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세계 교회 역사] 중국에서 순교한 존 스탬·베티 스탬 선교사를 아십니까

신상목 2023. 12. 4.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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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셀무스, 존 코튼, CT 스터드, 암브로시우스, 리처드 백스터, 토머스 오든, 존 밀턴

12월입니다. 지나간 한 해를 돌아보며 새로운 한 해를 준비하는 시기이지요. 온고지신(溫故知新) 법고창신(法古創新)이란 말처럼 옛 것을 익히고 새 것을 알며, 옛 법을 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창안하는 중요한 시절입니다. 기독교 신앙 역시 온고지신 법고창신이 필요합니다. 성경과 기독교 역사가 말하는 신앙의 기본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익힌다면 부카(VUCA·변동성 Volatility 불확실성 Uncertainty 복잡성 Complexity 모호함 Ambiguity) 시대 속에서도 당당히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세계 기독교 역사를 돌아보고자 합니다. E H 카는 역사를 정의하기를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습니다. 매주 세계 교회 역사를 만나 대화하고 우리 자신을 성찰하면 좋겠습니다(역사적 인물의 출생과 사망 날짜는 미국 크리스채너티투데이의 ‘크리스천 히스토리’가 제공하는 자료를 바탕으로 했습니다).

안셀무스 ‘알기 위해 믿는다’
1093년 12월 4일 중세 ‘스콜라 철학의 창시자’이자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 사이의 가장 위대한 학자로 불리는 안셀무스가 캔터베리 대주교가 됐다. 스콜라 철학이란 교부철학에 따라 세워진 기독교 신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이를 이성적인 사유를 통해 논증하고 이해하려 했던 중세 철학의 흐름이다. 안셀무스는 ‘알기 위해 믿는다’라는 원칙에 따라 신앙과 이성의 연관을 추구했다. 그는 이성을 통해 적용할 수 없는 신앙 문제들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이미 신앙을 통해 믿고 있던 문제들을 더 깊이 이해하고 싶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의 존재와 성육신의 동기 등을 다루는 방법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안셀무스는 신에 대한 존재론적 논증을 처음 제시한 인물로 꼽힌다. 그는 ‘프로스로기온’(서언)(1078)에서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람과 부정하는 사람의 판단 모두에 있어서, 그것이 신의 부정에 대한 것일지라도 신에 대한 앎이 ‘그의 지성 안에(in intellectu eius)’ 있다고 주장했다. 이를 토대로 신을 부정하는 자의 판단이 자기 모순적이라는 것을 보임으로써 신 존재 증명을 시도했다. 안셀무스는 신 개념을 “그것보다 더 커다란 것을 생각할 수 없는 것”으로 제시했다.

그는 또 ‘왜 하나님은 인간이 되셨는가’라는 논문에서 성육신의 근본 이유를 탐구했다. 하나님께 대한 범죄는 그 심각성에 있어서 무한하다. 그러나 동시에 오직 인간만이 인간이 범한 죄를 위한 보상을 지불할 수 있다. 이는 불가능한 것인데 왜냐하면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위엄이 요구하는 무한한 보상을 지불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신인(神人) 즉 성육하신 하나님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그는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모든 인류의 죗값을 지불했다. 이 같은 성육신에 대한 논증은 이후 서방 교회에서 가장 성경적인 해석으로 수용됐다.

