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의 승자와 역사의 승자

박도 2023. 12. 3.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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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도 칼럼-4] 영화 '서울의 봄'을 보고

[박도 기자]

 <서울의 봄> 포스터
ⓒ 자료사진
 
현실에서 승자는 역사에서 승자가 아닐 수 있다

요즘 인기리에 상영 중인 <서울의 봄>을 보고자 원주의 한 영화관에 갔다. <서울의 봄>은 1980년 봄으로, 그때 나는 서울 서대문구 대신동에 있는 이화여대 부속고교 교사였다. 그 당시 대학생 시위의 메카라 할 수 있었던 연세대와 이화여대 사이에 소재한 우리 학교 학생 및 교직원들은 1980년대 내내 페퍼포그 최루탄 가스를 엄청 마셨다.

이 영화는 1979년 10. 26.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을 발단으로 전개된다. 시해 범 김재규 체포에서부터 그해 12월 12일 궁정동 만찬장 부근에 있었던 당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강제 연행을 둘러싼 합수부 측의 전두환 부장과 계엄사령관 정승화 총장의 강제 연행에 반대하는 수경사령부 장태완 측의 파워 게임을 영화화한 것이다. 현대사에 관심이 많은 나에게 그 시절을 반추케 하는 의미 있고 흥미 진진한 영화였다.

영화를 보는 내내 격동의 정변 때 현실에서 승자는 역사에서 승자가 아닐 수도 있다는 걸 새삼 일깨워 주기도 했다. 조선 제7대 세조정변 때 한명희, 신숙주 등은 수양대군을 추대한 정변의 승자였다. 하지만 역사는 단종 편에 선 비운의 성삼문 박팽년 등 사육신을 충신으로 더 추모하고 있다.

특히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나 개인과 약간의 에피소드가 있기에 영화를 보는 내내 많은 걸 반추케 했다.
  
 군 복무시 마지막 근무지 양주군 백석면 비암리 부대 초소에서
ⓒ 박도
 
주요 등장인물과 개인적 에피소드

유학성 ․ 노태우 장군 : 1969년 2월 20일, 나는 육군소위에 임관, 광주보병학교에서 16주 기초교육을 수료한 후 보병 제 26사단에 배속을 받았다. 그때 제26사단장이  유학성 육군소장이었다. 그날 전입신고 때 사단장과 악수를 나눈 바 있었고, 이후 1988년 6월초 노태우 대통령 취임 100일 날 각계각층 '보통사람 100인과의 대화' 때 교사 대표로 참석하여 노태우 대통령과도 악수를 나누고 옆에 있었던 유학성 안기부장을 다시 만난 적이 있었다.

장태완 장군 : 1971년 6월 30일은 나의 전역식 날이었다. 나는 전역식 날까지도 부대 근무를 한 바, 그날 아침 야간 잠복근무자 '이상 무' 귀대 신고를 받은 다음 곧이어 소대원들로부터 이임 경례를 받았다. 그런 다음, 부대 전입 때처럼 사물을 넣은 더블 백을 어깨에 메고서 부대를 떠나 사단 전역식장을 향해 걸어갔다. 그때 대대장이 지프차를 타고와 사단 전역식장까지 태워주겠단다. 그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한 뒤 그 차를 탔다.
 
"박 중위! 지금도 늦지 않아. 우리 군은 당신과 같은 장교가 필요해. 오늘이라도 전역 취소하고 군에 남게."
"말씀 고맙지만 저는 교사가 될 겁니다."
"나, 아무나 붙잡지 않아. 남아 주시게."

사단 연병장 전역식장으로 가자 연대장도 '귀관은 군에 남으라'고 간청했다. 하지만 나는 초지일관 상관의 권유를 뿌리치고 전역을 했다. 내가 전역을 한 뒤, 곧 26사단장은 유학성 소장에서 장태완 소장으로 바뀌었다. 장태완 소장은 내 고향 이웃 고을 칠곡 출신인데, 그분 처가가 구미로 원평동 이영수 한의사의 사위였다. 나는 어려서 몸이 허약해서 이영수 약국에서 숱하게 탕약을 지어 먹고 건강을 회복했다. 그래서 이영수 약국 출입을 자주 했다.

이영수 한의사의 외아들은 이준상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초등학교 급우였다. 그때 이영수 한의사 내외는 가난한 박정희 학생의 도시락을 싸주는 등, 끔찍하게 돌봐줬단다. 후일 박정희는 대통령이 되고 난 뒤 그때를 잊지 않고 귀향을 하면 이준상 친구를 가장 먼저 찾았다는 일화로 고향마을에서는 그 미담이 자자하다.

특히 장태완 장군의 부인 이병호씨는 나의 아버지(박기홍) 제자이며, 나의 넷째 고모와 단짝 친구였다. 만일 그때 내가 군에 남았더라면 아마도 장태완 사단장과 인연이 닿았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계속 그분을 따라 다녔을지도.

<서울의 봄> 영화에서 사람은 순간의 선택이 평생 운명을 좌우하는 장면이 나온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순간의 선택은 대단히 중요하다. 하긴 순간의 선택, 그 자체가 그 사람의 '운명'이 아닐까?

전두환 장군 : 1981학년도 5월 어느 날 퇴근 후 밤중이었다. 뜻밖에도 교장선생님(정식영)이 내 집으로 전화를 했다.

"박 선생! 오늘 청와대 비서관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전두환 대통령의 둘째 아들이 우리학교에 전학 오겠다고 하기에, 내가 박 선생을 담임교사로 추천했으니 그리 아시오."

하지만 그 일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며칠 후 교장이 고개를 저으면서 그 영문을 잘 모르겠다면서 발설한 걸 미안해 했다. 내 추리로는 당시 같은 학구 내 전학은 금지돼 있는데, 대통령 가족이라도 그 법을 어길 수 없다는 점 아니면, 그때 같은 학년에 김대중 사형수 아들이 재학하고 있었던 바, 서로 부딪치는 걸 피하고자 애초에 생각을 접은 것으로 보였다. 

아무튼 영화 <서울의 봄>은 1979년 12월 12일 하룻밤의 정변 이야기를 박진감 있게 잘 그렸고, 배우들의 연기도 일품으로, 많을 걸 생각하게 했다.

이 영화는 긴 안목으로 인생을 볼 때, '좋은 것만 좋은 게 아니다', '양지가 음지가 되고 음지가 양지가 되기도 한다'는 걸 새삼 깨우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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