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여자 vs 나쁜 여자? 당당한 여성 카밀 리의 '탈' 한국기

2024. 1. 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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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여자는 천국에 가지만 나쁜 여자는 어디로든 간다. 스물일곱 살에 훌쩍 한국을 떠나, 뉴욕 놀(Knoll) 플래그십 스토어 부점장으로 일 매출 1억을 올리는 카밀 리의 ‘탈’한국기.

Q : 한국을 떠날 결심은 어떻게 했나?

A : 떠나야겠다고 생각한 순간은 늘 있었다. 사람들이 ‘김치녀’ 같은 말을 거리낌 없이 사용할 때, 여성으로서 성희롱과 성폭력에 노출됐을 때, 스스로를 성소수자로 정체화했을 때, 그리고 세월호 참사가 벌어졌을 때. 한국이 국가로서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야 한다는 계약을 파기하는 것을 뼈아프게 목도했고, 그렇다면 나 개인이 계약을 맺고 싶은 사회를 스스로 찾고 싶었다.

Q : 스물일곱에 한국을 떠났다. 다소 늦은 나이에 이민을 간 셈인데, 두렵진 않았나?

A : 이민이라고 표현해줘서 고맙다. 난 이민이 신분 상태로 정의 내려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민법은 세상에서 가장 근거가 연약한 법이다. 그 법에서 외국인은 이민 비자, 비이민 비자 혹은 서류 미비 이민자(불법체류자)로 나누어지는데 사람들은 영주권자 이상만 ‘이민자’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다시 돌아오지 않기로 결심한 모든 사람을 이민자라 생각하고, 우리가 어떤 신분 상태더라도 스스로 그런 자각이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학생 비자로 한국을 떠났지만 돌아올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떠난 순간부터 이민자였던 셈이다. 모르는 세상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은 있었지만, 나는 그 막연함과 비교도 안 될 만큼 구체적으로 신이 났다. 그래서 두려움에 지지 않았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나가보자 생각했다. 어차피 여기서도 죽이 될 텐데. 당시엔 나도 스물일곱이 늦은 나이라고 여겼지만, 한국 밖에서 나이에 대한 개념이 달라지고 나서는 나는 오늘도 어리다고 생각하기에 ‘늦은 나이’라는 표현이 이젠 생경하다. 다른 여자들도 그렇게 생각했으면 좋겠다. 우리 나이에 늦은 건 없다고.

Q : 한국을 뜨기 위해 어떤 준비를 했나?

A : 돌아오지 않기 위한 계획이 A부터 H까지는 있었다. ‘안되면 베를린이나 라이프치히로 가야지, 2년짜리 영국 워킹 홀리데이를 신청해야지, 그래도 안 되면 한국에 잠깐 들어와 국비 지원 교육으로 기술을 배워서 캐나다로 가야지’ 하는 여러 계획이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는 것만이 목표였으니까. 내가 신청 가능한 비자 그리고 나를 받아줄 수 있는 나라와 자격 요건은 물론 물가랑 생활비 같은 현실적인 조건도 따져보고. 미국에 오기 전 베를린과 라이프치히에도 들렀다. 다음에 ‘도망갈' 곳은 어떤가 싶어서. 그때의 목적은 정말 ‘돌아오지 말아야지'였기 때문에, 이민 초기엔 나를 ‘한국에서 온 망명인’정도로 소개하는 일도 왕왕 있었다.

Q : 뉴욕에 가기로 한 건 어떤 이유인가?

A : 큰 도시가 주는 익명성과 기회. 한국 밖에서도 어차피 2등, 3등 신분의 외국인일 거라면 내가 특정되지 않는(인종이나 언어, 크게는 성별로) 익명으로 존재할 수 있는 곳이 좋았고, 뉴욕은 특히 학교라는 비교적 안전한 울타리에서 무언가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은 곳이다.

Q : 정착하기 위해 필요했던 것 3가지는?

A : 나 잘났다는 마음, 스몰 토크, 가장 중요한 뉴욕에 대한 사랑과 낭만. 이것 없이 이 거칠고 더럽게 비싼 도시에서 살아남긴 쉽지 않다.

