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잘하는 아이'로 만들려다 놓쳐버린 한 가지 [변방에서 안방으로 : 일하는 사람책]

최문희 2023. 12. 21.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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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치료사 김지호의 책 <언어가 숨어 있는 세계>

일하는 사람의 기록을 담은 책을 소개한다. 송곳이 되어 준 작가의 경험과 필자의 지금을 들여다보아 변방에서 안방으로 자리를 넓혀 먹고사는 오늘의 온도를 1℃ 올리고자 한다. <기자말>

[최문희, 고정미 기자]

말을 잘하는 것이란 무엇일까. 문해력이 극심하게 낮은 어린이, 눈을 못 마주치고 상대방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청소년은 정말 학습이 덜 된 것일까. 팬데믹을 기점으로 십 대의 어휘력, 의사표현능력이 현저히 떨어졌다며 문해력을 주제로 한 도서와 각종 강구책이 교육계에 쏟아져 나온다. 우리는 정말 갈수록 말을 못하고 있는 것일까. 말이란 무엇일까.

적재적소에 필요한 언어를 쓰는 것. 상대방이 원하는 바를 이해하고 요구에 응답하는 것. 말을 잘하는 것이란 사회가 정한 규범에 적절히 따르는 행동을 기르는 학습이기도 하다. 나는 때때로 그것을 이탈한 사람과 동물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골똘해진다. 명징한 의미소를 지닌 이 세계를 들여다보면 오지선다형 문답처럼 흐르지 않을 때도 많기 때문이다. 세상은 허술하고, 요상하고, 어쩌면 그래서 아름다운지도 모른다.

전봇대 앞에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사람, 복도에서 제 두 귀를 손바닥으로 때리며 주문을 외우는 청소년, "시상식에 춤추러 갈 때 어땠어요?" 묻자 "지금 만나러 갑니다. 좋았어요!" 동문서답하는 인터뷰이(과거 나는 이 답변을 듣고 인터뷰에 그대로 수록한 바 있다. 그게 그 사람의 자명한 언어였으므로), 좋아하는 책을 빌리기 위해 보호자와 지팡이를 짚고 맹학교 도서관 문을 더듬더듬 찾던 아이.

이따금 말과 말은 부딪쳐 스파크를 만들고, 우리가 정상 규범으로 여기던 세계의 말문을 아늑하게 깨트린다. '말을 꺼내는 실마리, 말을 할 때 여는 입'을 뜻하는 말문이 또 다른 세계를 열어젖혀 '가나다'로 이뤄진 언어가 실은 우리가 세운 규칙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일러 준다. 지구에 여러 종류의 생물이 살듯이 사람이 가진 말문 역시 모두 다르다. 오히려 우리 사회는 타인을 이해하는 인지 능력이 요원하다. 

자기 속도에 맞춰 입을 여는 아이들
 
ⓒ 고정미
 
<언어가 숨어 있는 세계>는 우리가 몰랐던 또 다른 말문을 가진 세계의 아이들을 만나게 해주는 책이다. 2007년 가을부터 2022년 겨울까지, 영유아부터 열여덟 살 청소년에 이르기까지 말더듬증을 비롯해 다운증후군, 중증 자폐성 장애 등을 가진 아이들을 만나온 저자의 직업은 언어치료사(언어재활사). 저자는 18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 아이들이 사회에서 낙오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가정집, 보육 시설 등을 방문해 언어치료를 해왔다.

그는 "명사로 채워진 집, 땀내 나는 동사로 이뤄진 놀이터, 바스락거리는 형용사가 숨은 공원"에서 언어 발달에 어려움을 느끼는 아이들을 가르쳐왔다. 뇌 신경에 손상을 입었거나 발음이 부적절한 아이들, 무발화 증상을 겪는 학생들을 안면 마사지, 각종 놀이와 교구를 활용한 학습으로 코칭해왔다.

그렇게 만난 수많은 아이들 중 스물다섯 명과 함께했던 날들의 기록이 이 책에 빼곡히 실렸다. 개성이 각기 다른 학생의 특성을 염두에 두고 밤새가며 수업 계획을 짰던 하루, 돌봄 노동에 진이 빠진 양육자의 뒷모습을 보며 한 사람에게 지워진 삶의 무게를 체감한 날 등 사계가 흐르듯 별천지 같은 수업 기록이 책장마다 담담히 이어진다. 그 기록은 '장애'라는 특수성에 갇혀 있지 않다.
 
