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신문기자, 민족대표33인 오세창

김삼웅 2024. 1. 11. 0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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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의 인물 100선 58] 오세창

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자말>

[김삼웅 기자]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기자는 누구였을까.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최초의 신문을 뒤져야 한다. <한성순보(漢城旬報)>는 글자 그대로 열흘에 한 번씩 나왔다. 우리나라 근대적인 신문의 효시라 할 것이다. 고종의 명에 따라 1883년 통리아문 박문국에서 발행하였다.

<한성순보>는 처음에는 양지(洋紙) 책자형으로 내다가 5호부터 한지 양절(兩折)인쇄체제로 전환했다. 규격은 가로 24㎝ 세로 17㎝ 정도이며 창간호는 18면, 2호는 20면, 3, 4호는 16면을 발행하다가 5호부터 24면을 발행하였다. 활자는 4호 활자를 사용하였으며, 편집 체제는 1단계로 대체로 1행 47자 1면 23행(1,2호는 17행)으로 간행했다.(김민환, <한국언론사>)

한성판윤에 임명된 박영효가 고종에게 건의하여 발행권을 얻었으나, 곧 그의 자리가 바뀌면서 지연되다가 통리아문에 박문국이 설치되면서 김만식을 책임자로 김인식·여규형·고영철·장박·오용묵 등이 참여하였다.

<한성순보>는 1884년 갑신정변으로 막을 내리고, 1886년 10월 간부진이 바뀌고 제호도 <한성주보>로 변경하여 재창간되었다. 오세창은 박문국주사로 근무하면서 <한성순보>의 기자가 되고, <한성주보>로 이어졌다. 신문의 체제는 전과 다르지 않았다. 순간에서 주간으로 발행일자만 바뀌었다. 오세창(吳世昌,1864~1953)은 조선말기 중국어 역관이며 서화가·수집가이던 오경석의 장남으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해주, 자는 중명(仲銘), 호는 위창(葦滄) 20살에 역관이 되었다가 1886년 박문국주사로 일하던 중 <한성순보> 기자를 겸하였다. 그는 대단히 우수한 두뇌의 소유자이지만 아버지가 중인출신이어서 역관이 되었던 것이다.

<한성순보>는 정부가 내는 신문이었으나 광고를 유치하고자 하였다. 이 신문은 창간호에 <본국광고>란을 만들어 "농공상과 기타의 영업을 하는 사람으로서 자기의 일을 널리 알리고자 하면 박문국에 와서 자문하기 바란다. 그러면 상세히 기재하여 본보를 구독하는 내외의 사상(士商)에게 알리고자 한다고 밝혔다.(김민환, 앞의 책)

<한성주보>는 1888년 7월 14일 정부의 박문국 폐쇄로 문을 닫고 말았다. 따라서 오세창의 기자 활동도 종료되었다.

그는 1894년 군국기무처 총재비서관이 되었고, 이어 농상공부참서관, 통신원 국장 등을 역임했다. 1897년 일본 문부성의 초청으로 동경외국어학교에서 조선어교사로 1년간 체류했다.

1902년 개화당사건으로 일본에 망명하던 중 손병희의 권유로 천도교에 입교했다. 1906년 귀국 후 <만세보>, <대한민보> 사장을 역임했고, 3.1혁명 때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서명했다가 3년간 옥고를 치렀다.

오세창은 일제 법정에서 재판을 받을 때 일인 판사가 "피고는 앞으로도 독립운동을 할 작정인가?"라는 질문에 "그렇다. 지금은 체포되어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있으나 후일 시기가 오면 또 다시 할 작정이다."라고 답변하며, 독립의지를 분명히 밝혔다.(김삼웅, <33인의 약속>) 질문과 답변은 이어진다.

문 피고는 일본글을 아는가?
답 말은 충분하지 못하나 문장은 읽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대판 <매일신문> 대판 <조일신문>을 정독하고 있다.
문 손병희 집에서 모인 후 조선에서도 민족자결의 취지에 따라 독립선언을 발표하고 그 운동을 하기로 했다는 것은 어떤 이유인가?
답 그것은 시세 풍조를 생각할 때 전 세계적으로 민족이라는 것이 소동하고 있는데 홀로 조선만 가만히 있느니보다, 실행은 안 된다 하더라도 역사에 남기기 위해 조선인도 민족 자결 의사가 있음을 발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문 피고는 이 시기에 조선 독립을 바라고 있는가?
답 그렇다. 될 수 있으면 독립하고자 생각하고 있다.
문 피고는 총독정치에 반대하는 것인가?
답 조선인에게 자유를 줄 것과 평등한 대우를 희망하고 있다.
문 어떤 점이 불평이고 부자연스러운가?
답 교육 정도가 낮고 출판, 언론, 집회 등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김삼웅, 앞의 책)

그는 출감 뒤 근대적 미술가 단체의 효시인 서화협회가 결성될 때 13인의 발기인으로 참가했으며, 민족서화계의 정신적 지도자로 활약했다. 해방 후 <서울신문> 명예사장·민주의원·대한민국촉성국민회장·전국애국단체총연합회장 등을 역임했다.

한국전쟁 중 피난지 대구에서 눈을 감아, 사회장이 거행되었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주로 문필 생활로 은거하며 아버지 오경석과 자신이 수집한 풍부한 문헌과 고서화를 토대로 <근역서화징>을 편술했다. 이 책은 삼국시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한국서화가에 관한 기록을 총 정리한 사전이다.

그밖에도 조선왕조 초기부터 근대에 걸친 서화가·문인학자들의 날인된 인장자료를 모아 <근역인수>를 집성했으며, 수집한 소품고서화들을 화첩으로 묶은 <근역서휘>, <근역화휘> 등 한국서화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남겼다.

글씨는 전서와 예서를 즐겨 썼다. 특히 전서와 예서를 혼합한 글씨나 와당, 고전, 갑골문 형태의 구성적 작품도 시도하여 독특한 경지를 이루었다.

또한 고서화의 감식과 전각에서도 당대의 일인자였다. 합천 해인사의 '자통홍제존자사명대사비'의 두전을 비롯한 기념비 글씨도 전국 곳곳에 많이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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