존 코튼, 17세기 미국 회중주의의 아버지
1584년 12월 4일 식민지 시절 미국의 설교자 존 코튼(John Cotton)이 영국 더비에서 태어났다. 그는 영국 청교도 운동의 저명한 지도자로서 영국에서부터 교회 개혁 운동에 앞장서왔다. 1630년대 이후 미국 뉴잉글랜드의 대표적 신학자이자 목회자로 활동하면서 뉴잉글랜드 회중교회와 신정체제의 신학적, 사상적 토대를 놓았다. 그는 율법폐기론 논쟁의 중심에 있었고, 회심에서 은혜의 선행됨과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했다. ‘뉴잉글랜드 회중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며 당시 사람들은 그를 높이 평가해 “하나님이 코튼에게 잘못을 허락하실 거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C T 스터드, 중국과 아프리카 선교에 열정을 바치다
1862년 12월 5일 개척 선교사이며 ‘믿음 선교’로 유명한 국제WEC선교회 창립자인 찰스 T. 스터드가 영국에서 태어났다. 원래 크리켓 스타로 유명했던 그는 동생이 중병에 걸려 생과 사를 넘나드는 것을 봤고, 이후 D L 무디의 설교를 듣고 회심한 후 자신의 삶과 상당한 재산을 그리스도를 위해 헌신했다. 그는 당시 “만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고 나를 위해 죽으셨다면, 내가 그분을 위해 하는 어떤 희생도 결코 클 수 없다”(If Jesus Christ is God and died for me, then no sacrifice can be too great for me to make for Him)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1885년 그는 다른 6명과 함께 ‘케임브리지 7인’이라는 이름으로 허드슨 테일러의 중국내지선교회(China Inland Mission)를 이끌었으며 이 경험을 토대로 WEC(Worldwide Evangelization for Christ)을 창설하기도 했다. 스터드는 가 중국으로 떠나기 전에 한 마지막 간증은 아직도 그 당시의 긴급함과 중대함을 잘 전해준다. “여러분이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내어드린 후에야, 하나님은 여러분 속에서 역사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 주실 것입니다.”

중국 사역을 마치고 귀국한 그의 인생 경로를 바꾼 것은 어느 집 문 앞에 새겨진 ‘식인종은 선교사를 원한다’는 글귀였다. 글귀를 조사해보니 중앙아프리카 부족민 중에는 마을을 찾아와 예수님 이야기를 해준 그리스도인이 하나도 없었던 탓에 복음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스터드는 기도중 아프리카행을 택한다. 이미 50이 넘은 나이였고 병약한 데다 재정적 뒷받침도 없었다. 하지만 1910년 이후 아프리카오지선교회를 만들어 18년간 콩고 선교에 매진했다. 그는 너무나 열정적이어서 하루에 18시간을 일했고 휴가도 없었다고 한다.

니콜라스, 산타클로스의 원형
345년 12월 6일 그리스와 라틴 교회에서 가장 인기 있는 성인 중 한 명이자 산타클로스의 이름을 딴 미라의 주교(bishop of Myra) 니콜라스가 사망했다. 니콜라스는 270년 소아시아 리키아 지방의 파타라에서 태어났다. 유복한 집안 출신이었던 그는 부모를 일찍 여의고 자신에게 돌아온 막대한 유산을 모두 가난한 이웃을 위해 사용했다. 기독교를 믿은 후 사제가 되었고 미라의 주교로 임명됐다.

303년 로마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기독교 박해 때 투옥돼 고문을 당했으나 이후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해 석방돼 그리스도인들의 쇄신과 선교 활동에 힘썼다. 니케아공의회(325)에도 참가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아리우스파 성직자를 때렸다가 투옥되기도 했다고 한다. 니콜라스 주교는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일을 더 크게 확대해 그의 교구는 늘 자금이 부족해 성직자들이 끼니를 거를 때가 많았다고 한다. 그의 행적 가운데 가난한 집안의 세 딸에게 지참금을 전달한 일, 사형 직전 무죄한 죄수들을 구출하고 난파선 승객들을 구출하는 등의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니콜라스는 산타클로스의 원형이기도 하다. 라틴어로 성 니콜라스를 뜻하는 상투스 니콜라우스(Sanctus Nicolaus)를 네덜란드어로 산테 클라스라 불렀는데 이 발음이 영어식으로 변형돼 오늘의 산타클로스가 됐다.

암브로시우스, 교회의 권위와 자유를 수호
347년 12월 7일 암브로시우스가 이탈리아 밀라노의 주교로 봉헌됐다. 그는 로마 황제에 맞서 싸워 승리한 최초의 주교로, 이후 1000년간 서구에 영향을 미칠 교회 국가의 선례를 남겼다. 그는 특히 성령에 관한 영향력 있는 신학자이기도 했다. 그의 설교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개종으로 이어졌다.

암브로시우스는 원래 밀라노의 총독이었다. 그러다 밀라노 감독이 사망하자 후계자 논쟁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아리우스파와 정통파 양쪽의 신망을 얻어 374년 세례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주교가 되었다. 그는 자기에게 기독교 교리의 기초를 가르쳐 준 사제 심플리키아누스의 도움으로 신학을 공부했다. 이후 니케아 정통파 입장에서 교회의 권위와 자유를 수호하는 한편 신앙·전례·성가 활동 등에도 큰 공을 남겼다.

