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한센병 환자 치료 병원, 애양원

오문수 2024. 1. 2.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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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원 초기 한센병 환자 전담 치료병원에서 재활병원, 인공관절센터로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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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문수 기자]

 현대식 병원으로 탈바꿈한 애양원 모습
ⓒ 오문수
전남 여수시 율촌면 구암길 319에는 여수애양병원(이하 애양원)이 있다. 여수공항 인근에 자리한 애양원은 쾌적하고 산뜻한 외모에 아름드리 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져 병원 역사를 모르는 분은 아름다운 별장일 것이라고 착각할지도 모른다.

아일랜드 출신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는 "모든 아름다운 것에는 슬픔이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 여수와 순천의 중간에 위치해 시가지와 떨어진 바닷가에 서 있는 애양원의 역사를 알고 나면 아름답기보다는 슬픈 마음이 밀려와 마음이 숙연해진다.

여수애양병원의 시초는 1909년 '선한 사마리아인의 정신'으로 설립됐다. 의료선교차 목포에 근무하던 '윌리 해밀턴 포사이트(Willey Hmilton Forsythe)'는 1909년 4월 동료 의사 '오웬'이 병에 걸려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광주로 향했다.

포사이트가 나주 남평 부근을 지나던 중 길가에 쓰러져 있는 여자 걸인을 목격하게 되었다. 길을 지나던 행인들은 이 여인에게 돌을 던지고 침을 뱉고 있었다. 한국인들이 천형으로 여겨 천대하던 한센병 환자였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인들은 한센병이 전염될 것이라고 믿어 환자를 가까이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친자식이 병에 걸리면 그를 집안에서 내쫒는 사람도 있었고 절친한 친구라도 '하늘에서 내린 형벌'을 받았다는 생각에 등 돌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포사이트는 한센병 환자를 내버려둘 수 없어 바쁜 발걸음을 멈추고 환자를 부축해 자신의 말에 태웠다. 그가 광주에 도착해보니 오웬은 이미 운명한 상태였지만 데리고 온 환자를 정성껏 간호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광주진료소에 입원해 있던 다른 환자들의 반발이 컸기 때문에 그 환자를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포사이트와 윌슨 선교사는 협의를 거쳐 근처의 오래된 벽돌가마를 입원실로 지정하고 한센병 환자를 옮겨 치료했다.
 
 한센병환자를 처음 수용하여 치료한 벽돌가마와 윌슨 선교사 모습으로 애양원의 전신이랄 수 있다.
ⓒ 오문수
 
죽음을 앞둔 한센병 환자를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고 데려와 치료한 포사이트의 '사랑의 실천'은 한국 최초의 한센병원 역사가 됐다. 목포 선교부의 일을 맡아보고 있던 포사이트는 이후 임지인 목포로 돌아가고 한센병 환자를 돌보는 일은 '윌슨'이 도맡게 되었다.

윌슨이 한센병 환자를 돌보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의지할 곳 없던 각지의 한센병 환자들이 광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광주선교부를 찾아오는 한센병 환자가 늘어나자 윌슨은 영국에 본부를 둔 '인도·동양구라협회'의 재정지원을 받고 조선총독부로부터 인가를 받아 1912년 11월 광주 봉선리에 건물을 완성한 후 정식으로 나병원을 발족시켰다.

개원초 45명이던 입원환자가 1920년대 초에는 600명에 이르렀고 병원의 최대 수용인원은 350명 인데도 환자들이 끊임없이 몰려들었다. 병원에 입원하지 못한 환자들은 병원 주변에 움막을 짓고 기거하기까지 했다.

광주나병원은 그때까지 어떠한 희망도 가지지 못하고 차별에 시달리던 한센병 환자에게는 희망의 빛이었다. 당시 병원 치료는 대풍자나무의 종자를 압착하여 얻은 '대풍자유'를 피하에 주사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이렇다 할 치료 방법이 없던 터였기에 대풍자유를 이용한 치료는 관심을 끌게 되었고 완치되는 경우도 생겨남에 따라 환자 가운데는 한센병이 더 이상 '천형'이 아니라는 희망이 싹트기 시작했다.

병원장 윌슨은 한센병에 대한 한국인의 그릇된 인식을 바로잡기 위해 신문지상을 통해 "한센병은 치료 방법이 없는 것이 아니라 건강에 유의하고 병원 치료를 적절하게 받으면 호전될 수 있다"는 점을 홍보했다.

