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코리아 여행을 꿈꾸며

김선흥 2023. 12. 23.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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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의인, 조지 포크] 조선인들, 왜 나를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김선흥 기자]

한국인 여러분, 안녕하세요. 조지 포크예요.

마리온호가 일본에 다가가면서 조선 땅은 가뭇이 시야에서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 긴 그림자를 끌고 나를 따라왔습니다. 그 기억의 마지막 끝자락에서 나의 친구 서광범과 그의 가족이 떠올랐습니다.

내가 서광범을 처음 만난 것은 1883년 미국에서였습니다. 그는 한국인들이 '보빙사'라는 어려운 이름으로 부르는 최초의 방미사절단의 일원이었지요. 내게 사절단을 돕는 임무가 맡겨진 것은 미국인으로서 한국어를 약간이나마 아는 유일한  사람이바로 나였기 때문이었죠.

20대의 민영익 대신, 홍영식 부대신, 서광범 서기관 등으로 구성된 사절단이 임무를 마치고 귀국할 때에 민명익과 서광범 그리고 변수는 뉴욕항을 출발하여 대서양-지중해-아라비아해-인도양을 지나 조선으로 향하는 노선을 밟았습니다. 그 노선은 사절단이 미국에 갔을 때 취했던  태평양 노선과 반대 방향이었으므로 그들 세 명은  한국인으로서 최초의 세계일주자가 된 것입니다. 다른 조선인들은 태평양을 경유하여 귀국하였구요. 

참으로 공교롭게도, 민영익 등이 귀국할 때 나는 조선주재 무관으로 발령을 받아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그 해 말 우리를 태운 트렌턴호가 뉴욕항에서 출항하여 제물포 항에 입항할 때까지 6개월 동안 서광범과 나는 선상에서 단짝이 되었습니다. 세계에 대한 서광범의 지적 호기심과 탐구욕은 마치 굶주린 상어의 식욕 같았습니다. 나 또한 조선에 대해 그러했습니다.

우리는 서로 상대방에게 개인 교사가 되었지요. 트렌턴호에 비치된 백과사전을 펴놓고 우리 둘은 자주 이마를 맞댔습니다. 그와 대조적으로 민영익은 지참하고 온 중국 서적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더군요. 서광범과 나는 주로 일본어로 소통하였지만 한국어를 일부러 섞었습니다. 나는 한글과 한국어에 목말라 있었으니까요.

조선 왕국에 도착한 지 두 달 후에 나는 공사관을 벗어나 조선인 마을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공사관에서 지내라는 푸트 공사 부부의 거듭된 강권을 뿌리치고 내가 들어간 곳은  청계천의 입동笠洞이라는 마을이었습니다. 가까운 곳에 관수교와 수표교가 있었지요. 입동은 갓을 파는 곳이라 하여 '갓전골'로 불리었습니다. 

인근에  도깨빗골, 벙거짓골, 비팟골, 웃너더릿골, 작은갓전골, 준천삿골 등의 토속 마을들이 있었지요. 그처럼 조선 백성들이 난장을 이루는 곳에서 나는 늘 그들의 왁자한 소리를 듣고 숨결과 맥박을 느꼈습니다. 그곳에서 서광범과 밤새워 이야기를 나누곤 했었지요. 나는 그에게서 빛나는 지성과 강렬한 탐구욕, 예술과 인문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과 깊은 소양, 그리고 혁명가적 용기를 보았습니다. 우리는 10년지기 이상의 우정을 맺었고 친 형제 이상의 형제애를 나누었습니다.

서광범은 한국역사에서 '갑신정변'이라 불리는 사건의 핵심 인물이었습니다. 거사를 준비하면서 그는 미 공사관의 지원을 간청했습니다. 나는 유혈참극을 직감하고 극구 만류하였으며 서로 얼굴을 붉히며 언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갑신정변이 '3일 천하'로 끝나자 서광범은 대역죄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극적으로 일본으로 망명하여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옥에 갇힌 그의 양친과 부인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운명이었습니다. 나는 극비리에 인맥을 통하고 뇌물을 사용하여 그들을 출옥시키는 데 가까스로 성공하였습니다. 또한 나는 그들의 거처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서광범의 모친과 부인 그리고 아이 하나(갑신정변 이후 출생)가 한 집에 살았고 종복이 한 명 있었습니다. 서광범의 부친은 다른 곳에서 거처했습니다. 나는 매달 10불 정도( 내 박봉의 10%)를 서광범의 모친에게 전달토록하여 생계를 도왔습니다. 부친에게는 별도로 식사를 제공했습니다. 그 분들에게는 그 모든 비용이 미국의 아들이 보내 온 것으로 여기도록 하였지요. 그러한 위험천만한 일이 탄로날까 봐 자주 겁이 났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친구의 비극을 외면할 수 없었고 기도로써 하나님의 가호를 빌곤 하였습니다.
   
