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사회가 키운 야쿠자의 '흥망성쇠'

이준목 2023. 12. 6.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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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tvN <벌거벗은 세계사>

[이준목 기자]

'야쿠자(ヤクザ/ Yakuza)'는 중국의 삼합회, 이탈리아 마피아와 함께 세계 3대 범죄조직으로 꼽힌다. 야쿠자는 일본판 마피아(Japanese Mafia)라고 할만큼 그 역사와 영향력이 깊으며, 오늘날까지 일본의 사회적 문제중 하나로 자리잡은지 오래다.

이웃인 우리 나라도 조직폭력배들이 야쿠자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경우가 많다. 거대화되고 기업화된 범죄조직들의 힘이 통제하기 어려울만큼 막강해지면, 그 사회의 질서는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12월 5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 128회에서는 '야쿠자는 어떻게 일본 사회를 좀먹었나'편을 통하여 야쿠자의 변천사로 바라본 일본의 근현대사를 조명했다.박삼헌 건국대학교 일어교육과 교수가 이날의 강연자로 나섰다.

야쿠자의 기원은 에도 막부 시대(1603-1868)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국시대가 끝나면서 갈 곳을 잃은 하급 사무라이(무사)들은 순식간에 쓸모없는 자원으로 전락했다. 이들은 칼을 차고 마을의 질서를 유지해주던 조건으로 생계를 유지한 것이, 오늘날 야쿠자의 첫 시초 격에 해당한다.

야쿠자라는 이름의 유래에는 많은 설이 있지만, 그 중에서는 일본의 전통 도박인 '산마이카루타'에서 필패수를 의미한 '8·9·3 조합'을 뜻하는 야쿠산(やくざ, 쓸모없는 존재)라는 단어에서 변형되어 '인생을 무모한 도박처럼 살아가는 무쓸모한 인간'이라는 의미의 야쿠자로 굳어졌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한국의 조직폭력배들이 자신을 조폭이나 깡패로 부르는 것을 싫어하듯, 야쿠자들도 본인을 야쿠자라고 지칭하는 것은 금기시된다.

19세기들어 메이지 유신(明治維新)과 함께 본격적인 현대화된 야쿠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해외와의 교역이 활발한 항구도시를 중심으로 항만 노동자 조합들이 결성되고, 조합간의 이권 다툼이 빈번해지면서 폭력을 구사하는 조직으로 변질되어갔다. 체면이나 자존심을 의미하는 가오(顔,かお)라는 말로 야쿠자에게서 유래했다.

조합들이 이합집산하며 조직화,거대화한 야쿠자 조직들은 노동자들의 임금을 갈취하거나 불법 도박장을 운영하며 세력을 키웠다. 이렇게 탄생한 '야마구치파'는 오늘날까지도 일본을 대표하는 야쿠자 조직으로 연간 수익만 66억 달러에 이르는 막강한 자본력을 지닌 범죄집단으로 성장했다.

야쿠자의 조직 문화는 가족적인 관계를 강조하며 국내에서도 일본어의 잔재로 알려진 '오야붕(부모)-꼬붕(자식)'이라는 호칭 역시 여기에서 유래했다. 야쿠자에 가입한 이들이 조직원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보증인이 있어야하며 회사 연습생처럼 일정한 수련 기간을 필수적으로 거쳐야했다.

조직원으로 인정받은 이들은 '사카즈키 의식'이라는 행사를 통하여 두목과 부하들이 술을 함께 나누며 혈연관계 이상의 깊은 관계가 형성되었다는 서약의 의미를 가진다. 또한 조직원들은 야쿠자를 상징하는 '이레즈미'라는 문신을 전신에 새기며 조직에 대한 충성과 인내심을 증명하는 과정을 거친다. 피라미드화된 야쿠자 조직들은 명백한 상하관계 속에 상부의 두목에 상납금을 조공하며 자신의 지위를 인정받고, 다른 야쿠자들과 세력권(나와바리,なわばり)을 놓고 이권 다툼을 펼치기도 한다.

야쿠자들은 잘못을 저지른 조직원에게는 '유비츠메'라고 하여 새끼손가락부터 한마디씩 자르는 잔혹한 처벌을 내렸다. 이 역시 에도 시대 사무라이 문화에서 내려온 관습이다. 사무라이와 야쿠자는 모두 칼을 쓰는 폭력집단이라는 공통점이 있었기에  손가락을 자른다는 것은 그만큼 생명을 빼앗는 것과 맞먹는다는 엄중한 처벌의 의미가 있었다.