수용할 수 있는 환자가 한정되어 있음에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한센병 환자를 수용하고 치료한다는 소식에 찾아오는 환자가 급격히 늘어나 광주나병원 주위에는 노숙환자들로 넘쳐나기에 이르렀다.

'한센병은 치료할 수 있는 병'이라는 홍보가 각종 매체를 통해 활발하게 이뤄졌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여전히 편견을 갖고 환자들을 멀리하였고 병원 인근 주민들은 병원의 이전을 촉구하며 당국에 진정하고 나섰다.

할 수 없어 병원 부지를 물색 중이던 1926년, 웅거 목사와 윌슨 원장이 발견한 곳이 현재의 위치다. 광주 양림리에서 나병원을 경영하던 윌슨 원장은 여수군 율촌면의 신풍반도의 땅 14만평을 매수하여 병원 이전을 시작하였다.

당시 선교회는 이전에 필요한 금액이 9만 700달러에 달할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이전 금액을 충당하기 위해서 먼저 순천선교부가 적립해 둔 자금 가운데 1만 8200달러를 사용하고 광주나병원 부지 매도금 1만 달러에 총독부로부터 1만 2500달러를 지원받는 한편 기부자 '비더울프'의 지원금 5만 달러로 이전을 시작했다.

광주 한센병 환자들의 눈물의 도보 이주

윌슨 원장은 병원 밖에 몰려든 환자들이 눈보라 속에서 밤을 지새우며 "제발 나를 죽여주시오. 내 삶의 비극을 그만 끝내주시오"라고 외쳐대는 소리를 견뎌내기 힘들어 병원 시설을 좀 더 확충하여 이들 모두에게 무료 진료의 혜택을 주고 싶었다.

재정, 수용인원, 부지 문제가 일단락됨에 따라 1926년 말부터 이듬해까지 환자들의 대대적 이동이 시작되었다. 여수로 근거지를 옮기기 전까지 13년간 1149명의 환자를 돌보았지만 이전할 무렵에는 681명 정도가 남아있었다.

오랜 투병 생활로 몸이 쇠약해진 사람들을 데리고 이동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한센병 환자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극심한 편이어서 환자들을 열차편으로 옮기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개원초기 애양원 뒷편에 있던 남자병사 모습으로 현재는 음성환자들의 정착촌인 도성마을로 변했다.
ⓒ 오문수
  
 애양원 뒷편에는 음성환자 정착촌인 도성마을이 있다. 자활을 위해 축산업을 하며 잘살고 있다고 한다. 도성마을에는 현재 음성환자 54명이 살고 있다고 한다.
ⓒ 오문수
 
때문에 몸이 불편한 노인부터 어린아이까지 모두 도보로 이동해야 했다. 선교회는 환자들을 몇 개의 그룹으로 나누어 장기간에 걸쳐 차례대로 옮기도록 했다. 나병에 대한 사회적 편견 때문에 행인의 눈에 띄기라도 하면 돌팔매질을 당해야 했으므로 낮에는 산속에서 잠을 자고 밤이 된 후 길을 재촉하는 눈물겨운 여정이었다.

환자들은 두려움에 떨며 햇빛도 들지 않는 차가운 숲속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이들 가운데는 오랫동안 병을 앓은 탓에 손발이 뭉그러진 사람도 많았고, 기나긴 도보 이동으로 몸이 혀약해진 사람도 많았다.

글을 쓰면서 환자들이 이동했을 거리를 다음 지도를 통해 검색해보니 110.5㎞다. 그룹을 이뤄 이동했던 모든 환자가 여수애양병원까지 옮기는 데 3주 걸렸다고 한다. 2009년에 발행한 <애양병원 100년사>에는 환자들의 이주를 '눈물의 이주'라고 적었다.
 
 최초의 수술실 모습으로 윌슨 원장이 수술을 집도하고 있다. 당시 애양원 수술실에는 조명이 들어오지 않아 천장에 난 창문으로 햇빛이 들어올 때만 수술했다고 한다.
ⓒ 오문수
 
 최초의 여수애양병원을 보전해 애양원역사박물관으로 바꿨다.
ⓒ 오문수
 
1928년 이주를 완료한 병원에는 수용자들의 손으로 세운 41동의 병사와 축사, 곳간, 본부, 교회, 우물, 돌다리, 신작로 등의 각종 시설물이 들어섰다. 환자들이 머무는 병사는 신풍반도의 중간에 나지막하게 솟은 언덕을 기준으로 남자촌과 여자촌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개원초 기부자의 이름을 따서 '비더울프 나병원'으로 이름을 바꿨다가 1935년 '사랑으로 양육한다'라는 뜻의 '애양원'으로 부르게 됐다.

