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세계 교회 역사] 남김 없이, 후퇴 없이, 후회 없이

신상목 2023. 12. 10.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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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죄부를 판매했던 교황 그리고 마르틴 루터

1475년 12월 11일 교황 레오 10세가 될 조반니 디 로렌초 데 메디치가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그는 성 베드로 대성당 재건을 위해 면죄부를 판매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면죄부 판매는 마르틴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성(城)교회 문에 게시하면서 항의했던 내용으로 종교개혁을 촉발시켰다. 면죄부를 둘러싼 당시 로마가톨릭과 루터의 논쟁은 1521년 루터가 교황에 의해 파문당하면서 절정에 달했고, 개신교 종교개혁의 서막을 열었다. 레오 교황은 그해 말 사망했다.
교황 레오 10세 초상화.

레오 10세는 이탈리아 피렌체 공화국의 실질적인 통치자인 로렌초 데 메디치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역대 교황 중 가장 사치스러웠던 인물로 교황청에 많은 빚을 남겨 후임 교황들을 힘들게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가톨릭 역사가 루트비히 폰 파스토어는 “자신의 고귀한 직책의 임무에 대해 이해가 없는 사람이 교황 자리에 오른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교회에게 내린 모진 시험 중 하나였다”고 평했다. 19세기 영국의 역사학자 토머스 칼라일은 그의 대표작 ‘영웅숭배론’에서 면죄부를 판매한 레오 10세에 대해 “그리스도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교도였다”고 평가했다.

레오 10세는 당시 그의 전임자가 시작한 계획, 곧 새로운 성베드로 대성당 건축을 완공하기 위한 자금이 필요했다. 그런 가운데 독일의 마인츠 대주교를 노리고 있었던 브란덴부르크의 알브레히트는 독일 수좌 대주교가 되려면 많은 돈을 내놓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더구나 교황권을 놓고 서로 적대적 관계에 있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콧대를 꺾으려면 교황에게 더 많은 돈을 내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알브레히트는 독일의 성직계와 세속계를 장악하려는 호앤촐레른 가문 출신이었다.

알브레히트와 교황과의 협상은 독일에서 교황의 재정을 독점하고 있던 은행 가문인 푸거가를 통해 진행됐다. 교회는 세입이 들어오기 전 자금이 필요할 경우 푸거가에서 엄청난 이자로 빌려 썼다. 이 빚을 갚기 위해 면죄부가 발급됐으며 푸거가에서는 이 수금을 담당했다. 교황은 알브레히트의 관구에서 8년간 면죄를 베푸는 특권을 허락했다.

하지만 이런 면죄가 루터의 교구에서는 제공되지 못했다. 세속 당국자의 동의 없이는 교회가 면죄를 끌어들일 수 없었으며 작센의 선제후이자 현인이었던 프리드리히는 성베드로 대성당 건축을 위한 면죄 때문에 비텐베르크의 만성절에 베풀어지는 갖가지 면죄가 손해 보는 것을 원치 않았다.

당시 기독교 세계 교회 가운데는 면죄를 베푸는 특권을 교황으로부터 위임받은 곳이 많았다. 그 가운데 비텐베르크의 성(城)교회는 모든 죄를 완전히 사면하는 아주 예외적인 특권을 받은 교회였다. 고백의 날로 선정된 때가 11월 1일이었다. 이날은 만성절로서 성인들의 공로가 곧 면죄의 바탕이었으며 그들의 유골과 유품이 전시됐다.

프리드리히는 비텐베르크를 성보(聖寶)의 한 저장소라 여기고 독일의 로마로 만드는 데 일생을 바쳤다. 프리드리히는 성물 조각의 수집에 정성을 기울여 1509년 당시 집계한 목록에 보면 5005개였다. 이 조각들에 딸린 면죄 연한은 죽은 자들의 연옥 생활을 1443년 감해줄 수 있었다. 그리스도의 이마를 찔렀던 것으로 판명됐다는 가시면류관 가시 하나를 비롯해 히에로니무스의 이가 하나, 크리소스토무스의 이가 넷,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의 머리카락 넷, 예수님의 수염 한 가닥, 모세의 가시덤불 같은 것들이었다.