그보다 더 중한 처벌은 '파문'이었다. 조직에서 파문당한 야쿠자는 해당 조직은 물론 전국의 다른 조직에게도 소식이 알려진다. 조직이 그를 더 이상을 보호해주지않는다는 의미로, 실제로 파문당한 야쿠자가 적대관계 조직에게 살해를 당하거나 평생 위협에 살아가야하는 경우도 많았기에 야쿠자에게는 그야말로 사형선고와도 같았다.

야쿠자가 급속하게 성장하게 된 계기는 아시아 태평양 전쟁이었다. 일본 군국주의 세력은 권력을 지닌 야쿠자를 적극 활용하여 전쟁과 군수산업에 적극 동원했다. 또한 야쿠자들은 2차대전 패전후에도 물자가 귀해진 일본 내에서 공권력의 공백을 틈타 암시장의 이권을 독점하며 성장을 거듭했다. 야쿠자는 일본 경찰의 묵인하에 폭력으로 암시장의 치안을 장악했다.

전후 세대의 야쿠자들은 일본에서 합법적으로 크게 유행하던 필로폰이 1951년부터 갑자기 금지되자 이 기회를 놓치지않고 마약산업에 진출하여 막대한 수익을 얻었다. 1970년대 후반 기준 야쿠자의 필로폰 밀매 수익금은 1년간 약 191억엔(약 2000억원)에 이르렀다고 한다. 송강호 주연의 영화 <마약왕>도 1970-80년대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활동하던 마약업자 이황순의 실화를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1960년 일본 전후 최대의 반정부 시위였던 '안보투쟁'은 야쿠자의 전국화로 이어지는 계기가 된다. 일본 정부는 공권력만으로 통제가 어려운 상황에 놓이자 전국의 야쿠자들을 동원하여 시위대 진압에 나섰다. 야쿠자들은 곤봉을 휘두르며 시위대에 무자비한 폭력을 가했고 이 당시 부상자만 500여명에 이르렀고 22살의 여대상이던 간바 미츠코가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혼란속에서도 미일안전보장조약은 체결되었고, 야쿠자는 정부의 해결사 노릇을 대신 해주면서 활동자금을 챙기고 세력을 넓히며 실속을 챙겼다. 

야쿠자의 불법을 사실상 묵인한 일본 정부로 인하여, 야쿠자의 세력은 점점 통제불가능할 정도로 커지게 된다. 여기에 일본이 전후 복구 이후 고도성장기에 접어들며 일본 경제 곳곳에 기생하게 된 야쿠자는 연예계와 스포츠계까지 진출했다.

야쿠자들은 연예기획사를 설립하는가 하면, 프로레슬링 산업에도 뛰어들었다. 한국계로 알려진 일본의 국민가수 미소라 히바리, 레슬러 역도산 등도 야쿠자와 관계가 깊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야쿠자는 1969년 일본의 국민스포츠인 프로야구의 승부조작 사건에도 깊이 개입한 사실이 드러나며 충격을 줬다.

또한 야쿠자는 1960년대 부흥기를 맞이한 유흥업과 성매매 산업에도 진출하여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1956년 성매매금지법의 도입으로 수익에 타격을 입게되자 여성들을 인신매매하여 일명 '매춘의 섬'으로 불린 와타카노 섬에 팔아넘겨 성매매 사업을 이어가기도 했다.

이처럼 각종 사업으로 규모를 불린 야쿠자는 1963년에 조직수만 전국에 5400여개 규모로 크게 증가했다. 1970년대에 이르면 야쿠자 세력들은 대부업계까지 진출하게 된다. 당시 일본 대부업의 연 이자율은 최대 109.5%에 이르렀다.

야쿠자들은 자살시 생명보험금을 대부업체가 가져가는 조항을 강제로 삽입하게 하여 빚을 갚지못한 채무자들에게 자살을 독촉하기도 했다. 이로 인하여 생명보험에 가입한 이들만 3천명이 넘었고, 이들중 일부는 실제로 목숨을 끊었다.

또한 빚을 못갚고 자살도 거부한 이들은 성인비디오업계에 팔아넘겨 강제로 원치않는 영상을 찍게 하기도 했다. 이러한 야쿠자들의 행태는 현대에도 이어지며, 2011년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벌어지자, 야쿠자 대부업자들은 채무자들에게 방사능으로 인한 출입금지구역에 들어가 물건을 절도하거나 일당이 높은 방사성 폐기물 처리작업을 강요하기도 했다.