헬라어에 능통했으며 뛰어난 설교가로 그가 남긴 기록이 곧바로 저서가 되었다. 반아리우스파 저술 외에도 ‘성직의 의무에 대하여’ ‘6일간의 천지창조론’ 등이 유명하며 바실의 논문 ‘성령에 관하여’를 대중화함으로 삼위일체 신학 발달에 기여했다.

그는 목회자들의 책임에 대해서도 강조했는데 “진정한 힘은 강한 자들로부터 약한 자들을 보호하는 데 있으며 은혜를 갚을 수 있는 부자들이 아니라 그렇게 할 수 없는 가난한 자들을 잔치에 초대해야 한다”고 기록했다. 다음과 같은 말도 유명하다. “하나님은 모든 이들이 충분하게 먹고살 수 있도록 만물을 준비하셨다. 따라서 지구는 모든 이들에게 주어진 공동유산이다. 자연은 평등한 권리를 생산하지만, 탐욕은 그것을 소수의 특권으로 만들었다.”

리처드 백스터, 목회자의 목회자
1691년 12월 8일 영국 청교도 목사 리처드 백스터가 런던에서 별세했다. 백스터 목사는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설교자 중 한 명이자 찬송가를 포함한 약 200편의 작품을 써, 개신교도 사이의 연합을 추구하는 평화를 이루는 사람으로 알려진다.

1636년 독학으로 성공회 신부 자격을 획득하고 1641년 키더민스터의 목사가 되었다. 청교도혁명 때는 의회파에 속해 크롬웰 군의 군목, 고문으로 일했다. 왕정복고 후 찰스 2세가 궁정 사제로 선임, 성공회 감독직에 임명했으나 이를 거절하고 비복종파에 공동 보조를 취했다. 1662년 ‘통일령’ 공포와 함께 성공회를 떠나 박해를 받으면서 비성공회 목사로서 설교를 계속했으며 ‘신약성서 의해(義解)’(1665)에서 성공회를 중상했다는 이유로 18개월 동안 투옥되기도 했다. 4권으로 된 그의 명저 ‘성도의 영원한 평안’(1650)은 5년간에 5판을 중간할 만큼 환영받았다.

백스터는 당시 목회자 중 목회자로 불렸다. 대표작 ‘참 목자상’은 국내 주요 신학교 교재로도 사용 중이다. 백스터는 1641년부터 키더민스터의 교구 목사로 활동했다. 처음엔 주민들의 심한 반발을 사기도 했다. 설교 내용이 너무 강해서였다. 그는 죄를 지적하며 회개할 것을 요청했다. 성찬식 참여 기준도 엄격하게 지켰다. 하지만 17년간 사역을 통해 놀라운 열매를 거뒀다.

그는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설교하듯 늘 간절한 마음으로 복음을 선포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주일예배 설교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껴 성도들의 가정을 수시로 심방했다. 그때마다 가정교사처럼 상세하게 성경을 가르쳤다. 심방할 때마다 한 시간 넘게 머물며 가정의 영적 상태를 돌봤다. 일주일에 평균 15가정을 돌보았다고 한다. 그 결과 수많은 가정에서 시편 찬양을 부르며 가족예배를 드리게 됐고, 주일에는 백스터 목사의 설교 내용을 가족들이 나눴다.

그의 요리 문답도 유명한데 특히 코로나19 시절 국내 목회자들 사이에서 문답 109번이 많이 회자됐다. 해당 문답은 이렇다. 질문 : ‘만약 위정자가 금한다면 교회는 주일에 모이는 것을 생략할 수 있는가? 답변 : ①전염병이나 화재, 전쟁 등의 특별한 이유로 금하는 것과 상시적으로 혹은 불경스럽게 금하는 것은 경우가 다릅니다. ④만약 위와 같은 특수 상황에서 위정자가 더 큰 유익을 위해 교회의 모임을 금한다면, 그에 따르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우리의 일상적 의무는 더 큰 자연적 의무에 양보해야 합니다. 어느 한 주일이나 하나의 모임을 생략해서 더 많은 모임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은 더 중요한 일입니다.

