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은 언제부터 '선생님'으로 불렸을까

조종안 2023. 12. 24.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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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를 따라다닌 호칭들... 과거 신문 찾아보니 1988년 이후 대중적으로 부르기 시작

[조종안 기자]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취임식(1998)
ⓒ 김대중대통령 군산기념사업회
 
김대중(1924~2009) 전 대통령은 전남 하의도에서 태어나 목포에서 상업학교 졸업했다. 광복 이후 해운회사와 <목포일보> 사장을 역임하였다. 1961년 5월 민의원 당선 후 6·7·8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군사독재 시절(60~80년대) 네 번의 죽을 고비와 6년의 감옥생활을 하면서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고, 1997년 헌정사상 최초로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뤄냈다.
1998년 2월 대통령에 취임한 김대중(DJ)은 '금 모으기' 통해 외환위기(IMF)를 앞당겨 극복한다. 이어 한국을 세계가 부러워하는 IT 강국으로 만든다. 정치, 언론, 문화, 예술 분야에서도 눈부신 성과를 거둔다. 민주화와 세계평화를 위해 헌신한 공로 인정받아 2000년 노벨평화상 받았다. 그 후 그에게는 '평화의 사도'란 수식어가 따라붙기 시작하였다.
 
 김대중 내란음모조작사건 군사재판 모습(1980년 9월)
ⓒ 김대중대통령 군산기념사업회
 
국민의 인권과 평화통일을 위해 살았던 DJ. 그는 1961년 5월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세력의 협박에 굴하지 않았다. 1980년 전두환 신군부가 협조하면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회유했을 때도 '역사와 국민 속에 영원히 살 것'이라며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그에게는 민주화의 거목, 행동하는 양심, 선생님, 인동초, '빨갱이' 등 다양한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2009년 8월 DJ가 서거하자 미국 <뉴스위크>는 '나라와 사회를 변화시킨 11인의 세계적 트랜스포머의 한 사람'으로 선정하고 추앙했다. 그럼에도 그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으로 갈린다. 호칭 역시 마찬가지. 서거한 지 14년 지난 지금도 DJ 관련 기사 댓글난에서 '빨갱이'란 호칭이 심심찮게 보이는가 하면 많은 사람이 '선생님' 호칭을 즐겨 사용하고 있다.

한국 현대사에 큰 족적 남긴 김대중, 그의 발자취

2004년부터 '후광김대중마을(다음카페)'을 운영해 오고 있는 필자는 '언제부터 김대중 대통령을 선생님이라 부르기 시작했느냐?'는 질문을 가끔 받는다. 지난 8일(금) 'DJ 스터디' 때도 어느 대학생이 비슷한 질문을 던졌다. 선거철 술자리 담론 때 심심찮게 등장하던 화두였고, 그 분야에 관심이 많았던 필자는 언론 보도와 관련 서적을 뒤져보았다.
 
 김대중 의원을 스타로 만들었던 필리버스터(1964년 4월 20일)
ⓒ 김대중대통령 군산기념사업회
 
DJ의 정치 입문은 1954년으로 기록된다. 그해 목포에서 3대 민의원 선거(민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했다가 낙선한 것. 1956년 9월 민주당에 입당하고, 1958년 4대 민선에 재출마했으나 실패한다. 그는 1961년 5월 강원도 인제 보궐선거에서 당선된다. 그러나 5월 16일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가 국회를 해산시키는 바람에 선서도 못 해보고 의원직을 잃게 된다.

50~60년대 신문에서는 김대중 뒤에 후보, 의원, 씨(氏), 대변인 등만 보인다. 그는 1964년 4월 김준연 의원 구속동의안 처리 때 국회에서 5시간 19분의 필리버스터(의사진행발언)로 동의안 처리를 무산시킨다. 그의 필리버스터는 헌정사상 최초 기록으로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하였다.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던 그때도 언론들은 '의원'으로 보도하였다.

1967년 재임에 성공한 박정희는 평생 대통령을 위한 음모를 꾸민다. 이름하여 '3선개헌'이다. 1969년 당시 제1야당인 신민당은 그해 7월 19일 서울 효창운동장에서 시국 연설대회를 개최하였다. 이날 DJ는 수십만 청중 앞에서 3선개헌 음모에 대해 엄중히 비판, 많은 청중이 카타르시스를 느꼈다고 한다. 이때도 사회자는 '김대중 의원'이라 소개하였다.