"희아는 의지를 보였다. 눈을 깜빡이고 입을 열기 위해 몸을 뒤척이는 게 신호였다. 드디어 입이 열리고 숨을 들이마실 때는 마치 100미터 달리기는 하는 사람 같은 얼굴이다. 수 초간 침묵이 흐른다. 그리고 마침내 '허어' 하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 <언어가 숨어 있는 세계>(김지호) 중에서
 
저자는  치료사의 눈으로 타인의 말 세계를 조망하면서도 아이들이 어떤 증상이 있는지 섣불리 유형화하지 않는다. 신이, 훈이, 영이 등 익명으로 소개되는 아이들은 때때로 심드렁하고, 해맑고, 그네타기를 좋아하는 등 성격도 취미도 제각각이다. 이 아이들은 수학이나 미술을 배우는 친구들처럼 익히고, 헤매고, 출렁이다가 자기 속도만큼 배움을 익혀 간다.
'터진 둑'처럼 마음이 쏟아져 나오는 고백의 글
 
  책 <언어가 숨어 있는 세계>
ⓒ 한겨레
사실 이 책을 처음 읽을 때는 여타의 교육 에세이와 사뭇 달라 갈피를 잡지 못했다. 저자의 학습 방법은 세밀했지만, 집중할라치면 다른 아이들의 사연으로 넘어갔기에 각 학생들이 수업 목표에 근거해 어떤 성과를 이뤄냈는지 소상히 들여다보기엔 어려웠다(여건상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책 중반부에 이르러서야 내가 '교육 사례집의 패턴'에 너무 익숙했다는 걸 절감하고, 반성했다. 어쩌면 이 책은 언어치료사의 치료 기록이자 나를 다잡는 자기 치료의 기록였으므로.

이 책은 '수업 계기-방법-효능' 순의 통상적인 서사에도, 개개인의 사연에 정밀하게 밀착해 사유한 서사에도 속하지 않는다. 학생들에게 입말로 전하지 못했던 언어치료사의 마음이 이야기 중간중간 '터진 둑'처럼 쏟아져 나오는, 차라리 고백에 가깝다.

저자는 그간 제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산만치 쌓아둔 듯하다. 소통이 어려운 아이들에게 하고 싶었던 고백들조차 상처로 남지 않도록 고민해서 쓴 흔적이 역력하다. 어떤 구절은 정제된 시처럼 읽힌다.

인사말을 표현하기 녹록지 않은 아이들에게 마음으로 건넨 이야기들. 별이 됐거나 어른이 되어 살아가는 학생들에게 못다 전했던 말들이 책에서 뜨겁게 펼쳐진다. 스물다섯 명과 만난 기록 끄트머리마다 실린 편지글은 반드시 '장애'라는 배경을 염두에 두지 않고도, 누구에게나 위로가 되는 대목들로 힘차게 출렁인다.
 
"네 아버지가 걱정하듯이 '영영 한마디도 못 하고 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절망감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기로 했다. 네 뜻을 알아주는 사람이 더 많아지면 되겠다. 너에게 익숙해지면 서로 편해지겠다. 손짓과 몸짓으로도 대화할 수 있으면 되겠다."
- <언어가 숨어 있는 세계>(김지호) 중에서
 
그는 더 나은 언어치료사가 되고자 무언의 메시지를 스스로에게 꼬박꼬박 보낸 듯싶다. 냉철하게 아이들의 언어를 평가하고, 계획하고, 수업하고도 다양한 이유로 치료가 중단되어 때로 목표에 도달하지 했을 순간들. 좌절하는 와중에도 희망이 있음을 붙들어온 교사는 그 절박한 마음을 신중한 언어로 고한다.

