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Q sign #25] 말씀을 열어 주신다는 의미

전병선 2023. 12. 6.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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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설고 낯 설은 이민 초기, 성경을 늘 가슴에 안고 다녔다. 아마도 그때 누군가가 나에게서 성경을 빼앗아 갔다면, 나는 거품이 되어 스러졌을 것이다. 한국의 옛날 집에는 부엌에서 안방으로 작은 미닫이문이 있어서 그리로 갓 푼 밥과 국을 들여놓곤 했는데, 나도 내 가슴에 그 미닫이문을 하나 만들어서 아예 가슴에 성경을 집어넣고 다니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직장에서도 성경은 항상 내 옆에 있었다.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만이 나의 위로며 소망이었으니까.

그러나, 막상 성경은 열리질 않았다. 무슨 말이냐 하면, 성경이 읽히지 않았다는 말이다. 한국에서는 여기저기 찔끔찔끔 읽다가 놓고는 했다. 그러다가 미국에 이민을 오고, 처음으로 성경을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전체를 읽게 된 것은 성가대를 하면서부터였다. 세계적인 음악 가족인 정경화, 정명화, 정명훈 형제들의 7남매의 맏이인 정명소 선생님은 찬양학 박사이기도 했지만 내가 다닌 베데스다 대학교의 교수이며 우리교회 나성순복음교회 지휘자였고, 나아가 내 개인의 멘토이셨다.

내가 그분을 뵙게 된 것은 우리 교회(Vermont 시절의 나성순복음교회)의 정문 앞에서였다. 미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그 시기에 우연히 교회 앞에서 그분과 마주친 순간, 그 당시에는 이름조차 알지 못했지만, 그냥 ‘동향’이라는 단어가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단번에 그에게 마음이 끌렸고 정명소 선생님도 내게 남다른 관심을 보여 주셨다. 이렇게 우리는 만났고, 그래서 그분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된 것이었고, “쓴 뿌리를 제거하는 은사”를 받으신 그분을 통해 내 영혼에서 암 덩이처럼 자라 내 인생과 가족과 인생까지 통째로 멸망시키려고 했던 ‘미움’이라는 마귀의 세력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첫 발자국을 떼게 된 것이었다.

그분, 그분을 추억하니 또 눈물이 솟아오른다. 힘겨운 삶 속에서 가끔 그가 그리울 때면 장소를 불문하고 눈물이 펑펑 쏟아지곤 했다. 생전 그런 일이 없었음에도 말이다. 그분이 다른 교회로 떠난 후에도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같이 만나 식사를 했다. 2004년 Texas San Antonio로 이사를 하고 나서도 가끔 통화를 하곤 했다. 바쁜 시간 속에서 세월이 흐르고 2007년 여름, 날짜가 한참 지나 도착한 LA 한국일보를 펼쳐 들은 순간, 내 입에서 “헉 …!” 소리가 나왔다. 신문에서 정명소 선생님의 부고를 발견한 순간, 갑자기 내 다리가 땅에서 번쩍 들려 허공 중에 매달리는 것 같았다. 장례식도 벌써 끝나서, 천국에 가기 전에는 그를 만날 수도 더 이상 대화를 나눌 수도 없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세상에 대한 연결점이 ‘댕강’하고 잘려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처음으로 성경이 열리고 혼자서 성경을 읽게 된 후 7, 8년이 지났고, 방송하는 중인 1993년 여름 LA 집회를 위해 오신 요한선교단의 박종면 전도사(후에 목사 안수)를 인터뷰하게 되었다. 집회를 아래 전에 광고를 내는 것보다는 방송에 나와 ‘새롭게 하소서!’에 출연하는 것이 홍보 효과가 확실하므로 내 교회 전용수 장로님(나중에 목사 안수, 2011년도에 북한에 억류되기도)이 모시고 온 것이었다.

나는 그분의 간증을 들으며, 내가 왜 그 자리에 앉아 있게 되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바로 그분을 만나기 위해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고 알아졌으니까. 그때가 1993년 7월이었고, 건강 상태가 거의 시한부로 느껴질 만큼 심각했던 나는 그해 10월 23일에 한국으로 나가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핏줄들의 얼굴도 보고 도대체 무슨 병인지 알아보려고.

