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의 비밀…‘어린 시민’과 도시 전략 짜는 빈

문정임 2023. 12. 15.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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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지속 가능 꿈꾸는 ‘아동친화도시’(상)]
도나우 타워에서 내려다 본 빈 시내와 오스트리아 국기.

2013년 서울 성북구가 우리나라 제1호 아동친화도시 인증을 받은 이후 현재 제주도를 비롯한 전국 119개 지방자치단체가 유니세프 한국위원회로부터 아동친화도시 인증을 받았거나 추진 중이다. 이는 우리나라 전체 시군구의 절반이 넘는 규모다. 많은 지역이 앞다퉈 아동친화도시 인증에 사활을 걸고 있다. 하지만 인증 기준이 제도 개선에 집중되면서 아이들의 일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최근에는 아이들이 자유롭게 이동하고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도시 공간 개선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는다. 이 과정에 아이들을 참여시켜 만족도 높은 아동친화도시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목소리도 제기된다. <편집자주>

매년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1위에 꼽히는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은 아이들에게도 살기 좋은 도시다. 아동 업무만 담당하는 전담 부서가 있는 것도 아닌데, 모든 정책에서 아동을 우선하며 오랫동안 아동친화도시를 만들어왔다.

빈의 아동 정책에서 특히 눈에 띄는 부분은 학대나 범죄와 같이 아이들에게 문제가 발생했을 때뿐만 아니라, 일상에서 아이들의 권리가 형평성 있게 보장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달 20일 빈 시청 집무실에서 만난 크리스토프 비더케르 부시장(사진)은 “빈이 매년 살기 좋은 도시로 선정되는 데에는 아동친화 정책이 분명 영향을 끼친다”며 “풍부한 녹지 공간과 누구에게나 충분히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빈 아동친화 정책의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이러한 정책이 오래 이어지면서 빈의 거리는 아이들이 놀고 즐기고 이동하는 공간으로 점점 활성화되고 있고, 아이들은 부모의 소득이나 가족 구조, 사회적 환경이 다르더라도 도시의 시설을 활용해 성장에 필요한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게 됐다”고 부연했다.

빈시의 아동 정책은 공원, 도로, 문화시설과 같은 도시의 자원을 아이들이 최대한 활용할 수 있도록 제공하는 데 초점 맞춰져 있다.

가장 큰 자랑은 녹지다. 빈시 총면적(414.9㎢)의 49%를 차지한다. 빈시에는 2022년 기준 1009개의 시립공원이 있고, 1718개의 놀이터가 있다. 시민의 70%가 집에서 250m 이내에 공공 녹지공간을 두고 있다.

모든 미술관과 박물관은 아이들에게 무료로 개방된다. 문화시설 이용의 턱을 없앤 것은 모든 아이들에게 예술적 성장의 기회를 제공하겠다는 의미다.

대중교통 비용도 저렴하다. 만 6세 이하 어린이는 무료이며, 만 15세 미만은 일요일과 공휴일, 방학 동안 대중교통 요금이 면제된다. 아이들의 자유로운 도시이동을 위해서다.

주말과 방학기간에는 학교 체육시설을 강제 개방한다. 이 같은 시의 방침으로 593개 학교 체육관과 130개 주요 운동장이 아이들의 활동 장소가 된다. 구마다 설치된 체육센터를 통해서도 사이클이나 빙상, 볼링, 등반, 조정, 스키 등 다양한 스포츠를 즐길 수 있다.

과거 오스트리아 제국의 여름 별궁이었던 쇤브룬궁전 인근 도로에 어린 아이들이 길을 건너고 있다. 빈에서는 모든 문화시설이 아이들에게 무료로 개방되기 때문에 견학에 나선 아이들 무리를 쉽게 볼 수 있다.


빈 시내 한 공원에 탁구대가 설치돼 있다. 그 뒤로 공원 인근 기술박물관으로 견학을 가는 아이들이 보인다.


배움의 기회는 학교를 통해서도 제공된다. 빈시는 위탁기관인 WienXTRA협회를 통해 아이들의 교과 외 활동을 지원한다. WienXTRA는 아이들에게 필요한 프로그램 강사를 소개하거나, 저렴한 가격에 이용할 수 있도록 비용을 조정하는 역할을 한다. 특히 빈에서는 언어를 매우 저렴한 가격에 배울 수 있다.

WienXTRA 책임자인 나다 타하 알리 모하메드(사진)씨는 “아이들은 고등학교만 졸업해도 평균 4개 언어를 배울 수 있을 만큼 다양한 언어를 습득하고, 스키와 같은 고비용 레저도 저렴한 가격에 이용한다”며 “빈시는 아이들에게 평등한 체험의 기회 주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전했다.

현재 빈시가 추진하는 아동 정책의 토대인 ‘2020~2025 아동·청소년 전략’에는 유엔 아동권리협약에 명시된 아동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시의 정책 목표가 분야별로 세부적이고 현실성 있게 제시돼 있다. 이는 빈시가 아동 정책을 누구의 시각에서 수립해 시행하는지 알게 한다.

예를 들어 ‘이동성’ 분야에서 빈시는 모든 어린이가 공공장소에서 안전하고 편안하게 느끼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점을 정책 목표로 설정했다. 이어 모든 형태의 폭력에 대항하기 위한 별도 계획을 수립한다고 명시했다. 별도 계획에는 경찰과 청소년의 대화 자리가 포함돼 있다.

