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보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노래가 먼저인 마을

이영천 2023. 12. 19.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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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한 권 들고 떠난 동학기행1] 전봉준 장군 태생지를 찾아

2024년은 동학혁명 130주년이다. 처음엔 '반역'에서 동학란으로, 또 그사이 동학농민전쟁이었다가 백주년에서야 비로소 ‘동학농민혁명’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름 하나 바꾸는데 백 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동학농민혁명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 혁명에 참여했던 오지영 선생이 지은 <동학사> 한 권을 들고 전적지를 찾아다니며, 그 답의 실마리나마 찾아보려 한다. 우리를 되돌아보는 기행이 되었으면 한다. <기자말>

[이영천 기자]

문득 전봉준(全琫準)이란 사내가 몹시 그리웠다. 그와 동향(同鄕)이어서만은 아니다. 당시에 비춰, 작금 무엇이 얼마나 나아졌나 하는 의문 때문이다. 희화화한 권력 집단에 극심한 빈부격차, 기대어 따를 곳 없이 천박해진 사회의식….
 
▲ 전봉준 장군 의금부가 있던 자리 맞은 편 종로1가 사거리에 있는 전봉준 장군 동상.
ⓒ 이영천
 
그가 두 발로 누볐을 땅들은 더 말할 나위 없다. 당장이라도 길을 나서, 망해 가는 나라를 일으켜 세우려다 이름 없이 스러져간 그들을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아는 게 없었다. 뭐라도 채워야 했다. 책장을 뒤진다.

다행히 동학을 그린 소설과 연구서, 학술서 수십 권이 손에 잡힌다. 차분하게 읽으며 기록한다. 책들은 내 의식 밑바닥에 잠자고 있던 파랑새를 불러내 주었다. 처절한 패배였을망정, 전봉준 그가 다시 일어나야 한다는 당위를 말하고 있었다. 맞다. 파랑새는 항시 날아올라야 하고, 녹두꽃은 언제건 다시 피어나야 한다.

그중 유독 한 권의 책이 눈에 들어온다. 주요 간부로 동학농민혁명(아래 동학혁명)에 참여한 오지영(吳知泳)이 지은 <동학사>다. 한문투성이에 세로쓰기다. 단숨에 읽어낸다. 한편의 대하드라마다. 이 책을 들고, 이름 없이 스러져간 녹두꽃을 찾아보는 여정을 떠나려 한다. 위정척사파로 강제 병합을 통탄하며 1910년 자결한 황현(黃玹)의 <오하기문>도 좋은 동반자라 할 만하다.

증오와 사랑

녹두장군 그는 누구인가? 혁명가인가, 반란군 수괴인가, 그도 아니면 폭압에 항거한 평범한 일개 서생에 불과했던가? 그가 누구건, 하나의 이미지만은 또렷하다. 시인 김남주가 읊은, 썩은 권력에 대한 증오와 민중에 대한 사랑이라는 '형형한 두 개의 눈'이다. 이것이어야만 그에 대한 모든 설명이 가능하고, 이를 통해서만 험난한 혁명전쟁이 성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 호송되는 전봉준 1895년 재판을 받으며 이동 중 찍힌 전봉준 장군의 유일한 사진.
ⓒ 고창군청
 
 
녹두장군
                                                  김남주
 
무엇 때문일까
백 년 전에 죽은 그가 아니 죽고
내 안에 살아 있는 것은
내 가슴에 내 핏속에 살아 숨 쉬고
맥박처럼 뛰는 것은
 
그도 내 아버지의 아버지처럼
서너 마지기 논배미로 평생을 살았던 가난한 농부였기 때문일까
나와 같이 그 사람도 한때는
글줄이나 읽었던 서생이었기 때문일까
 
무엇 때문일까
천석꾼 만석꾼 큰 부자도 아녔던 그가
가난한 이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구척장신 불세출의 영웅호걸도 아녔던 그가
녹두꽃이라 녹두장군이라 인구에 회자 된 것은
백 년 동안 민중의 가슴 속에 남아
답답할 때면 노래 되어 그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캄캄한 밤이면 별이 되어 그들의 머리 위로 떠 오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나는 본다
들것에 실려 서울로 압송되어가는 그의 얼굴에서
두 개의 눈을 본다
양반과 부호들에 대한 증오의 눈과
가난한 민중에 대한 사랑의 눈을.
(황토현에 부치는 노래. 창작과비평사. 1993. p144~145)
 