40대 나이에 제1야당(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어 돌풍을 일으켰던 DJ. 그는 1971년 5월 선거를 며칠 앞두고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한다. 덤프트럭이 그가 탄 승용차를 덮친 것. 그 사고로 두 명이 숨졌으며 DJ는 평생 지팡이에 의지하는 인고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당시 신문들은 '대통령 후보' 또는 '김대중 씨'로 보도하였다.
 
 김대중 납치사건 보도한 1973년 8월 14일 자 <동아일보>
ⓒ 동아일보
 
유신 정권의 DJ 탄압은 계속된다. 1973년 8월 '김대중 납치 사건'이 터진다. 일본 동경 팔레스호텔에서 양일동 민주통일당 당수를 만나고 나오던 DJ가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납치된 것. 이 사건은 여러 언론에 대서특필 되었고, 독자들은 경악했다. 납치 사건은 수사가 1년 넘도록 지속됐는데 이때도 신문 기사에서 '선생' 호칭은 발견되지 않는다.

60~70년대 DJ의 선거유세 및 실내 강연은 많은 청중에게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였다. 입은 있으되 말을 함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살벌했던 시절, 사람들이 하고픈 말을 대신 해줬던 것. 따라서 DJ는 연설 잘하고 국회도서관을 가장 많이 이용하는 의원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미남에 파이프 담배를 즐기는 멋쟁이 의원 이미지가 강했다.

"사람들이 '김대중 선생 만세!'를 삼창"

1975년 4월 21일 치 <동아일보> 기사가 시선을 멈추게 한다. 신문은 "전 신민당 대통령(前 新民黨 大統領) 후보 김대중(金大中) 씨는 19일 오후 서울 정동교회 구내에서 열린 시국강연회(時局講演會)에서 납치 사건 이후 처음으로 대중(大衆) 연설을 하면서 3~4분 간격으로 청중들의 박수와 폭소를 받아 유세(遊說) 분위기를 방불케 했다"라고 보도하였다.

신문에 따르면 DJ가 연설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시민들이 일제히 박수와 환호성을 질렀다. 그가 승용차에 올라 시동을 걸려고 하자 사람들이 에워싸는 바람에 한동안 출발하지 못하였고, 차가 떠나자, 사람들은 뒤를 따르며 애국가를 불렀다는 것. 한 청년의 선창으로 교회에 모인 사람들이 "김대중 선생 만세!"를 삼창했다는 대목이 눈길을 끈다.
 
 ‘김대중 선생 납치사건’ 진상규명 소견서 발표하는 한승헌 변호사(1993년 11월)
ⓒ 김대중대통령 군산기념사업회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검색창에서 '김대중 선생'을 검색해 보니 유신독재가 막을 내리는 1979년엔 기사가 9건에 불과했으나 광주항쟁이 일어난 1980년에는 82건으로 10배 가까이 늘었다. 이후 해를 거듭할수록 많아져 1987년 158건, 1993년 241건으로 대폭 증가했다. 1993년은 민주당에 '김대중 선생 납치사건' 진상조사위가 꾸려지고 국정조사를 촉구했던 해였다.

이러한 결과는 여론 형성 및 정보전달 수단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매스미디어 발전과 연관성이 깊어 보인다. 대표적인 예로 TV 방송을 꼽겠는데, 70년대는 흑백 TV 드라마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나 보급에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서민층도 TV 뉴스를 쉽게 접할 수 있었던 시기는 컬러 TV가 인기 혼수품으로 꼽혔던 1980년대 중반 이후였다.

언제부터 DJ에게 '선생(님)' 호칭이 따라다녔는지 알아보기 위해 관심 끌었던 사건 위주로 살펴보았다. 옛날 신문 기사와 서적, 매스미디어(신문, 방송, 통신, 영화 등) 발전 과정, 필자의 경험 등을 토대로 분석해 본 결과 '김대중 선생' 호칭은 '5·18 광주청문회' 열렸던 1988년 이후 대중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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