비텐베르크대 신학 교수이자 교구 신부였던 루터는 이 면죄를 설교에서 비판했다. 만성절 전야인 핼러윈(10월 31일) 설교에서 그는 “교황이 사람들을 연옥에서 구출한다는 주장은 오만불손한 일이다. 만약 정말 그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들 모두를 구출하지 않는 그의 처사는 잔인하다”고 비판했다.

당시 가톨릭교회에서 면죄는 성인들의 공로를 분배할 뿐 아니라 세입도 늘어나는 일종의 로또였다. 이 제도는 십자군 원정을 통해 발전됐다. 성지 탈환 전쟁에 직접 참여할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헌금을 통해 원정에 참여하도록 확대됐다. 이를 통해 삽시간에 교회, 수도원, 병원 건축비가 충당되었고 고딕 양식 대성당들은 이런 식으로 마련된 자금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비텐베르크에서 발급된 면죄부는 성교회와 그곳 대학의 재정을 뒷받침했다. 루터의 공격은 자신이 속한 기관의 주 수입원을 비판하는 셈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기 교구민의 영원한 복지를 담당하는 사람으로서 자기 양떼들에게 영적 함정을 경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황 레오 10세는 면죄부 판매 지시 사항에서 “(면죄부를 구입하면) 유아 세례를 받을 때 누리던 순진한 상태로 되돌아갈 것이며 하늘의 왕께 누를 끼침으로써 저지를 죄를 포함해 연옥의 모든 고통을 면죄받기로 돼 있다. 이미 연옥에 가 있는 사람들 몫으로 면죄부를 확보하는 사람들은 뉘우치거나 죄를 고해할 필요가 없다”고 밝혔다. 또 십자군에게 모든 죄에 대한 완전 감면과 지존자와의 화해를 약속한 바 있었다. 알브레히트도 연옥의 사자들을 대신해 면죄부를 사는 사람들에게는 참된 회개가 필요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당시 면죄부 가격은 계급별로 구분돼 있었다. 왕, 왕후, 대주교, 주교, 제후들은 25개 플로린(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주조된 유럽 기축통화 역할을 했던 금화)이었고 수도원장, 성당 고위 성직자, 백작, 남작, 고위 귀족은 20개, 다른 성직자와 하위 귀족은 6개, 시민과 상인들은 3개, 그 이하 계급은 1개였다.

면죄부 판매는 도미니쿠스 수도회 수도사인 존 테첼에게 맡겨졌다. 그는 면죄부를 팔기 위해 온갖 감언이설로 선전했는데 면죄부에 대해서는 “죄인들을 세례보다도 더 깨끗하게 만들며, 타락 이전의 아담보다 더 순결하게 만들 뿐 아니라, 면죄부를 판매하는 자의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만큼 효력이 있다”고 했다. 이미 사망한 가족이나 친구를 위해서는 “동전이 헌금 궤짝 속에 짤랑 하고 떨어지는 순간 그들 영혼은 연옥에서 화살처럼 튀어오릅니다. 신령하고 불멸하는 한 사람의 영혼을 고향 낙원으로 보내는 데 단돈 4분의 1플로린입니다” 라며 떠벌였다.

마르틴 루터 초상화 모습.

루터는 95개 논제 중 성베드로 대성당 건축과 관련해 비용 목적에 대한 반대, 교황에게 연옥을 지배하는 권세가 없다는 것, 죄인의 복지에 대한 관심을 논했다. 논조는 거침이 없었고 명쾌했다.

“교황은 모든 교회에 면죄를 허락하는 것보다 한 교회에라도 선한 목자를 임명해야 옳습니다. 왜 교황은 자기 돈으로 성베드로 대성당을 세우지 않는 건가요? 그는 차라리 성베드로 대성당을 팔아서 면죄부 상인들에 의해 가죽이 벗겨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편이 더 나을 것입니다.”