잘못된 권력을 징치(懲治: 징계하여 다스림)하고 척양척왜(斥洋斥倭: 서양과 왜의 문물이나 세력 따위를 거부하여 물리침)로 나라를 구하고자 했던 그들은, 을사늑약 후엔 무장 의용군이었고 3·1운동의 핵심이었으며, 일제 강점기 항일 독립 무장투쟁의 주체로 줄기차게 명맥을 이어온 녹두꽃이었다.

도둑처럼 다가온 해방, 친일파 처단과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려던 꿈의 좌절, 과정에서 민족분단을 온몸으로 저지하려 싸웠던 녹두꽃. 분단 고착화로 이어진 한국전쟁 참상을 딛고 일어서 부패한 권력을 타도했던 4·19혁명의 녹두꽃. 쿠데타에 다시 빼앗긴 꿈과 수십 년 군사독재를 이겨내고 민주와 통일에 대한 열망의 길에 다시 피어난 녹두꽃이다.

1894년 스러져간 헤아릴 수 없는 죽음은, 지금 우리에게 무얼 말하고 있는가? 130년 전 녹두꽃은 의연한 죽음을 택했으나, 결코 그들은 죽지 않았다. 지금도 우리 가슴과 핏줄에 팽팽히 살아 있다. 우금치를 넘지 못한 자주와 민주, 통일의 꿈 또한 결코 좌절한 게 아니다. 이 땅 녹두꽃은 여전히 그들과 싸우고 있으며, 활짝 필 그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전봉준이 나고 자란 곳 

전봉준이 태어난 곳은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 당촌이다. 고창읍 서쪽에서 남북으로 지나는 국도 23호선 석교사거리에서 '전봉준로'로 접어들어야 한다. 2차선 한적한 도로 2km쯤 덕정마을 회전교차로에서 북쪽 부안면 방향으로 200m쯤 낮은 언덕 왼편이다. 마을은 동편을 향해 나붓하게 앉아 있다. 서해안 고속도로에 잇닿은, 고창 나들목과 고인돌휴게소 중간이다.
 
▲ 태생지 드는 길목 고창읍에서 전봉준로(路)를 타고 부안면 방향으로 가는 길에 있는 당촌 마을 입구.
ⓒ 이영천
 
내가 나고 자란 곳은 여기서 북쪽으로 시오리, 할아버지가 장가든 창녕조씨 집성촌이다. 선산이 있는 본가는 이곳에서 서쪽으로 십 리다. 본가를 걸어 오가던 할머니는 당촌 옆 마을 사실터를 지날 때면 늘 무섭다고 말씀하셨다. 동학혁명 후 이곳에서 처형된 셀 수 없는 영령들 때문일까.
인구가 소멸하는 여느 지역과 마찬가지로, 고창군도 지난 10여 년 사이 인구 15%가 줄었다. 당촌 마을도 예외는 아니어서 한적하기 그지없다. 태생지 옆 '고창 역사교육관'과 조각공원이 한때 이곳을 찾는 사람들을 반겼으나, 이마저 시들해져 문은 잠겨있고 조각공원은 수풀이 무성하다.
 
▲ 당촌 마을에서 본 방장산 전봉준 장군 생가에서 바라 본 고창읍 쪽 방장산. 전남 장성과 경계를 이룬다.
ⓒ 이영천
 
동학사는 태생지를 '동학군 대장 전봉준 등이 경성에 압송' 부분에서 짧게 언급한다.
 