존 스탬·베티 스탬, 순교의 열매를 생각하다
1934년 12월 8일 미국 선교사 존 스탬과 베티 스탬(John and Betty Stam)이 중국내지선교회 소속 선교사로 활동하다 중국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참수당했다. 두 사람은 무디 성경학교에 재학 중 만났고 죽기 1년 전 결혼했다. 그들의 전기가 출판되자 수백 명이 선교 사역에 뛰어들었다.

베티 스탬은 중국 동부 해안의 도시 칭다오에서 자랐고 그곳에서 아버지 찰스 스콧이 선교사로 활동했다. 1926년 베티는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와 시카고 무디성경연구소에서 재학하다 존 스탬을 만났다. 이후 1933년 결혼, 이듬해 3개월 된 딸 헬렌을 데리고 중국 안후이성 선교지로 이사했다.

그해 12월 4일 마을 치안판사의 전령이 스탬 가족에게 공산군이 도시로 접근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존은 이를 확인한 후 도시를 떠날 준비를 했다. 그러나 공산군은 재빨리 도시를 점령해 스탬 가족이 머물고 있는 곳으로 침입해 가진 돈을 요구했고 스탬 가족은 돈을 줬다. 그러자 공산군은 존을 체포해 시립 감옥으로 데려갔다. 군인들은 다시 돌아와 베티와 딸 헬렌을 데려가 존과 함께 감옥에 투옥했다. 그날 밤 존 스탬은 중국내지선교회에 편지를 썼지만 전달되지 않았다. 편지는 나중에 헬렌의 옷가지에 묶여 발견되었다. 편지에는 스탬 부부가 2만 달러의 몸값을 요구하며 공산당에 잡혀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존 스탬은 선교 당국에 자신과 아내가 체포된 경위를 설명한 후 빌립보서 1장 20절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기를”이라고 썼다.

존과 베티, 헬렌은 지역 교도소로 끌려갔고 소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헬렌이 울기 시작했고, 한 병사는 그녀를 귀찮게만 하니 죽여버리자고 제안했다. 그러자 방금 풀려난 죄수 중 한 명이 죄 없는 아기를 왜 죽여야 하냐고 물었다. 군인들은 그를 향해 외국인 아기를 위해 기꺼이 죽을 의향이 있는지 물었다. 그 남자는 스탬 선교사 앞에서 죽었고 헬렌은 살아났다.

다음 날 아침, 스탬 부부는 군인들과 함께 서쪽 마을로 행군했다. 다음 날, 존과 베티는 처형당하기 위해 먀오쇼우 거리로 행진했고 호기심에 가득 찬 구경꾼들이 거리 양쪽에 줄지어 섰다. 한 중국인 상점 주인이 군중 사이로 나와 공산군에게 스탬 부부를 죽이지 말라고 설득했으나 그의 집에서 성경과 찬송이 발견돼 스탬 부부와 함께 죽임을 당했다. 공산군은 존 스탬을 좀 더 끌고 갔고 이후 무릎을 꿇으라 하고 살해했다. 베티 스탬과 가게 주인은 잠시 후 죽임을 당했다.

아기 헬렌은 이틀 후 한 중국인 목사에 의해 발견되었고 그는 헬렌을 집으로 데려가 돌보았다. 존과 베티 스탬의 시신은 소수 기독교인들에 의해 발견돼 언덕에 묻혔다. 스탬 부부의 묘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존 코넬리우스 스탬, 1907년 1월 18일,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빌립보서 1:20”
“엘리자베스 스콧 스탬, 1906년 2월 22일,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빌립보서 1:21”
“1934년 12월 8일, 안후이성 먀오서,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요한계시록 2:10”
이들의 순교 이야기는 널리 알려졌고 많은 사람이 선교사가 되는 데 영감을 주었다. ‘선교사 열전’의 저자 루스 터커는 “스탬 부부가 처형당한 사건은 중국내지선교회에 고통스러운 충격을 안겼지만 이들의 희생에 고무된 많은 젊은이들이 선교 사역에 헌신을 다짐했고 1935년 한 해 동안 선교회에는 1929년 대공황 이래 가장 많은 후원금이 답지했다”고 기록했다.

토머스 오든, 고전정통주의를 확립
2016년 12월 8일 미국 연합감리교회 목사이자 신학자인 토머스 C. 오든이 별세했다. 오든은 20세기 중반 사회 복음 운동의 주요 지지자였지만 교부들, 특히 아타나시우스 아우구스티누스 아퀴나스의 저서를 연구하면서 고전적 기독교 정통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고전정통주의). 그가 ‘고고학적 정통’이라고 명명한 전통 신학으로의 회귀는 그의 인생 후반기에 주된 관심사가 되었고 그는 보수적 복음주의 신학의 대표적 인물이 되었다.