“교황에게 아무나 연옥에서 구출해 낼 권세가 있다면 모조리 다 꺼내 버리고 그 연옥을 폐쇄해 버리는 것이 사랑의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숱한 사람을 치사하게 돈을 받고 끄집어낸다고 하다니, 더없이 거룩한 사랑으로 그곳을 텅 비게 하지 못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요.”

“언제 그리스도께서 ‘겉옷 가진 자는 그걸 팔아 면죄부를 사거라’ 하고 말씀하셨던가요.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으며 예루살렘과 로마의 모든 사면보다 더 귀합니다. 면죄가 더없이 치명적인 해독을 끼치는 것은 그것을 통해서 자만이 생기기 쉽고 그렇게 함으로써 구원이 위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면죄부만 손에 쥐고 있으면 확실히 구원받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처럼 저주받은 자들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에 각성했고 너도나도 발 벗고 일어났다. 그가 속한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수도사들이 동조했고 젊은 층은 루터를 적극 지지했다. 그들은 95개조 반박문을 독일어로 번역했고 출판했다. 이 내용은 삽시간에 독일의 화젯거리로 번졌다.

레오 10세는 이 논제를 듣자 “루터는 술 취한 독일인이다. 술이 깨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탁발 수도사 마르틴은 훌륭한 녀석이다. 이 모든 법석은 수사들의 시기 때문”이라고 얘기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루터는 로마 당국과의 논쟁을 이어오다 1520년 6월 15일 ‘엑수르게 도미네’라는 교황의 교서가 내려오면서 파문을 경고받는다.

교서에서 레오 10세는 “일어나소서. 주여, 당신의 소송 사건을 심판하소서. 한 마리의 멧돼지가 당신의 포도원에 침입했나이다”로 시작한다. 이어 “짐의 목회 직분에 비추어 볼 때 다음 41개 오류의 지독한 병균은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도다. 이 뱀이 주의 포도원을 비집고 기어다니는 것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도다. 오류가 담긴 루터의 책들을 검토해서 불사르겠노라”고 밝혔다.

루터는 이 교서에 대해 ‘적그리스도의 저주스러운 교서 반박’이란 제목으로 답장을 썼다. 루터는 “누가 이 교서를 썼든 그 사람은 적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 우리 주 예수, 그의 거룩한 천사들 그리고 온 세상 앞에 단호히 외치거니와 저는 전적으로 이 교서의 정죄에 반대하며, 이것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우리의 주 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성모독으로 자신 있게 저주하는 바입니다. 이것을 내 취소로 받으라. 오 너 황소들의 딸인 교서여”라고 비판했다.

교황의 최후 통첩 기간인 60일이 되는 즈음 루터의 책은 쾰른에서 불살라졌고 이에 대응해 루터와 친구 멜란히톤은 비텐베르크대 교수와 학생을 초청해놓고 교황의 명령과 교회법, 스콜라철학의 작품, 그리고 교황의 교서를 불태워버렸다.

루터는 이 행동이 공적으로 정당하다고 밝혔다. “그들이 내 책을 불태웠으니 나도 그들의 책을 태운 것이다. 적그리스도가 정죄한 나의 신조는 모두 기독교적이다. 교황이 성경과 이성으로 누구를 압도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결국 루터는 1521년 1월 3일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받고 추방됐다. 이어 3월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는 보름스에서 제국의회를 소집하고 루터를 소환해 그의 견해를 심의했다. 의회는 루터에게 주장을 철회할 것을 요구했으나 루터는 이를 거부하고 제국에서도 추방당했다. 그는 황제 및 제국 영주들 앞에서 라틴어가 아닌 독일어로 이렇게 말했다.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사로잡힌 바 되었습니다. 나는 철회할 수도 없으며 철회하지도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양심에 불복하는 것은 옳은 것도 안전한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아멘.”

이후 9개월 동안 그는 선제후 프리드리히의 보호 아래 바르트부르크성에서 숨어 지내면서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했는데, 이로써 그는 성경의 대중화뿐 아니라 독일어 통일에까지 지대한 공헌을 했다.