Q : ‘탈조선’을 주제로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다. 지금 한국 여성들에게 ‘탈조선’이란 어떤 의미라고 생각했나?

A : ‘탈조선 강의'는 뉴욕에 있는 대표적인 미국 아트 스쿨인 ‘스쿨 오브 비주얼 아츠(sva)’에 재학 중일 때 했던 강의 형식 퍼포먼스로, 한국 여성들의 디아스포라 현상에 대해 미국인 청자들에겐 K-문화 이면의 현재 한국의 모습을 드러내고, 한국어 화자들에겐 오늘날의 탈사회가 자연스러운 것임을 보여주며 연대감을 나누기 위해 진행했다. 특히 내 또래 한국인들은 누구든 환경과 기회가 된다면 한 번이라도 한국 밖으로 나와서 우리 사회와 분리된 ‘나'를 봤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가부장제, 호모소셜 밖의 젠더와 정체성으로 살기 팍팍하지? 이 사회에는 우리가 싸워도 고치기 어려운 고질적인 문제들이 있고 나도 그 분투를 잘 아니까, 어차피 우리가 한국에서 2등 시민으로 살아야 한다면 대놓고 2등 시민인 외국에서도 해봅시다!’라는 마음이었다. 그래서 퍼포먼스 시작도 가부장제, 상명하복 문화, 임금차별 같은 맥락에서 ‘탈조선’의 당위성을 먼저 이야기했다. “지금 힘든 게 네 탓이 아니고 구조 탓인데, 너도 한번 나와서 볼래?” 하는. ‘탈-’이란 말 그대로 내가 자란 사회의 익숙한 구습과 제약을 떠나 다른 사회 안에서 다른 가능성을 가진 ‘나'라는 개인을 바로 볼 수 있는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경험은 내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는 결정을 했다고 실패하는 게 아니다. 그렇게 해본 사람들이 한국에서도 커뮤니티를 성장시킬 것이라고 믿으니까. 2030의 탈사회는 저출생과 더불어 인구 절벽을 만드는 현상이고,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7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하다.

Q : 하이엔드 리빙 편집숍에서 커리어를 쌓았다. 원래 가구를 좋아했나?

A : 한국에선 국문학과 신문방송학을 전공하고 뉴욕으로 건너와 ‘스쿨 오브 비주얼 아츠’에서 순수 미술 학위를 받았다. 개념 미술에 가까운 작업 위주로 활동하다 졸업 후엔 운 좋게 개념 미술과 미니멀리즘으로 유명한 디아 재단의 디아 비컨 미술관에서 일했다. 그때 갤러리들을 관리하며 여백이 주는 공간의 아름다움에 대해 난생처음 깨달았고, 그 여백을 내 공간에도 옮기고 싶어 하다 일상의 군더더기를 걷어내주는 좋은 가구에 대해 자연스럽게 고민하게 됐다. 처음엔 위장 취업으로 직원 할인만 적당히 챙기고 다시 미술 관련 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웃음)

Q : 일 매출 1억원을 올릴 정도로 유능한 부점장이다. 당신만의 판매 노하우는?

A : 이 질문지를 받고 난 뒤에 기록을 경신했다. 1억7천.(웃음) 나는 손님들에게 솔직하다. 내가 만져보고 써보고 아니다 싶으면 돈을 짊어지고 와도 안 파는 곤조다. 럭셔리 마켓 손님들은 대부분 자기 소비에 확신을 가지고 싶어 한다. 특히 내가 파는 제품들은 기대 수명이 수십 년씩 되니 지불하는 돈만큼의 효용이 있는지 솔직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고, 종종 의심도 받는다. 그 일말의 의심을 제거해주는 역할이 내 일이고, 매출은 자연히 따라온다. “You know what you are doing”이라는 칭찬을 받은 적이 있는데, 나는 그 말만큼 듣기 좋은 칭찬을 아직 찾지 못했다.

Q : 이 일의 기쁨과 슬픔이 있다면?

