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 죽음의 바다' 사족이 완벽한 마무리를 망치다
[원종빈 기자]
▲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 스틸컷 |
ⓒ 롯데엔터테인먼트,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
*이 기사에는 영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었다. 퇴각 명령을 받은 '고니시'(이무생)는 즉각 본국으로 돌아갈 채비를 한다. 권력 공백 상태인 일본 열도에서 곧 내전이 일어날 테니. 하지만 문제가 있다. 순천 왜성을 포위한 조명 연합군 함대를 뚫을 길이 없다. 이에 고니시는 '진린'(정재영)에게 열띤 뇌물 공세를 벌이고, 간신히 연락선 한 척을 포위망 너머로 보내는 데 성공한다.
이 소식을 들은 '이순신'(김윤식)은 분노한다. 조선군은 왜군 퇴각로를 막고 그들을 섬멸할 준비를 마쳤기 때문. 그는 진린에게 양자택일을 요청한다. 조선군 옆에서 싸우거나, 조용히 철군해 달라고. 이순신과 진린의 갈등이 극에 달하는 사이, '시마즈'(백윤식)의 함대는 고니시를 구하기 위해 노량으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7년에 걸친 전쟁을 끝낼 마지막 전투의 막이 오른다.
장점만 모아 '3의 저주'에 도전하다
시리즈 영화는 징크스에 시달리는 경우가 있다. 몸집을 키운 2편이 1편의 매력을 잃어버리는 '속편의 저주'가 대표적이다. 그 못지않게 자주 볼 수 있는 징크스가 바로 '3의 저주'다. 시리즈물 중 유독 3편이 비평적으로 평가가 안 좋은 경우를 말한다. 반복된 소재 때문에 피로감이 누적된 <트랜스포머 3>, 배급사 개입으로 인해 스토리가 중구난방이 된 <배트맨 포에버>와 <스파이더맨 3> 모두 '3의 저주'를 피하지 못한 사례다.
김한민 표 '이순신 삼부작'의 완결편인 <노량: 죽음의 바다>는 다르다. <한산>이 <명량>의 성공에 도취하지 않은 채 장점은 유지하고 단점을 채워 '속편의 저주'를 피했듯이, 이번에도 '3의 저주'를 영리하게 피해 간다. 특히 두 형의 장점만 취하려는 접근법이 인상적이다. 신파 연출이 과했던 <명량>, 이순신이라는 캐릭터가 돋보이지 않았던 <한산>을 반면교사 삼아 완벽한 정반합에 닿으려고 한다.
실제로 조선군, 명군, 왜군 세 진영을 오가는 초반부 외교전과 신경전은 <한산>의 초반부를 닮았다. 그러면서도 <명량>처럼 삼도수군통제사의 인간적인 일면도 놓치지 않는다. 셋째 아들 '이면'(여진구), 전라우수사 '이억기'(공명) 등 먼저 전사한 이들을 그리워하는 이순신의 모습은 모두가 아는 결말로 향하는 길을 감동적으로 장식한다. 다만 이 정반합은 완전하지 않다. 영화의 끝에 덧붙인 사족이 그 감동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 스틸컷 |
ⓒ 롯데엔터테인먼트,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
<노량>의 도입부는 앞선 두 편과 유사하다. 모든 플롯을 포괄하는 확실한 콘셉트를 잡았다. <한산>의 콘셉트가 '의로움'이었고, <명량>의 모티브가 '천운'이었듯이. <한산> 속 의병, 항왜, 거북선과 이순신의 화살은 모두 같은 의미였다. 누군가를 지키려는 의로운 전쟁을 상징했다. <명량>은 조류의 변화, 거북선의 등장, 백성들의 응원을 통해 천운을 다양하게 보여줬다. 백성을 위하는 마음이 기적적인 승리의 발판이었다고 암시했다.
<노량>의 콘셉트도 명확하다. '집'이라는 공통 모티브를 살렸다. 당장 명군은 집에 가고 싶은 군대고, 왜군은 집에 가야만 하는 군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명군은 조선에서 싸울 명분이 없어졌고, 왜군은 본국에서 벌어질 다이묘 간의 내전을 대비해야 하니까. 그래서 왜군과 명군은 치열한 외교전을 벌인다. 집으로 가야만 하는 왜군은 명군을, 집에 가고픈 명군은 굳이 전투를 벌이려는 조선군을 설득하려 애쓴다.