루터는 로마가톨릭 교회 당국과의 논쟁 속에서 개혁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특히 그의 소책자들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선행에 관한 설교’ ‘로마의 교황 제도’를 비롯해 ‘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고함’ ‘교회의 바벨론 유수’ ‘그리스도인의 자유’ 등 3가지 소책자는 구체적인 개혁안을 담고 있었다. 7성사 중 성찬과 세례만 남겼으며 모든 성도가 잔을 받도록 했다. 가톨릭의 화체설 자체는 부인했으며 이른바 공재설로 불리는, ‘그리스도의 몸이 떡과 포도주 속에서 함께, 아래와 주위에, 그리고 위에 임재한다”고 말했다.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의 헬라어 신약성경 번역을 통해 마태복음 4장 17절 말씀의 원래 의미가 (사제에게) ‘고해하라’가 아니라 ‘회개하라’라는 것을 인정하고 채택한다. 모든 신자가 사제임을 강조했다.

지구상 마지막 제국을 무너뜨린 작가
1918년 12월 11일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암병동’ ‘수용소군도’ 등을 남긴 러시아 작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 정교회 신자로 태어났다. 미국 크리스채너티투데이는 “그의 저서는 많은 학자로부터 ‘지구상의 마지막 제국을 무너뜨리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고 기록했다.

솔제니친은 1945년 포병 대위로 근무하던 중 개인 편지에 스탈린을 비판한 글을 쓴 것이 문제가 돼 체포당한 뒤 강제노동수용소 8년(1945∼1953), 추방 3년형을 선고받았다. 유형 생활을 마치고 1957년 복권된 그는 랴잔시에서 중학교 교사로 봉직하면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발표해 세계적인 작가가 됐다.

이 작품은 평범한 농민 슈호프를 주인공으로 교정수용소(라겔)의 가혹한 현실과 함께, 그곳에서도 사라지지 않았던 인간애에 초점을 맞추어 담담하게 그려냈다. 작품은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전통을 이었고, 제재의 특이성을 초월해 당시 소련 사회뿐 아니라 현대의 상황을 예술적으로 고발한 명작으로 평가받았다.

1963년 발표한 ‘크레체토프카역에서 생긴 일’ ‘마트료나의 집’ ‘공공을 위해서는’ 등의 세 단편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얼마 후 그의 반체제 비판의 경향이 당국의 눈에 거슬려 작품 발표의 기회가 막혔다. 이 조치에 항의해 그는 1967년 소련작가대회에 ‘검열폐지’를 호소하는 편지를 보내 큰 반향을 일으켰다. 또 본국에서 발표하지 못한 작품이 해외에서 잇달아 간행됐고 이를 이유로 1969년 작가동맹에서 제명당했다.

구 소련 사회의 스탈린 시대부터의 탈피를 회복기 환자의 생생한 삶의 감각과 중복해 그린 ‘암병동’, 풍자와 알레고리를 구사한 정치적 장편 ‘연옥 속에서’ 등도 당국의 탄압으로 국외에서 출판됐다. 하지만 솔제니친은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강제노동수용소의 내막을 폭로한 ‘수용소군도’의 국외 출판을 계기로 1974년 2월 강제추방을 당해 미국 버몬트주 카벤디시에서 살다가 소련 붕괴 후인 1994년, 20년간의 망명생활을 마치고 러시아 시민권을 회복했다.

‘수용소군도’는 지난 100년의 러시아 역사 중에서 가장 잔혹하고 충격적인 부분을 낱낱이 드러낸 책이다. 결국 이 책으로 인해 소비에트 정권의 비도덕적 실상이 내·외부에 알려지고 그것이 체제 붕괴로까지 이어졌다.

