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 유묵을 바라보다 [김선걸 칼럼]

김선걸 기자(sungirl@mk.co.kr) 2023. 12. 25.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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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걸 주간국장
‘용호지웅세 기작인묘지태(龍虎之雄勢 豈作蚓猫之態)’.

용과 호랑이의 웅장한 기세를 어찌 지렁이와 고양이 모습과 비교하겠는가.

안중근 의사의 유묵이 110년 만에 일본에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31년의 짧은 삶. 그래서 더 강렬했던 청춘. 그 끝을 20여일 앞두고 쓴 안 의사의 글이다.

놀랐다. 느껴지는 거침없는 힘과 기개.

본인의 의거를 ‘용과 호랑이’에 비유한 내용도 내용이지만, 사형 직전인데도 두려움과 군더더기는 한 치도 찾아볼 수 없는 필치였다.

고국으로 돌아온 안중근 의사의 붓글씨.
1910년 안중근은 일본 제국주의의 폭거에 맞섰다. 하얼빈에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고 ‘꼬레아 우라(대한국 만세)’를 외쳤다.

안 의사의 대의는 이토를 처단한 후 수감 기간에 더욱 빛난다. 그는 의거가 자객으로서가 아니라 ‘대한의군 참모중장’ 자격으로 행한 일이라 선언했다. 일본과 전투 중이니 적장인 이토를 쏜 것은 정당한 일이다. 실제 그의 다른 유묵에는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이 군인의 본분이다)’이 있다.

수감돼 있던 동안 안 의사는 당당했고, 오히려 일본은 쫓겼다. 국제사회 이목이 집중되자 안 의사가 재판을 통해 일본의 만행을 조목조목 알렸다. 일제는 초대 총리대신 출신의 정치 거물 이토가 죽었는데도 들키면 안 되는 죄라도 지은 듯 서둘렀다. 일주일 만에 6차례의 비공개 공판을 몰아치고 안 의사에게 곧장 사형을 언도했다. 정당성과 절차는 모두 무시된 사형 집행 후 안 의사의 시체조차 숨겼다. 그의 무덤이 독립운동의 성지가 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안 의사는 그만큼 큰 사람이었다. 당시 중국의 쑨원, 저우언라이 등도 기개를 칭송했다.

안 의사는 ‘도마’라는 세례명을 가진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감옥에서 그의 인품에 감복한 일본 간수들이 그가 쓴 묵서를 받고 싶어 했다. 도시치라는 헌병 간수는 안 의사의 유묵을 가보로 삼고 날마다 봉양했다.

110년 만에 현해탄을 건너 고국의 품에 돌아온 이번 유묵은 경매에서 19억5000만원에 낙찰이 됐다. 기존에는 7억8000만원이 최고가였다. 안 의사 유묵의 가치가 두 배 이상 오른 셈이다. 그간 안 의사 유품들은 일본인들이 소유하다 드문드문 국내로 들어왔다. 유묵을 낙찰받은 인사는 필자에게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던 안 의사의 유묵을 봤을 때 무조건 한국에 가져와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100억원을 줘도 아깝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에게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고맙다고 말했다.

나라를 팔아넘겼던 이완용의 유묵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이완용은 뛰어난 서예가로 조선 후기 명필로 꼽혔는데, 유묵 가격은 30만~40만원에 머문다. 사려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안 의사는 재판에서 ‘거사 후 뭘 하려고 했나’라는 질문에 “나 자신에 대해선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답했다. 유언으로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라고 말했다.

그토록 원했던 독립 국가 대한민국에 또 하나의 유묵이 귀환했다. 유묵과 함께 그의 고결한 뜻도 함께 왔으면 한다. 특히 이 시대의 리더라는 사람들은 안 의사의 정신을 한 번씩 되돌아볼 시점이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40호 (2023.12.27~2023.12.31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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