1887년 1월 하순 일본으로 떠나기 직전에 서광범의 모친을 은밀히 공사관의 내 거처로 모셔오게 했습니다. 그 때 나는 조선을 아예 떠날 생각이었기  때문에 마지막 인사를 드리려는 것이었지요. 노부인은 무명 옷을 입고 오셨습니다. 옷차림은 비록 평민에도 미치지 못했지만 귀족의 기품이 여실히 느껴졌습니다. 노부인께서는 내게 곡진히 감사를 표시하고 특히 아들로부터 돈을 전달해 주어 고맙다고 하시더군요. 아들이 '포크씨는 나에게 형제'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작별 인사를 드리려는데 자꾸만 눈물이 흘러내려 말을 잇지 못했던 기억이 지워지지 않습니다. 

6월 30일 새벽 한 많은 조선 땅에 작별을 고한 후 나가사키 항을 향해 가는 도중에 문득 "이제 서광범의 가족들은 누가 돌보지?"하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저었습니다. 이제 다 지닌 일이  아닌가, 잊자.  

나가사키에 도착한 것은 7월 2일 오후 2시였습니다. 비가 계속 내렸습니다. 나는 
어떤 중대한 변화가 내 인생에 닥쳐 오고 있음을 예감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결국 1893년 8월 7일 후지산 자락에서 주검으로 발견되었습니다. 내 나이 서른 일곱, 조선을 떠난 지 6년 만이었지요. 나의 유해는 교토의 인적없는 공동 묘지에 묻혔습니다. 높고 깊은 산속에 자리잡은 그 묘지는 윤동주로 유명힌 동지사 대학의 공동묘지입니다. 내 삶의 마지막을 그 대학에서 수학을 가르치며 보낸 연고로 거기 묻힌 것이지요. 나의 고혼은 미국행을 원치 않았고 내가 사랑했던 조선인들은 나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세월은 무심히 흘렀고  나는 조선인들의 기억 저 너머로 사라졌습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고 아무도  기억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웬 일입니까? 기나긴 망각의 강을 건너 어떤 한국인이 나의 묘소를 찾은 것은 2018.5.29이었습니다. 외교관 출신의  그는 내가 1884년 조선 바다에 첫 발을 들인 날짜에 맞춰 나를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사나이는 말없이 나의 묘비를 더듬은 다음 한국에서 가져온 막걸리를 잔에 따라 바쳤습니다. 우리는 서로 잔을 주고 받으며 오랜 갈증에 잠긴 목을 축였습니다. 고개 숙여 묵념을 한 후 그는 발 길을 돌렸습니다. 인적 없는 산을 내려가는 그의 뒤를 나는 가만히  따라갔습니다, 한국까지.

꼭 140년 만에 나는 그렇게 두 번째 코리아 여행에 나선 것입니다. 견딜 수 없는  궁금증을 안은 채.  그 옛날 내가  보았던 조선과 조선인들은 지금 어떻게 변했을까? 서광범과 그 가족들은 그 뒤 어떻게 되었을까? 정초에 스케이트를 즐겼던 남대문 앞 연지는 지금 어떻게 변했을까? 빙판의 돌기를 깍아주던 조선인들은 그 뒤 어떤 삶을 살다 갔을까? 전주 감영에서 접대 받았던 그 놀라운 음식들을 한국인들은 지금도 먹고 있을까? 굶주리던 조선의 백성들은 형편이 좀 나아졌을까? 아직도 겨울에 그 우스꽝스럽도록 두툼한 솜 옷을 입고 지낼까? 여성들은 과연 어떻게 변했을까? 지금도 너울로 얼굴을 가릴까? 내가 묵었던 주막들은 어떻게 변했을까? 미쳐 가보지 못했던 북녘 땅은 어떤 모습일까? 나를 추방했던 사대수구파들은 지금도 건재하실까? 나를  매료시켰던 그 놀라운 지도들은 지금 쯤 빛을 보고 있을까?

아, 궁금하다. 모든 게 궁금하다. 

-연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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