솔제니친은 이후에도 서방 물질주의를 비판하면서 조국 러시아의 부활을 위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으며 2007년 6월 러시아는 그에게 예술가들의 최고 명예상인 국가공로상을 수여했다. 1970년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암병동’ 등 작품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으며 2008년 8월 3일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기독교인 박해의 대명사
37년 12월 13일 초기 기독교인들을 박해했던 로마 황제 네로가 태어났다. 54년 10월 로마 황제가 된 네로는 처음에는 이성적인 통치자였으며 가난한 이들을 위한 법령을 마련, 로마시민들에게 상당한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점차 과대망상과 쾌락을 추구하기 시작해 자기 비위에 맞는 인사들로 황궁을 채웠다. 재위 10년에 그는 국민들의 멸시를 받았다. 시인과 예술가들은 자신을 예술인이라고 자처한 네로를 혐오했다. 그가 미쳤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고 AD 64년 6월 18일 로마에 대화재가 발생했다. 그런 가운데 미친 황제가 불을 지르라고 명령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화재는 일주일간 이어졌고 불길이 잡힌 이후에도 사흘을 더 타 14구역 중 10구역이 소실됐다.

황제를 향한 소문 속에는 화재가 계속되는 동안 네로가 배우처럼 분장하고 궁정의 첨탑 위에서 칠현금을 뜯으며 트로이의 파괴를 노래했다는 얘기도 돌았다. 그가 시인으로서 영감을 얻기 위해 방화했다는 것이다. 네로는 이런 괴소문을 화재를 피한 두 구역에 살던 유대인과 기독교인에게 돌렸다. 네로는 기독교인들에게 방화 혐의를 뒤집어씌웠다.

로마제국 역사가 타키투스는 그의 ‘연대기’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황제가 화재를 명령했다는 의심은 그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 소문을 없애기 위해 네로는 배덕 행위로 시민들의 증오를 받고 있던 기독교 신자들에게 혐의를 씌워 처벌하기로 결정했다. 이들이 따르는 소위 그리스도는 티베리우스 황제 때에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 처형된 인물이다. 이 미신은 한동안 주춤했으나 곧 그 악의 발원지인 유대뿐 아니라 세계의 모든 사교들이 모여들었던 로마에 다시 출현했다. 그리하여 스스로 기독교인임을 고백한 자들이 체포됐고 그들의 증언에 따라 더 많은 신자들이 정죄 되었다. 그 이유는 화재 자체 때문이라기보다 그들이 인류를 증오했기 때문이다.”

타키투스는 기독교인들의 방화를 믿지 않았지만 당대의 이른바 교양 있는 로마인들이 기독교인에 대해 가졌던 소문은 믿었다. 실제로 당시 로마의 극장, 군대, 고전문학, 운동경기 등 모든 사회 활동은 이교의 우상숭배와 밀접하게 관련돼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 기독교인은 참여하지 않았다.

타키투스는 기독교인을 박해한 네로의 조치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네로는 기독교인들을 죽이기 전에 시민들을 위한 오락에 이용했다. 일부 신자들에게 털옷을 덮어씌워 개들이 찢어 죽이게 했고 또 다른 신자들은 십자가형에 처했다. 또 다른 신자들을 불태워 밤에 등불처럼 밝히게 했다. 네로는 자기의 정원을 열어 이러한 쇼를 연출했고 그는 원형 경기장에서 마치 전차 경주자처럼 옷을 입고 전차를 타고 돌아다녔다. 이 때문에 시민들은 벌을 받아 마땅한 이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기도 했다. 왜냐하면 이들은 일반인들의 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한 인간의 잔인성을 만족시키기 위해 죽어갔기 때문이다.”

네로의 박해로 순교한 이들 중엔 베드로와 바울이 포함돼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교회사가인 후스토 곤잘레스는 말한다. 폴란드에 최초의 노벨문학상을 안긴 헨릭 시엔키에비츠의 소설 ‘쿠오 바디스’는 네로 시대 말기인 AD 63~68년 로마를 배경으로 한다. 타키투스의 기록을 참고해 당시 로마의 대화재와 기독교인 박해의 실상을 실감나게 그려낸다. 구시대 로마의 세계관과 신흥 종교 사상인 기독교 사이의 갈등과 대립, 그리고 그 변화 양상이 두 주인공 비니키우스와 리기아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역사적 플롯의 핵심을 이루는 두 가지 사건인 ‘로마의 대화재’와 ‘기독교인의 수난’을 상세히 다루면서 타락한 로마 사회에 대한 기독교 신앙의 도덕적 승리를 역설한다.

