투옥되었다(세종 9년). 서달의 사건 무마에 관여한 대신들이 거론되면서 좌의정 황희와 우의정 맹사성, 형조판서 서선 등도 의금부에 투옥된다. 사헌부가 “죄가 있는 사람에게 죄를 면하게 하고, 죄가 없는 사람에게 죄에 빠지도록 한” 대신들을 고발했기 때문이다. 사위 서달을 비호한 사실로 사헌부와 사간원의 끈질긴 탄핵을 받고 파면된 황희는 한 달 만에 복직되지만 유배형을 받은 서달은 기록에서 영영 사라졌다. 좌의정의 사위에다 형조판서의 아들인 서달이 겨우 목숨만 건진 죄인으로 살아가는 것을 보면 ‘공정과 상식’은 왕정 사회에서도 중요한 어젠다였다.

왕 앞에 선 아버지는 한없이 초라해졌다. 아버지인 자신을 자책하면서 “신이 유약(柔弱)하기 짝이 없어서 자식 가르치기를 엄하게 하지 못했다”고 한다. 부끄러운 정(情)을 이길 수 없어 간절히 파직을 청한다고 한다. “자식이 어질지 못한 것은 그 아비의 교양이 어떠하냐에 달려 있다고 여겨집니다. 신은 본래 용렬하여 아들을 잘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신의 아들 황보신의 죄악이 가득 찼고 그 형 황치신과 그 아우 황수신도 유사(有司)의 의논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황보신이 범한 죄는 신의 집 명예뿐 아니라 사풍(士風)을 욕되게 한 것이니 무슨 마음으로 만인이 바라보는 영상의 지위에 뻔뻔스럽게 있겠습니까.” 제발 자신을 사라지게 해달라는 이 애원은 세종 22년, 황희의 나이 78세 때의 일이다.

간절한 아버지, 자손들 결국 거듭나

황희 정승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경북 상주의 옥동서원. 1789년 옥동서원으로 사액을 받았고,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훼손되지 않고 원형 보존됐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문화재청, 이숙인]

조선의 정치문화를 이끈 황희가 은퇴하고 5개월 후에 국왕 세종의 시대도 막을 내린다(1450년 2월 17일). 황희에 대한 한 줄 평가는 이러하다. “성품이 지나치게 관대하여 제가(齊家)에 단점이 있었지만 오래도록 군주의 고굉(股宏-다리와 팔)이요, 참으로 국가의 주석(柱石)이었다.”(문종 2년 2월 12일)

세종의 아들 문종은 신하들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황보신의 직첩을 돌려주며 노(老) 대신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었다. 사실 황희는 아들이 장죄(贓罪)를 범하기 7년 전에 사람을 쓰는 도리에 그 세계(世系)를 엮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조부나 아버지가 장죄를 범했다고 그 자손을 죽을 때까지 서용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세종 14년)라고 한 것인데, 그의 평소 지론이 손자들에게 적용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왕의 허락에도 불구하고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도 황보신의 사위와 아들은 장리의 자손으로 호명되며 벼슬의 변방에서 서성이는 신세가 되었다. 김국광(金國光)은 장리(贓吏) 황보신의 사위라는 이유로 장령(掌令) 임명에 시비가 붙었고(세조 4년), 황종형과 황경형은 황보신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수령과 감찰 제수가 거부되었다(세조 8년, 성종 3년). 여담이지만 김국광과 혼인한 황보신의 딸은 조선 후기 사상계를 주도한 예학자 김장생(1548~1631)의 5대 조모이다.

아버지 황희의 간절한 바람과 참회의 눈물은 자손들을 거듭나게 한 힘이 되었다. 능력과 인품에서 아버지 황희에 비할 바 아니지만 장남 황치신은 호조 판서를, 삼남 황수신은 영의정을 지냈다. 모든 것을 몰수당한 둘째 황보신은 처가의 터전 상주로 이주하여 그곳에 정착하는데, 증손대에서 인물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그들은 ‘사당에 방촌(황희) 어른의 영정을 모셔놓고, 그 훌륭한 행실과 가르침’(『입재집』)을 기억하며 힘을 기른 것이다.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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