이때 <노량>은 <한산>의 화법을 취해 명군과 왜군의 상황을 묘사한다. 자칫 낯설 수 있는 명군과 왜군과 정치적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풀어내며 그들이 싸워야만 했던 이유를 보여준다. 이 대목은 이순신과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서로의 전술을 알아내기 위해 첩보전을 펼친 <한산> 전반부를 확장한 버전처럼도 느껴진다. 진린, '등자룡'(허준호), 시마즈 등 새로운 캐릭터들이 자연스럽게 존재감을 과시할 장이기도 하다.
그와 동시에 <노량>의 전반부는 이순신의 개인적 아픔을 보여준다. 영웅의 인간적인 면모를 강조한다는 점은 <명량>과의 공통점이다. 그는 셋째 아들 이면이 왜군과 싸우다 죽는 악몽을 꾼다. 꿈속에서 그는 집을 지키려는 아들을 돕지 못한다. 아들의 이름을 외치며 흘린 그의 눈물에는 차마 왜군을 고이 보낼 수 없는 한이 서려 있다. 이 대목은 조선군의 심정을 대변한다. 조선군은 이순신처럼 돌아갈 집을 잃은 군대이기 때문.
<한산>처럼 보여준 노량 해전
착실히 쌓아 올린 명분과 감정은 100여 분에 달하는 해전 시퀀스로 터져 나온다. 우선 잘 짜인 군무를 보는 것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판옥선이 눈을 사로잡는다. <한산>이 어린진과 학익진을 선보인 것처럼 이번에도 진과 진의 움직임에 주목한다. 일례로 시마즈의 수군을 기습 공격할 때 조선군은 일자진으로 일제히 화력을 쏟아붓는다. 비교적 전투력이 약한 명군을 집중 공격하는 왜군 진영을 일도양단하는 진법도 인상적이다.
동시에 왜군의 반격도 자세히 보여주며 긴장감을 살린다. 시마즈는 위기의 순간마다 함대를 냉철히 지휘하며 마지막 맞수다운 임팩트를 남긴다. 선봉대가 조선군에게 기습당하자 자기 손으로 선봉대를 포격, 침몰시킨 후 활로를 뚫는 대담함을 보여준다. 관음포에 갇히자 고향을 그리워하는 병사들을 자극해 사기를 끌어올린다. 조명 연합군의 협공에는 등자룡과 진린의 함선을 집중 공략으로 맞대응해 전투의 균형추를 맞춘다.
다만 야간이라는 환경은 일장일단이다. 어두운 화면은 조선군의 화력을 강조할 때 유리하다. 특히 조선군이 화포, 총통, 신기전을 총동원해 화력을 퍼붓는 장면은 거친 박력과 압도적인 쾌감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부감샷으로 전체적인 진의 움직임을 보여줄 때는 문제가 된다. 불을 끈 채로 배들이 이동하다 보니 상영관 환경에 따라서는 조선군, 왜군의 움직임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수 있다.
▲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 스틸컷 |
ⓒ 롯데엔터테인먼트,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
조선군, 명군, 왜군 가릴 것 없이 뒤엉킨 배에서 난전이 벌어지는 순간부터 <노량>의 분위기는 전환된다. 특히 롱테이크 장면이 인상적이다. 그전까지는 상업 영화다운 볼거리에 충실한 전투가 등장했다면, 이 순간부터는 진정한 노량 해전이 모습을 드러낸다. <명량>에서도 롱테이크 백병전 장면이 당시 해전의 처절함을 집약적으로 보여준 바 있는데, <노량> 역시 롱테이크 신을 활용해 노량 해전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갑판 위에 자리 잡은 카메라는 왜군-명군-조선군 순으로 옮겨가며 일반 병사의 시점에서 노량 해전을 비춘다. 조선군은 복수를, 명군은 신의를, 왜군은 귀향을 위해 죽을 각오로 백병전을 펼치고 있다. 그 광경은 지옥도나 다름없다. 피사체의 주체가 죽으면 그를 죽인 주체가 카메라의 대상이 되고, 또 그를 죽인 사람인 대상이 돼야 할 정도다. 7년 간의 전쟁과 살육을 단 한순간에 끝내려는 처절함이 스크린을 뚫고 나온다.
그 끝에서 카메라는 이순신을 찾아낸다. 난전 속에서 그가 먼저 죽은 아들과 동료들의 환상을 보고, 갑판에 떨어진 북채를 들어 북을 치고, 전투를 독려하던 중 전사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앞선 롱테이크 신에서 곧장 이어지는 장면임을 생각하면 이 대목은 특히 의미심장하다. 앞선 전투가 처절하고 참혹할수록 이순신의 회한은 짙어지고, 고뇌도 깊어지기 때문. 삼부작 중 인간 이순신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순간처럼도 보인다.