네로는 68년 로마 원로원의 지원을 받은 반란에 의해 퇴위돼 자살했다. 네로가 기독교인을 대상으로 마련한 법령들은 취소되지 않았으나 박해는 중지됐다. 네로가 자살한 후 많은 사람이 그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고, 동부 지방 곳곳에 거짓 네로가 등장했다. AD 69년은 ‘네 황제의 해’로 불린다. 베스파시아누스와 아들 티투스가 정권을 잡으며 기독교인들은 잠시 평화를 누렸다.

네로는 요한계시록 13장 18절에 나오는 ‘666’을 가리키기도 한다. 많은 주석가들은 글자에 숫자의 값을 할당하는 체계인 ‘게마트리아’라는 고대 관행이 적용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이 숫자는 ‘네로 카이사르’를 가리킬 수 있는데 이 이름을 히브리어 알파벳으로 표기할 경우 그 합이 육백육십육이 되기 때문이다. 18절 본문은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것은 사람의 수니 그의 수는 육백육십육이니라”라고 돼 있다. 신학자들은 대체로 666을 네로 또는 사도 요한 당시 기독교를 박해하던 로마 제국을 상징하는 숫자로 해석하고 있으며 말세에 교회와 성도를 박해하는 적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숫자로도 해석한다.

가톨릭의 반종교개혁
1545년 12월 13일 이탈리아 북부 트리엔트에서 종교회의가 개최됐다. 종교개혁에 따른 교회 분열을 수습하고 로마가톨릭의 교리와 체계를 재정비하기 위한 회의였다. 회의는 개신교의 확산과 로마가톨릭 교회 내 도덕적, 행정적 개혁의 필요성에 따라 1563년까지 18년간 수시로 모임을 가졌다. ‘반종교개혁’을 목적으로 모인 회의였지만 개신교도나 가톨릭 신자들을 만족시킬 만큼 포괄적이지는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공의회에서는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가들이 제기했던 여러 문제에 대해 가톨릭의 교리를 정의했으며, 교회의 규율과 제도 개혁을 결정했다. 교황 비오 4세는 1564년 1월 26일 공의회에서 결정한 내용을 승인하는 교황 칙서를 발표해 ‘트리엔트 신앙고백’이라는 교리요약집을 배포했다.

공의회는 성경만이 신앙의 유일한 원천이라는 마르틴 루터의 주장을 배격하고 그가 번역한 성경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라틴어 성서인 불가타(vulgata)를 공식적인 성서로 선포했으며, 성경과 전통 모두를 신앙의 원천으로 확인했다. 성서의 해석은 교회만이 권위를 가진다는 것을 명백히 밝혀 교황의 권위와 성직계서제를 재확인했다.

예정설과 믿음에 의한 면죄설도 배격,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신앙과 더불어 선행이 필수적임을 강조했다. 면죄는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이루어지며 그 은총은 성사를 통해 인간들에게 내려온다고 명시해, 성사를 집행하는 사제(성직자)를 일반 평신도들과 엄격히 구분했다. 7성사는 불가결한 것으로 존속되었으며 평신도들이 빵과 포도주를 모두 받는 2종 성찬은 불필요하다고 규정했다. 성인의 통공, 성인 유해의 공경, 연옥, 성화상의 사용, 교구 신학교 설립, 주교 임명, 강론 등에 대한 교령도 반포됐다.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복음서의 진리를 설교하고 가르치는 일은 반드시 주교의 권위 아래에서 행해져야 했으며, 주교와 사제는 그들 각각의 주교관구와 교구 안에 거주해야만 했다.