남자환자 거주지는 1976년 정착촌인 도성마을의 건립으로 사라졌지만 여자촌의 경우 아직도 건물이 몇 채 남아있어 당시 병사의 모습을 알 수 있다. 초창기에 만들어진 병원은 석재로 만들어진 2층 건물이었는데 현재는 애양원 역사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두 번이나 군대에 가서 발병했던 김모씨

애양원과 역사박물관을 돌아보던 중 전동휠체어를 타고 병원 주위를 돌아다니던 김아무개(88)씨를 만나 애양원에 입원하게 된 계기와 파란만장했던 인생사를 들어보았다.

목포가 고향인 그는 해병대에 근무 중이던 1964년에 발병해 애양원에 입원했다. "김포해병대에 근무할 당시 5.16혁명이 일어나 전차장으로 탱크를 몰고 서울에 출동하기까지 했다"는 그가 이틀 후인 12월 30일 "할 말이 더 있으니 만나자"라는 전화를 받고 다시 한번 애양원을 찾아가 만나 자세한 전말을 들었다.

"목포에서 젊었을 적에 좀 놀았죠. 목포 주먹인 용팔이도 잘 알고 가수 남진이는 후배입니다. 나는 부모와 형님을 위해서 군대를 두 번이나 갔어요. 육군 제대를 했는데 인쇄소 운영하던 형님이 군대 기피 중 잡혀가길래 형님 대신에 형님 이름으로 해병대에 자원 입대했어요"

"형님 대신에 군대를 갔다는 건 이해가 되는데 부모를 위해서 해병대를 자원입대했다는 얘기가 이해되지 않는다"고 되묻자 그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답변을 했다.

"나는 특별한 직업이 없는데 형님은 인쇄소를 운영하고 있으니 부모님을 먹여 살릴 수가 있잖아요. 육군 경험도 있어 훈련소에서 잘하니까 중대 향도를 맡기더라고요. 학과 출장보고가 5분 늦었다는 이유로 선임하사가 몽둥이로 때렸는데 30대까지 세다가 기절했어요. 해병대라 추운 물속에 들어가고 몽둥이로 매 맞느라 발병한 것 같아요.

애양원에 입원 중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교통사고를 당해 두다리가 부러졌지만 '토플 원장'의 수술로 2년 후에는 축구도 했어요. 애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내옷을 빨아주던 여자와 결혼해 산 햇수가 57년째입니다. 결혼하기 전에 정관수술을 했기 때문에 1살짜리 아이를 입양해 의경이 됐는데 1998년에 순직해 두 부부만 살고 있어요."
 
 해병대 근무시절인 1964년에 발병해 60년째 애양원과 음성환자 정착촌인 도성마을에 살고있는 김모씨가 파란만장했던 그의 인생사를 들려줬다. 이름은 밝히지 말라며 뒷모습만 촬영하라고 했다.
ⓒ 오문수
   
일찍 죽은 아들 얘기를 하던 중 눈물을 보인 그가 살아온 이야기를 했다. 젊었을 적에 애양원 뒤편 음성 나환자 정착촌인 도성마을에서 돼지와 닭 소도 키운 그는 국가에서 나오는 보상비로 사는데 큰 걱정이 없단다.
"나같은 사람도 예수를 믿게 해줘서 감사하고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에 감사해요. 90이 다된 나이인데 내가 언제갈지는 몰라요. 하느님이 오라면 가야지요. 오늘 하루를 위해서 살지 내일을 위해서 사는 건 아니에요."
   
 애양원역사박물관에 있는 관절수술도구들. 개원초기 한센병 전담병원이었지만 한센병환자가 줄어들자 지체장애자들을 위한 재활병원에서 인공관절센터로 자리잡았다.
ⓒ 오문수
  
 손발이 없는 한센병환자들과 지체부자유 환자들이 사용했던 의족과 의수 모습
ⓒ 오문수
     
115년 역사를 자랑하는 애양원은 현재 멋진 현대식 병원으로 탈바꿈했다. 초기에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병원으로 설립되었지만 소아마비 후유증환자 등 지체 장애자환자들을 위한 재활병원으로 전환하였고 현재는 인공관절 센터로 자리잡았다.

애양원 뒤편에 있는 나환자 정착촌인 도성마을에는 현재 54명이 살고 있다고 한다. 애양원 역사의 절반인 60년 동안 애양원과 정착촌에서 살고 계시는 김모씨의 안녕을 빌며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덧붙이는 글 | 여수넷통뉴스에도 송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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