이는 빈시가 ‘2020~2025 아동·청소년 전략’을 수립하기 전 가진 워크숍에서 아이들이 거리에서 만나는 경찰의 태도가 강압적이고 친절하지 않아 불편하다는 의견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공간과 장소’ 분야에는 더 ‘작고 구체적인’ 시행 계획이 담겨 있다. 빈시는 빈의 모든 어린이가 어른들만큼 도시의 모든 장소에서 중요하다고 기술하면서 아이들 집 주변에 놀이나 운동, 추위나 더위를 막기 위한 공간을 더 많이 만들고, 음수대와 물놀이시설을 추가로 지을 장소를 찾겠다는 내용이 있다. 아이들을 위한 공간 확충을 계획하면서 추위와 더위를 언급한 것에는 아이들은 어떤 날씨에도 활동적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건축물에 적용하는 녹화 계획을 확장해 주변 공공 공간을 시원하게 꾸리거나 햇볕을 막는 방안, 이를 위해 교육 및 주거용 건물 디자인에 아동과 청소년을 참여시키겠다는 계획도 담겼다. 과일 나무, 허브, 견과류 나무와 같이 먹을 수 있는 열매를 생산하는 나무를 공공 공간에 늘리겠다는 계획도 들어 있다. 더불어 빈시는 도시가 아이들에게 매력적인 공간이 되기 위해 물, 놀 공간, 깨끗한 공중 화장실을 충분히 설치해 나가기로 한다. 이 같은 빈시의 아동·청소년 전략은 ‘자연과 환경’ ‘기회와 미래’ ‘공간과 장소’ 등 총 9가지 분야로 짜여 있다.

도나우강 지류에 마련된 낙서 공간. 빈시는 아이들 낙서로 도시 미관을 해치는 사례가 반복되자, 도시 일부 구역에 합법적인 낙서 공간을 만들고 ‘Wiener Taube’(빈의 비둘기)라는 이름을 붙였다. 시내에 20곳이 넘는다.


이 표지판이 붙은 골목에는 해당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소유한 차량만 진입할 수 있다. 빈시는 도시의 아이들에게 놀이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여러 방식으로 차량 통행을 제한하는 정책을 펴고 있다. 빈에는 모두 3983개의 골목(gasse)이 있다.


빈시가 추진하는 '100만 유로 프로젝트'에서 아이들의 요청으로 지난해 설치된 클레멘스-크라우스 공원의 놀이 시설.


빈시의 아동 정책은 아이들의 요구를 반영하는 것을 넘어 아동과 청소년을 정책 결정에 참여시키는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다.

최근 가장 야심차게 추진하는 정책은 이른바 ‘100만 유로 프로젝트’다. 매년 시 예산 100만 유로(14억원)를 아이들이 결정한 사업에 투자한다. 아이들이 원하는 사업 아이디어를 공모한 뒤 온라인 투표를 시행해 선 순위를 정하면, 의회 승인을 거쳐 빈 시청에서 집행하는 방식이다. 빈에 거주하는 5~20세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첫해인 지난해에는 250개 아이디어가 수집돼 올해 20개 사업이 추진됐다. 이 사업을 통해 잔디밭만 있던 17구의 클레멘스-크라우스 공원에 새로운 놀이시설이 보강됐고, 이민자가 많은 21구에 청소년상담센터가 설립됐다. 올해는 지난달 15일까지 두 달간 공모를 진행해 총 226개 안을 접수받았다.

지난해 아이들은 도시에 대해 다양한 요구를 했다. 보드 타는 장소를 늘려달라는 의견이 가장 많았다. 놀이터를 만들어 달라, 놀이터 시설을 바꿔 달라, 공원에 과일나무를 심어 달라는 의견도 있었다.

일부 아이들은 차를 타지 않는 자신들이야말로 가장 친환경적인 시민 그룹이라고 주장하면서 친구와 나란히 걸을 수 있도록 보행로와 자전거도로를 넓히고, 인도 포장을 더 다채로운 색채와 형태로 만들어달라고 주문했다.

아이들은 모든 놀이터 장비가 정상적으로 작동해야 하고, 일년 내내 사용할 수 있어야 하며, 모든 연령대에 적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저녁에도 놀이터를 쓸 수 있도록 조명과 충전시설이 필요하다고도 했다. 거리 화장실이 더 깨끗해야 하고, 겨울철 음수대 수도가 잠겨 있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들어온 아이디어는 250개지만, 한 반이 합의해서 1개의 아이디어를 내기 때문에 실제로는 훨씬 많은 아동이 참여했다.

아이들은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나란히 걸을 수 있도록 자전거 도로와 보행로의 폭을 지금보다 더 넓혀 줄 것을 빈시에 요구했다.


트램에 설치된 유모차 고정 줄.


빈시가 정책 결정 과정에 아이들을 참여시키는 것은 이들의 시각에서 정책을 발굴할 때 보다 만족도 높은 아동친화도시를 구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도시의 무엇을 바꿀까 생각하는 과정에서 지역에 더 깊은 애정을 갖게 된다. 자기 생각을 전달하고 협의하는 과정에서 민주주의 시민으로 성장한다. 빈시는 아동 참여를 지속적으로 이끌기 위해 12가지 회의 진행 원칙을 담은 가이드북을 발간하기도 했다.

궁극적으로 빈시가 아동 정책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모든 아이에게 동등한 성장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것은 공원이나 안전과 같은 도시의 유·무형 자원이기도 하고, 스키·외국어와 같은 교육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도시를 자유롭게 이동하고, 도시의 우수한 문화를 접하는 기회도 여기에 포함된다. 이 과정에서 빈시는 아이들을 참여시키는 방식으로 도시를 아이들의 요구에 맞게 계속 변화시키고 있다.

빈=글·사진 문정임 기자 moon1125@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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