전봉준 선생은 본래 전라도 고창현 덕정면 당촌 태생으로 세대 사림가(士林家) 사람이다. (동학사. 오지영. 문선각. 1973. p271)
  
▲ 태생지 전경 가옥이 사라진 텅비 태생지 터 뒤로 서해안 고속도로가 지난다.
ⓒ 이영천
 
태생지는 동학혁명이 끝나고 오랜 시간 밭이었다. 아버지 전창혁(全彰赫)의 서당 터는 물론 주변 야산에 천안전씨 묘소 몇 기가 있었다 하나, 관리 부실과 고속도로 공사로 사라지고 말았다.
 
▲ 전봉준 장군 태생지(2008)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전봉준 장군 태생지의 복원된 옛 가옥.
ⓒ 이영천
 
2천년대 초 태생지에 가옥을 복원했으나 고증이 부족했다는 비판에, 지금은 공터로 남았다. 낮은 표석과 신영복 선생님 글 '새야 새야 파랑새야'만이 외로이 서 있을 뿐이다. 동학혁명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처럼 말이다.
 
▲ 태생지 돌비석 고(故) 신영복 선생 글로 쓴 비석과 전봉준 장군 태생지.
ⓒ 이영천
 
태생지 설은 한동안 분분했었다. 고창의 한 역사학자 노력으로 천안전씨 족보가 공개되면서 이곳이 정설로 되었다. 1855년 12월 3일(음) 태어나 이곳에서 13살까지 살았다. 어린 시절 올라다니며 유년기를 보냈을 화시봉(火矢峰) 높은 봉우리를 조산(祖山)으로, 그 한 줄기가 흘러내려 마을 뒷산을 이룬다.

나지막한 안산(案山)과 마을 사이로 작은 개울이 흐르는 전형적인 촌락이다. 앞마을 덕정을 지나 고창읍 가는 길 왼편 신월마을은 우금티 전투 후 혁명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피신해 있던 곳이기도 하다.

마을 서쪽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창 고인돌 유적(지석묘군)'이 있다. 뒷산에 오르면 고창읍을 둘러싼 방장산 높은 봉우리가 시선을 가로막는다. 전남 장성과 경계를 이루는 방장산에서 입암산, 내장산으로 이어진 병풍처럼 둘러친 굵은 노령산맥 줄기가 아련하다. 선운사는 북서쪽 멀리 자리한다.

장군 탄생에 관련한 재미있는 설화 역시 동학사의 '동학군 대장 전봉준 등이 경성에 압송'에 실려있다.
 
전설에 그의 부친 전창혁이 일찍 흥덕(興德) 소요산(逍遙山) 암자에서 공부했는데, 어느 날 밤 소요산 만장봉(萬丈峰)이 목구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그 후 선생이 탄생하였는데, 용모가 출중하고 재주는 뛰어났으며 활달한 기상은 여러 사람에게 영향을 미쳤고 의롭지 못한 것을 보면 정의심이 불타올라, 마음속에 세상을 구하려는 뜻을 늘 품게 되었다. (동학사. 오지영. 문선각. 1973. p271~272 의역하여 인용)
  
▲ 선운사 계곡과 소요산  마애불이 있는 선운사 계곡. 사진 가운데 멀리 3각의 산이 소요산.
ⓒ 이영천
 
그런 영향인지 이곳 사람들은 태어나 말을 배우기 시작할 무렵 노래를 먼저 듣고 익힌다. 다름 아닌 '새야 새야 파랑새야'다. 이 서글픈 단조를 중얼거리듯 읊조리며 할머니들이 아이를 잠재우는 자장가로, 혹은 노동의 깊은 시름을 달래는 노랫가락으로 부르곤 했다. 어릴 적부터 이 노래를 듣고 자라서인지, 단조의 서글픈 가락이 전해주는 알 수 없는 힘을 의식의 가장 낮은 곳에 깔고 나도 살아왔음이 분명하다.

길을 나서며, 줄기차게 떠오르는 의문 하나가 있다. 다름 아닌 미디어나 통신이 발달하지 못한 그 시절, 전봉준은 정치·군사·행정은 물론 사상과 혁명가로서의 역량이 어디서 발현하였는가 하는 점이다. 동학 전적지를 찾아다니며, 소소한 실마리나마 찾아보려 한다. 아울러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끊임없는 물음을 던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1894년과 크게 다르지 않은 현재에게, 녹두의 시선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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