특히 저자는 자신이 가르쳤던 학생들이 타인의 표정과 몸짓에 누구보다 예리하게 반응했다는 사실을 일러 준다. 장애인의 행동양식 대신 "다른 법칙이 적용되는 세계에 (내가 너와) 함께 있는 게 더 좋았던 건지도 몰라"라고 이야기하며 수업하는 자신도 그 시간이 즐거웠음을 긍정한다.

'정상 언어'로 말하지 않아 속마음을 알 수 없다고 여겨온 자폐스펙트럼 아이들, 발달장애 아이들 모두 '성장하는 존재'이자 '경쟁할 능력이 있는 존재'임을 강조한다. 무한정 돌봄을 필요로 하는 존재로 장애를 가진 아이들을 바라보는 일의 효능은 과연 무엇일까? 저자는 독자에게 되묻는다. 장애 학생을 돌봄을 받는 사람의 위치에 함부로 '고정'하지 않는다.

치료 이전에 신뢰를 쌓기 

저자는 안다. 장애를 가진 내 아이가 일상생활에서 타인의 눈에 이상한 아이로 비치는 현실을 감당하기 쉽지 않음을. 그러나 그런 이유로 보호자가 자녀에게 강압적 통제부터 가한다면 아이가 1차적 인간 관계인 가족을 장애물로 인식하면서 사회성이 손상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지적하며, '상동 행동(규칙적으로 반복되는 행동)'의 대안책도 안내한다.

숟가락으로 밥 먹기를 거부하는 아이는 숟가락 특유의 차가운 감촉이 싫어서일 수 있다는 것. 혹은 숟가락을 던질 때 나타나는 포물선을 보고 싶어서,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재밌어서 그럴 수 있으니 아이의 행동을 제지하기보다 그 행동의 동기를 파악하는 게 먼저라는 것이다.

아이가 던지는 걸 즐겨서 숟가락을 냅다 바닥에 버린 걸 알아챘다면, 양말 뭉치 등 손에 쥐여줄 만한 걸 던지게 한 다음 숟가락을 들게 함으로써 가족 간 신뢰 경험을 먼저 쌓는 게 긴요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언어치료 이전에 아이에게 '수용의 경험'을 주는 이해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이야기.

이는 제각기 다른 사람들이 한데 살아가는 사회에서도 필요한 감수성이다. 지구에서 우리는 모두 '나름의 이유가 있는 행동양식'을 갖고 살아간다. 억압하고 제지하는 대신, 저자는 타인의 맥락을 헤아리고 이해하는 노력의 당위를 깨우쳐준다.

상상할 줄 아는 당신이 더 중요하다

(어떤 사건인지는 등장하지 않지만) 플래카드가 나부끼는 곳에서 "제발 우리 말을 들어달라"며 머리카락을 밀어낸 신이(가명)의 양육자를 보고 눈물을 참았다는 언어치료사의 기록은 곡진하지만 끝내 무덤덤하다. 이는 가족의 생존을 위해 수치심을 밀어낸 사람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것이 옳다는 치료사의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고요한 믿음은 때때로 한마디 말보다, 힘이 세다.

내 자녀의 미진한 언어 상태, 혹은 문해력 수준을 최상으로 끌어올리려는 노력이 곳곳에서 보이는 요즘이다. 그 전에 간과해선 안 될 지침들을 이 책으로 얻어 가면 좋겠다.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이 책에는 누군가를 가르치거나 돌보는 사람이 잊지 말아야 할 덕목이 별자리처럼 빛난다.

언어는 우리가 알던 말의 세계보다 훨씬 넓은 우주로 이뤄졌음을 저자는 정직하게 안내한다. "상상할 줄 아는 지금의 네가 훨씬 더 중요하다"며 학생의 오늘을 인정해주는 치료사. 손뼉을 쳐가며 놀이에 몰입하는 아이의 즐거워하는 얼굴에 우리 삶이 고고히 지속됨을 긍정하는 치료사.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닌 일에 기죽지 않으며, 고급 관료들을 향해 싸움의 몸짓을 당당히 드러내는 가족들에게서 삶의 자부를 배우는 사람. 한 언어치료사에게서 응시와 인내가 왜 소중한가를 엿본 것 같다. 서로에게 닿기 위한 기다림의 시간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서로의 말문, 그 모양을 이해하는 모두의 새해가 밝아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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