드루대 신학대학원에서 조직신학과 기독교 윤리를 가르쳤고, 개신교회 공교회주의 신학의 전통을 잇는 고전정통주의 신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기독교 신학계에서는 20세기에서 21세기를 열었던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들 중 한 명으로 뽑힌다. 오든의 초기 신학적 배경은 그의 전공인 조직신학적 바탕에 정치적으로 진보 신학의 성향을 보였다. 이후 에큐메니컬 운동에 참여하면서 20세기 초반 미국이 자유주의 신학의 파편적 모습에서 통합적인 에큐메니컬 교회를 이끌 수 없다는 견해를 지니게 되면서 통합적 시각으로 상담과 목회의 통합, 정신분석학과 신학의 통합에 관심을 기울였다.

하지만 통합도 점차 신학적 한계를 느끼면서 현대의 분파적인 신학보다는 고대전통적 신학, 즉 고대 교회의 교부들의 통합적 사고와 로마제국하에서 형성된 정통신학적 입장이 현재 교회에 더 효과적이라 주장했고, 2000년 전통을 따르는 기독교 고전에 기반한 정통복음주의 신학으로 전환했다. 오든은 11세기 이전의 공교회 회의(공의회)와 동방교회 지역, 헬라어 사용 교부들과 서방교회 지역, 라틴어 사용 교부들, 이후 기독교 전통과 공의회 사상, 정통적 신학을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오든의 신학적 사상과 저작은 ‘고전정통주의’(paleo-orthodoxy)로 불리며 개신교 내에서 21세기 신학적 중요한 주제로 발전했다. 특히 감리교회를 포함한 공교회주의 노선의 개신교 교파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개혁주의 노선의 교파에도 교부들에 대한 연구와 전통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그의 신학적 흐름과 전개를 보여주는 조직신학 서적인 ‘고전 기독교: 조직신학’(Classic Christianity: A Systematic Theology, 2009)은 그가 주장하는 전통 복음주의와 고전정통주의를 이해하는 중요한 저작이다. 국내에서는 ‘웨슬리안의 신학적 유산’ ‘교부들의 성경주해 구약성경’ ‘케리그마와 상담’ 등이 출간됐다.

존 밀턴, 시각장애에서도 ‘실낙원’ 펴내다
1608년, 12월 9일 영국 시인 존 밀턴이 런던에서 태어났다. 서사시 ‘실낙원’으로 가장 유명하지만 기독교 교리에 대한 해설과 기독교 교육 계획, 다양한 정치 저술도 집필했다. 세익스피어가 주로 극시를 창작했다면 밀턴은 서사시의 분야에서 거대한 발자취를 남겼다. 밀턴은 케임브리지대에서 르네상스 이후 유럽 인문주의 전통에 깊이 천착하는 동시에 런던의 신흥 시민 계급의 사상과 신앙의 기반을 계승하고, 고양된 청교도주의를 받아들였다.

1639년 발발한 청교도혁명은 그의 사명감을 강렬하게 했고, 하나님 나라의 실현과 영국 국민의 자유를 달성하는 대의가 있다고 확신했다. 탁월한 학식으로 크롬웰 정부의 라틴어 비서관에 임명되었고 대내외적으로 혁명의 대의를 고취하기 위해 많은 논문을 발표했다. 하지만 지나친 면학으로 1652년 시각장애인이 됐고 좌절된 혁명으로 전 재산을 몰수당하는 비참한 처지로 전락한다.

이후 작품 활동에 몰두해 기독교적 주제에 의한 대서사시를 집필했다. 맹인이었던 이유로 그의 작품은 모두 구술 필기에 의해 이루어졌다. ‘실낙원’(1667)은 영시사상 최고의 서사시로 꼽힌다. 실낙원은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저버리고 낙원에서 추방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작품은 인간의 타락과 그로 말미암은 메시아의 구원을 다룬 예술 서사시이다. ‘복락원’은 그 속편으로 고전 그리스적 수법에 의한 비극시 ‘투사 삼손’과 합본으로 1671년 출간됐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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