버블경제 시기를 맞이하여 일본에서는 새로운 '경제 야쿠자'들이 잇달아 등장하게 된다. 이들은 이른바 양복입은 야쿠자로 불리우며 합법적 기업으로 가장하여 각종 이권 사업에 개입하여 수익을 올렸다.

일본 3대 야쿠자 조직인 이나가와파의 2대 두목인 이시이 스스무 등 유명한 경제 야쿠자들은 합법적인 부동산 회사를 설립하고 정재계 인사를 협박하여 자금을 확보했다. 이렇게 모은 자금은 다시 부동산에 투자되었고 집을 팔기 거부하는 사람들을 협박하거나 방화를 저지르기도 했다.

일본의 은행들은 야쿠자들의 막대한 재산을 보고 쉽게 대출을 허가해줬다. 이러한 경제 야쿠자들의 마구잡이 은행대출은 훗날 일본의 버블경제 붕괴를 가속화시키는 또다른 원인으로 작용했다. 돈을 위하여 수단방법을 가리지않은 야쿠자들은 대출상환을 요구하는 은행장이나 기업체 사장들을 납치-살해하는 잔혹한 범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또한 현대화된 야쿠자들은 막대한 수익과 권력을 바탕으로 더 강력해진 무력까지 보유하게 됐다. 야쿠자들은 과거처럼 칼만이 아니라 권총, 자동소총에 수류탄까지 보유한 사실이 적발되며 일본 사회를 충격에 빠뜨렸다.

야쿠자들은 세력권을 넓히기 위하여 자신들끼리 다툼을 벌였고 피를 부르는 잔혹한 전쟁을 치렀다. 야쿠자의 간부와 두목들이 백주대낮에 총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연이어 벌어졌다. 1981년 야마구치파의 3대 두목인 타오카 카즈오가 사망했을 때 그의 장례식에 1200여명이 넘는 야쿠자들이 전국에서 운집했다. 방송헬기까지 동원하여 실시간으로 취재한 장면은 일본 사회에서 건드릴수 없을 정도로 커져버린 야쿠자의 위상을 잘 보여준 순간이다.

이후 야마구치파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벌어진 야마이치 항쟁(1984-1987)은 일본 역사상 최악의 야쿠자 전쟁으로 불린다. 이 기간 사망한 야쿠자만 무려 25명에 이르렀고, 시민을 비롯한 부상자는 70여명에 이르렀다. 공권력을 비웃듯 일본 도심 한복판에서 벌어진 야쿠자들의 무자비한 싸움은 일본 사회를 추격에 빠뜨렸다.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일본 정부는 1992년 '폭력단 대처법'을 발표하여 일본판 '범죄와의 전쟁'에 돌입했다. 이권을 챙길 수 있는 야쿠자의 모든 폭력행위를 강력하게 제재하게 된 폭력단 대처법이 도입되고, 조직원이 두목과 함께 기소되는 추가조항이 더해지며 야쿠자들은 비로소 법의 눈치를 보게 되기 시작했다.

일본은 2011년에는 '폭력단 배제조례'를 추가신설하여 야쿠자들에게는 휴대전화 개설, 주택 구입과 은행계좌 개설, 병원 진료 등 일본 국민으로서의 기본 생활권까지 박탈하는 초강경 조치를 내리며 사회적으로 철저히 고립시켰다.

일본 정부의 강경 대응은 확실히 효과를 거두어 야쿠자의 세력은 크게 약해졌고, 2010년대 이후 조직원들의 규모 대폭 감소했다. 하지만 여전히 일부 야쿠자들은 정체를 숨기고 음지에서 활동을 이어가면서 일본 사회의 위협이 되고 있다. 일본 야쿠자들은 한국의 조직폭력배들을 비롯하여 중국 삼합회-미국 마피아 등 해외 조직과의 연계를 통하여 마약 산업 등에 관여하며 이권을 챙기고 있다.

'폭력과 범죄는 잘못 쏟아부은 에너지일 뿐이다.'

엠마 골드먼의 격언이다. 일본 사회가 스스로 키워낸 야쿠자의 흥망성쇠는 우리에게도 많은 반면교사를 남긴다. 최근 마약 문제 등이 심각한 사회적 현안으로 떠오른 한국 역시 조직범죄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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