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황거에 갈 계획이라면 읽어보세요 [가자, 서쪽으로]
[김찬호 기자]
서울과 도쿄는 많은 점에서 비슷하지만, 또 다른 점도 많습니다. 넓은 강을 낀 내륙의 서울과, 바다를 마주한 도쿄의 도시 구조는 특히 차이가 크죠.
서울에는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가 각각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대통령실은 지난 정부까지 종로에, 국회는 여의도에, 대법원은 강남에 있죠. 서울의 3대 도심권에 각각 하나씩 위치한 형태입니다. 행정 각부는 아예 서울을 떠나 세종시로 이전한 경우도 많고요.
▲ 황거에서 본 국회의사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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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어떨까요? 도심 중앙에 이렇게까지 '비워진' 땅이라면, 용산의 옛 미군기지 자리를 제외하면 잘 떠오르지는 않습니다. 마침 황거와 용산 미군기지는 각각 면적이 2.3㎢와 2.5㎢로 서로 비슷하기도 합니다. 미군기지가 이전하기 전에는, 황거와 미군기지의 비슷한 입지가 두 나라의 현실을 보여준다는 농담도 종종 했었습니다.
▲ 황거에서 본 도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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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막부는 1868년 메이지 신정부에 항복했습니다. 마지막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항복 이후 에도성을 떠났죠. 그는 시즈오카의 슨푸성으로 가 근신했습니다.
도쿄로 수도를 옮긴 메이지 덴노는 에도성에 자리를 잡았고, 이곳에 황궁을 건설했습니다. 새롭게 만들어진 황궁에서 그 다음 덴노들이 태어나고 즉위했죠. 다이쇼, 쇼와, 아키히토와 지금의 나루히토 덴노까지 모두 그랬습니다.
물론 많이들 아시다시피, 이 궁궐에 살고 있는 덴노는 일본 정치의 중심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그건 사실 현대에 들어와서의 일만은 아니죠. 덴노는 오랜 기간 일본 사회의 상징이었지만, 정치적 실권을 행사한 역사는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 황거의 차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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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기 말엽부터는 무가 정권이 수립되었죠. 덴노의 권위는 점점 막부를 이끄는 쇼군에게 밀려나기 시작합니다. 특히 에도 시대에 넘어오면 덴노의 힘은 더 약해집니다. 일반 민중 가운데에는 아예 덴노의 존재를 모르는 이들도 있었다고 하니까요.
▲ 에도 성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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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야마 마사오는 이런 점을 들어 일본 사회가 '무책임이 체계화된' 사회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권위와 권력은 있지만, 결코 책임지지 않는 이들이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죠.
현대 일본에서도 덴노의 위치는 논쟁적입니다. 일본의 극우파는 덴노의 권위와 상징성을 여전히 중시합니다. 하지만 정작 덴노는 그런 목소리와 거리를 두며, 평화와 국제질서의 유지를 지지해 왔습니다. 아베 정부 시절에는 아키히토 덴노의 발언이 정부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경우도 수 차례 있었습니다.
야스쿠니 신사는 원래 덴노에 충성한 충신들을 위해 만든 사당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곳에 2차대전 전범들이 합사되자 쇼와 덴노는 상당한 불쾌감을 드러냈다고 하죠. 결국 이후 쇼와 덴노와 아키히토 덴노는 모두 한 번도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지 않았습니다.
2013년에는 야마모토 타로 참의원이 한 행사에서 아키히토 덴노에게 직접 편지를 건네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을 두고 야마모토 의원은 좌우 양측의 비판을 모두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비판의 결은 많이 달랐죠.
▲ 황거 안의 공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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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노는 일본국의 상징이며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 그 지위는 주권을 가진 일본 국민의 총의에 기반한다."
분명 덴노의 지위를 일본국의 상징으로, 주권자를 국민으로 규정하는 문구입니다. 하지만 그 구조가 어렵게 꼬여 있죠. 내용이 모호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뚜렷하게 말하는 한국의 헌법과는 분명 다릅니다.
▲ 황거와 도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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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덴노는 일본 정부의 통제를 받는 존재입니다. 다른 나라의 왕실과 달리, 일본 황실은 가진 재산이 없습니다. 매년 의회에 예산을 요청해 승인받아 써야 하는 입장이죠. 하지만 지금까지 일본 의회는 덴노가 요청한 예산을 삭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합니다. 그것 역시 일본국에서 덴노가 가진 위치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일 것입니다.
어떤 이유에서건, 도쿄 한복판에 위치한 녹지는 도쿄의 시민들에게도 좋은 안식처가 되어주고 있습니다. 오후 아이들과 나들이를 나온 부모도, 황거 주변을 뛰며 운동하는 시민들도, 저처럼 여행을 온 관광객들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지금 일본국에서 덴노가 가진 역할도, 이 녹지가 도쿄에서 갖는 의미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넓은 공원이지만, 때로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의미를 갖는 공간이 있는 법이니까요.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CHwiderstand.com)>에 동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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