한국에 나가 큰 언니의 집에 여장을 풀자마자, 요한선교단의 성경통독 66권 3박 4일 특수훈련이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지체없이 참석을 하게 되었다. 그때 상황에서는 앉아있는 것도 쉽지가 않았으나, 다른 것도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니 타협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가 54회였고 계속해서 55회, 56회를 연달아 참석했다. 당시에 큰 언니가 운영하는 음악학원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매일 아침 언니와 예배를 드리고, 학생들이 오기 시작하면 비어 있는 피아노 방으로 가서 모자란 기도를 드리고 아예 작정하고 온종일 성경을 읽고 또 읽었다. 진실로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러는 와중에 죽을 것만 같던 증상들이 하나둘씩 사라져 갔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94년 1월 17일 California 노스리지 지진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막내 동생 집 TV에서 보게 되었다. 마침내 나는 멀쩡히 살아나 내 새끼들이 기다리는 LA로 복귀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1993년 10월 23일에서 1994년 1월 중순까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여덟 번이나 읽게 해 주셨고, 그러는 가운데 사망에 처한 나를 온전히 회복시켜 주신 것이었다.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나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시는도다”(건지셨도다)(개역한글 시편 107:20)

3박 4일 동안 성경 66권, 아가페 큰글성경 기준 1754페이지(구약 1331 + 신약 423페이지)를 읽는다는 것은 엄청난 체력이 요구된다. 성경통독은 그 당시에 박종면 전도사와 그를 예수님께로 인도한 매형 되시는 김동진 목사님, 그리고 천귀철 목사님 등 다섯 명의 남자 목사님들이 돌아가면서 인도하고 계셨다. 하루에 두어 시간 눈을 붙이고 하루 두 끼만 먹고 결사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 나가는 가운데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이 그 자리에 임하고, 하나님의 치료 역사까지도 임하시게 된다.

그 시간,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요한 1:1)께서 친히 안수하시기 때문이다. 녹음된 테이프로 말씀을 듣는 것 하고는 하늘과 땅 차이다. 비록 목이 쉬어서 발음이 정확하지 않을 때도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그 권능이 장대비와 같이 쏟아져 내리는 그 현장에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위로와 치료의 역사가 임하신다. 나에게 성경통독을 시키면 아나운서이니 아나운서답게 읽으려고 할 것이다, 무슨 말이냐면 예쁘게 읽으려고 할 것이라 지레 생각을 하면서, 박종면 전도사님이 나에게 성경을 통독할 기회를 한번 주셨다. 그러나 나는 아나운서 이기 전에 배고픈 영혼이었다. 하나님의 숨결을 느껴가면서 말씀을 읽어 나가는데 무슨 ‘아나운서답게’가 가당키나 한 일인가.

내 영혼이 하나님을 갈망하고 부르짖으며 말씀을 읽어 나가게 되었다. 워낙에 극한 고통을 겪고 또 겪은 사람이라 죽음을 무릅쓰고 버티는 독기마저 있어서 몸이 피곤한 것 따위는 결코 한계가 될 수가 없었다. 그 시간으로부터 한 사람의 인도자로서 추가가 되었다. 어쩌면 내내 남자 목소리로만 읽다가 여자 목소리의 통독이 지루함을 상쇄시킬 수도 있을 터. 그렇게 유일무이한 여자 성경통독 강사가 되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계속>

◇김승인 목사는 1947년에 태어나 서울 한성여고를 졸업하고 1982년 미국 이민 생활을 시작했다. LA 기술전문대학, Emily Griffith 기술전문대학을 나와 패션 샘플 디자인 등을 했다. 미국 베데스다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북미총회에서 안수받았다. 나성순복음교회에서 행정 비서를 했다. 신앙에세이를 통해 문서선교, 캘리포니아에 있는 복음방송국(KGBC)에서 방송 사역을 했다. 미주중앙일보 신춘문예에서 논픽션 다큐멘터리 부문 수상했다. 정리=

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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