공의회 이후 가톨릭교회는 로욜라가 결성한 예수회의 확장과 더불어 개신교의 진출을 차단하면서 가톨릭 신앙을 다시 일으킬 수 있었다. 공의회는 반종교개혁의 성과는 거두었지만 개신교와의 분열을 더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트리엔트공의회 회의 모습.
우리 모두에게 ‘영혼의 어두운 밤’은 있다
1591년 12월 14일 스페인의 시인 십자가의 요한(Saint John of the Cross)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유명한 신비주의자이며, 로마 가톨릭 성인, 카르멜회의 수사이자 사제였다. 요한의 시와 영혼의 성장에 관한 연구물은 스페인 문학 및 신비주의 문학의 정점으로 간주된다. 그의 ‘영혼의 어두운 밤’은 당대 가장 잘 알려진 기독교 시 중 하나이며, 그의 논문은 로마가톨릭과 개신교 사상 모두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영혼의 어두운 밤이란 영적 성숙의 단계에서 오는 증상을 말한다. 하나님이 영혼을 성장시키기 위해 사용하시는 수단이라는 것이다. 요한은 신자들이 통과하는 어두운 밤을 두 가지로 묘사한다. 하나는 감각(신체)의 어두운 밤이고 다른 하나는 정신의 어두운 밤이다. 요한은 이 어두운 밤을 깊은 묵상으로 인도하려는 하나님의 조치라고 본다. 우리는 인내하고 불안을 회피하고 평화로운 집중 속에서 하나님을 생각함으로써 이 어두운 밤에 대응한다. 요한은 이 어두운 밤을 오히려 행복한 밤이라 생각해야 한다면서 우리 자신과 우리의 비참에 대한 인식이 깊어지고 하나님의 위대함을 새롭게 인식함으로써 이전보다 더 큰 존경과 존중으로 하나님을 대할 수 있다고 말한다.

대각성 운동의 부흥사 겸 전도자
1714년 12월 16일 미국 대각성 운동의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인 부흥사 겸 전도자 조지 휫필드가 영국 글로스터에서 태어났다. 옥스퍼드대 재직 중에 존 웨슬리와 찰스 웨슬리 형제의 친구가 되어 함께 활동해 감리교 초기 전도자로 간주되기도 한다.

웨슬리 형제보다 더 엄격한 칼뱅주의자였던 그는 설교자로서의 천부적인 자질에 따라 18세기 영·미의 기독교 의식을 깨우쳐 주었다. 특히 미국에서는 조합교회파 장로교 재세례파 등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고, 펜실베이니아대와 프린스턴대 등 50개 대학의 기초를 만들었다.

1733년 옥스퍼드대에 입학한 휫필드는 재학 중이던 1735년 웨슬리와 감리교 운동의 모태라 할 수 있는 ‘홀리 클럽’(Holy Club)에서 활동했고 이 시기 중병에서 회복되는 신비한 체험으로 회심했다. 1736년 졸업과 함께 안수를 받고 22세에 설교자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당시 그는 감성적이며 호소력 있는 설교로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했는데, 당대에 그의 설교를 따를 자가 없었다고 할 만큼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한다. 조지아와 잉글랜드에서 성공적으로 사역을 했고 특히 영국의 공업도시인 브리스톨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휫필드와 웨슬리는 한동안 함께 사역을 했으나 신학적 차이로 갈라졌다. 두 사람 모두 대부분 인식은 칼뱅주의자였지만 예정과 자유의지 등의 신학적 이슈에서는 의견을 달리 했다. 휫필드는 헌팅던 백작부인의 도움을 받아 ‘칼뱅주의 감리교회(Calvinist Methodist Church)를 조직했으며 그 중심지는 영국의 웨일스였다.

그는 영국보다 미국에서 많은 활동을 펼쳤다. 1740년에는 2년간 머물며 미국의 영국 식민도시에서 설교하며 복음을 전해 뉴잉글랜드에서 일어난 제1차 대각성운동에 크게 기여했다. 그의 설교는 많은 회심의 경험들과 회개, 기쁨의 외적 표현들을 낳았다. 조너선 에드워즈는 휫필드를 자신의 교회에 초청해 설교하도록 했고 에드워즈는 그의 설교를 들으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 시기 그는 조지아에 보육원을 설립해 고아 구제 사업에도 힘썼다. 1742년 웨일스 지방에서 엘리사벳과 혼인하여 가정을 이룬 후 스코틀랜드(1742년), 영국 웨일스를 순회 방문하고 다시 1765년까지 무려 5회에 걸쳐 미국을 방문, 순회 설교했다. 1770년 9월 30일 매사추세츠주 뉴베리포트에서 과로로 별세했다. 영국의 시인 윌리엄 쿠퍼는 휫필드를 가리켜 ‘사도적 자비심과 복음의 열정에 있어 제2의 바울과 같은 사람’이라 칭찬했다.