그는 죽은 동료들에게 미안하면서도 고맙다. 왜군과 끝까지 싸우겠다는 아들의 기개는 대견하지만, 지켜주지 못해 한스럽다. 그들을 기리기 위해서는 왜군을 섬멸해야 하지만, 그 과정에서 죽어가는 다른 장병들에게 또 죄를 짓는 듯하다. 이처럼 형용하기 힘든 감정의 파고 속에서 이순신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다. 전투를 독려하고 전쟁을 끝내기 위해 북을 치는 것. 바로 그 순간 <노량>은 클라이맥스를 맞이한다.
다만 그 이후로는 아쉬움이 남는다. <명량>이 신파가 과했다는 지적을 받았듯이, <노량>도 후반부로 갈수록 균형을 잃는다. 물론 연출 자체는 세련됐다. 모두가 기대하는 이순신의 전사 장면에 속임수를 주고, 마지막까지 유언을 아끼며 성웅의 죽음을 영리하게 보여준다. 전사하는 순간을 직접 보여주지는 않는다. 대신 진린이 오열하고, 장남 이완이 계속해서 북을 치며, 장례를 치르는 모습만 봐도 가슴은 충분히 미어진다.
단지 피로감을 떨칠 수 없을 뿐이다. 길고 긴 전투 시퀀스가 이어지는 가운데, '굉장하고 장엄하고 뭐라 항의할 수 없을 만큼 결정적인 방식으로 시리즈를 끝내고 싶은' 욕심이 끼어든다. 그 결과 영화 말미는 늘어진다. 이순신 전사 앞뒤에 북을 치는 장면이 슬로 모션으로 다소 과하게 반복되고, 조선군과 명군의 돌격 장면도 필요 이상으로 연달아 등장하는 식이다.
▲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 스틸컷 |
ⓒ 롯데엔터테인먼트,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
전반적으로 <노량>은 <명량>과 <한산>을 거쳐 완벽한 정반합으로 시리즈를 끝내려 한다. 그러나 마지막에 등장한 쿠키 영상이 끝내 발목을 잡는다. 노량 해전 이후 광해군과 신료들이 순천 왜성에 모인다. 그들이 이순신을 기리고, 일본 공격을 다짐하면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작가적 관점에서 이순신의 죽음 이후를 그려낸 장면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쿠키 영상 이후 150분간 쌓아 올린 감동은 한순간에 식어 버린다. 고증, 완성도, 연결성에 모두 해를 끼치기 때문이다. 정유재란 이후 조선이 일본 공격을 논의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해당 논의는 광해군이 아닌 선조 시기에 진행됐다. 정작 광해군은 즉위 1년 차인 1609년에 기유약조를 체결하고 포로를 송환받는 등 조선과 일본의 우호 관계를 다지는 데 주력했다.
완결성도 문제가 된다. <노량>은 집을 잃은 사람, 집에 가고픈 사람, 집에 가야만 하는 사람들의 혈투를 보여줬다. 함선 간의 전투보다도 병사들의 시점에서 이어진 롱테이크 신이 인상적일 정도였다. 이는 죽음을 끝내기 위해 더 많은 죽음을 각오한 이순신의 비장함이 돋보인 배경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또 다른 전쟁과 죽음을 암시하는 쿠키 영상은 승전의 기쁨보다도 전쟁의 참혹함을 강조하는 메시지와 상충할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시리즈 전체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갑작스럽다. '이순신 삼부작'은 조정의 정치적 갈등이 중요한 영화가 아니었다. 당장 선조나 광해군은 시리즈 내내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 극 중 선조와 광해군의 갈등 역시 초반부에 잠깐 암시될 뿐, 주요 플롯이라 볼 수는 없다. 또 이순신과 선조의 관계가 대중적으로도 잘 알려진 반면, 이순신과 광해군의 관계는 알려진 바가 없기에 이번 쿠키는 더 어색하다.
<노량: 죽음의 바다>는 분명히 기념비적인 영화다. 이순신이라는 위인을 고찰한 작품으로서도, 사극 해전 영화로서도, 김한민 감독의 변화와 발전을 볼 수 있는 시리즈로서도 부정할 수 없는 성과를 일궈냈다. 하지만 그 의의가 크고 의미가 깊을수록 찬물을 끼얹는 마무리는 퍽 아쉽다. 이순신의 죽음을 그 어느 때보다 장엄하고, 품격 있게, 공들여 그려냈기에 특히 그렇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https://blog.naver.com/potter1113)와 브런치(https://brunch.co.kr/@potter1113)에 게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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