A : 기쁨은 세기가 넘는 시간을 사랑받아온 아름다운 것들을 매일 매만지고 사는 것. 수십 년 대물리며 가구를 사랑해온 사람들의 귀여운 역사를 듣는 것. 이 순간을 기다려온 손님의 설레는 주문을 받는 것. 슬픔은 이 모든 것이 1세계의 돈놀이에 불과하다는 현실 자각이 드는 순간.

Q : 가장 좋아하는 브랜드의 제품은 무엇인가? 그 이유는?

A : 현재 몸담고 있는 놀의 장인 정신이나 아트 하우스적 성격도 좋지만, 하나만 고르라면 카시나에서 만드는 LC4. 간단한 구조체인데도 공학적으로도 미적으로도 군더더기 없이 편하고 아름다운 작품이라 좋아한다. 천재 건축가이자 디자이너였으나 르코르뷔지에의 그늘에 가려졌던 샤를로트 페리앙의 대표작으로 최근에서야 그녀에게 크레디트를 돌려줘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어, 루이 비통 재단에서 샤를로트 페리앙의 대규모 전시를 선보이기도 했다. 남성의 역사에 가려졌던 여성 디자이너의 작품이라는 점도 이 제품의 매력적인 부분이다. LC4를 숭배할 공간이 여의치 않아 감히 아직 모시지 못했는데, 언젠가 텅 빈 거실 큰 창 앞에 이 의자만 하나 놓는 것이 꿈이다.

Q : 앞으로의 커리어는 어떻게 쌓아갈 생각인가?

A : 미국에서 아시아 여성은 매일매일 유리천장과 대나무 천장을 확인한다. 그 천장을 부수고 싶은 사람도 있고, 그 천장 아래서 지평을 넓히는 사람도 있고, 어떤 것도 오답은 아니다. 어디서든 우리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다른 여자들에게는 의욕과 연대가 돼준다고 생각한다. 나는 천장에 닿아 내 한계를 봤다고 생각하던 순간마다 운 좋게 다른 길이 열렸다. 초보 이민자로서 처음 일하는 분야에서 인정받아 관리자 직급이 될 줄 몰랐고, 그렇게 잔뼈가 굵어 브랜드 전체의 플래그십 매니저가 될 줄도 몰랐다. ‘여기까지면 됐지' 하는 마음이 들던 차에 지금은 상위 직급의 공고가 나와 지원 후 논의 중이다. 천장이 또 조금 높아진 기분인데,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살게 되지 않을까? ‘여기까지면 됐지' 하면서도 매너리즘에 빠지진 않고, 기회가 있으면 ‘손해볼 거 없으니까' 하는 마음으로 찔러보는.

Q : 〈코스모폴리탄〉 초대 편집장 헬렌 걸리 브라운은 “착한 여자는 천국에 가지만 나쁜 여자는 어디든지 간다”라고 말했다. 이제부터는 어디로 가고 싶나? 당신의 야심은?

A : 나쁘다는 말은 누구 기준이지? 가부장제? 남자들? 나쁜 여자는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고, 읽는 여자라고 생각한다. 세상이 무서워하다 못해 나쁘다고 낙인찍어버리는 그런 똑똑한 여자들. 나는 이 말이 너무 좋다. 이 말 덕분에 어디든지 당연히 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용기가 생기고, 어디든지 가 있는 나 같은 여자들을 보면서 다른 여자들도 안심하고 또 어디든지 가 있겠지? 한 이민자 선배님이 “이민 두 번은 이사랑 똑같다”라고 말해준 적이 있다. 이 말엔 곱씹을수록 마음을 근질거리게 하는 힘이 있다. 어느 순간, ‘여기서 재미 다 보면 나도 다른 곳으로 또 가고 말지?’ 하는 마음으로 살게 됐다. 그치.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이 어렵나? ‘Jay Z’ 노래 가사처럼 ‘since I made it here I can make it anywhere’ 하는 스포일된 뉴요커의 낭만 같은 건지도 모르지만. 다음에 갈 곳은 사랑이었으면 좋겠다.

Q : 한국을 떠나려 하는 여성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은?

A : 미안하지 않은 상황에서 미안하단 말을 먼저 하지 말 것, 약자의 무해한 미소를 삼갈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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