남김없이, 후퇴 없이, 후회 없이
1912년 12월 17일 부동산과 우유 생산으로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은 미국 시카고 출신 윌리엄 와이팅 보든(1887~1913)이 중국 선교를 위해 이집트행 배에 올랐다. 미국 낙농회사의 백만장자인 보든 가의 상속자였던 그는 고등학교 때 예수님을 만나 구주로 영접했다. 부모님의 졸업 선물로 전 세계를 여행하는 중 그리스도 없이 사는 사람들의 고통하는 모습을 보고 세계 선교를 위해 자신을 예수님께 드리고자 결단했다.

예일대와 프린스턴신학교를 졸업했지만 학위와 억만장자의 길도 포기하고 자신의 삶을 세계 복음화를 위해 바쳤다. 그는 세계 선교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 앞에 중국 간쑤성 무슬림에게 복음을 전하기로 했다. 그에 앞서 아랍어를 배우고 이슬람 문화를 배우기 위해 이집트에 갔던 그는 도착한 지 한 달 만에 척추수막염에 걸려 25세의 나이로 사망해 카이로에 묻혔다.

그의 이야기는 당시 미국의 거의 모든 신문에 보도돼 그리스도를 위한 증거가 됐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무의미한 낭비’로 비쳐질 수도 있는 그의 죽음은 영원한 가치를 따라서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그 세대에 전했다. 그는 예일대 시절 성경공부 모임을 주도했는데 자신의 일기장에 좌우명으로 “늘 자신을 부인하고 예수님께 순종하리라”(Say no to self and yes to Jesus every time)라고 썼다. 대학 시절엔 뉴헤이븐 거리를 방황하는 노숙자들을 도왔고, 알코올 중독자들의 갱생을 돕는 예일 호프 미션이란 단체도 세웠다.

보든은 자신의 성경책에 쓴 세 개의 문장으로도 유명하다. ‘남김없이’(No Reserves) ‘후퇴 없이’(No Retreats) ‘후회 없이(No Regrets)로 그가 세상을 떠난 후 발견됐다. 허드슨 테일러의 며느리였던 하워드 테일러 여사는 그의 삶을 기록한 책에서 “윌리엄 보든의 인생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그가 졸업한 예일대학의 수많은 후배들이 보든의 뒤를 이어 선교사로 지망했고, 오늘날 중국의 란초우에 가면 윌리엄 보든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거기에 병원을 세웠고 중국의 무슬림들이 그 병원을 통해 주님께로 돌아오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이집트에 있는 그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고 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
그는 일어나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으며,
형제 사랑에 대한 특별한 마음을 품고,
주님을 섬기는 마음속에 열정이 불타오르며,
소망으로 기뻐하며,
고난을 인내하며,
기도에 힘쓰며,
성도와 교통하며,
다른 이들을 공경한 그의 삶은
주님 안에서의 믿음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참고 도서>
‘마르틴 루터’ 롤런드 H. 베인턴 지음/이종태 옮김/생명의말씀사
‘초대교회사’ 후스토 L 곤잘레스 지음/엄성옥 옮김/은성
‘교회용어사전’ 가스펠서브 기획, 편저/생명의말씀사
‘쿠오 바디스2’ 헨릭 시엔키에비츠 지음/최성은 옮김/민음사
‘남김없이 후퇴없이 후회없이’ 하워드 테일러 지음/이용복 옮김/규장
‘영혼의 어두운 밤’ 주명수 지음/CLC
‘성경신학 스터디 바이블’ 책임편집 DA 카슨/복있는사람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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