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추억이 될 바다열차, 그 전에 미리 타봤습니다
[배은설 기자]
곧 이별을 앞두고 있다. 올해의 크리스마스를 끝으로 이제는 더 이상 만날 수 없다. 행복해야할 크리스마스에 이별이라니. 아름다운 동해의 해안선을 달리던 시간을 결코 잊을 수가 없는데.
▲ 코레일에서 운영하는 바다열차가 '열차 내구 연한 도래'를 이유로 운행 종료를 알렸다. 바다열차 홈페이지(https://www.seatrain.co.kr/) 캡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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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테마로 꾸며진 관광 열차
차가운 바람에 자꾸만 몸이 움츠러드는 지난 11월 19일, 바다열차가 추억 속으로 사라지기 전 가족들과 함께 강원도로 향했다. 아침온도가 어느새 영하로 떨어진 날이었다.
어느덧 겨울이 다가왔음을 분명히 알리는 날씨, 하지만 기차역을 찾은 사람은 우리뿐만이 아니었다. 추위와 상관없이 플랫폼에는 바다열차를 타려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패딩, 모자 등으로 잔뜩 무겁게 껴입은 사람들의 표정은 그러나 가볍기만 했다.
▲ 강릉역으로 들어서는 바다 열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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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열차는 크게 특석, 가족석, 프러포즈석 세 개의 테마로 이뤄져 있었다. 우리는 갈 때는 가족석, 올 때는 특석을 예약했다.
가족석은 2명씩 마주보고 앉을 수 있는 구조로 돼 있고 가운데 탁자가 있어서 미리 사들고 간 간식을 먹으며 바다 풍경을 감상하기 좋았다. 바다열차 내부에도 매점이 있기는 하지만 규모가 작은 편이라, 어린 아이가 있는 가족이라면 미리 먹을거리를 사들고 가길 추천 드린다.
칙칙폭폭 그때 그 시절의 추억을 소환하고 싶다면, 기차여행의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인 '삶은 달걀과 사이다'를 준비해 가는 것도 좋겠다.
▲ 바다열차 가족석에서 바라보는 창 밖의 푸른 바다 |
ⓒ 배은설 |
시야가 넓은 건 특석이었다. 바다를 향해 나 있는 투명한 통창과 마주 앉았다. 창밖으로 저마다의 특색을 담고 있는 기차역들이, 겨울을 맞아 서서히 색이 변해가는 나무들이, 푸른 하늘과 더 짙푸른 바다가 스쳐지나갔다. 탁 트인 푸른 동해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분위기는 살짝 다르다. 가족석이 함께 간식도 먹고 담소도 나누며 소풍 나온 듯 들뜬 분위기가 크다면, 특석은 그 구조상 아름다운 해안 풍경을 감상하기에 최적화돼 있어 좋았다. 특석만큼은 다른 멘트 방송 없이 음악을 틀어놓거나 잔잔한 분위기를 유지한다면 오롯이 풍경을 감상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개인적인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만약 당신에게 연인이 있다면, 예약할 곳은 당연히 프러포즈석이다. 바다를 바라보는 낭만적인 열차에, 게다가 단 두 명만 앉을 수 있는 좌석이라니. 따로 긴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굳이 첨언해보자면 여기에선 와인이나 초콜릿, 승무원의 포토 서비스(사진촬영)까지 무료로 제공된다고 한다. 그러니 만약 바다열차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커플이라면, 조금이라도 빨리 프러포즈석을 예약해야하지 않을까. 바다열차 운행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같은 시점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 잠시 정차한 사이 눈에 담은 정동진 역의 풍경 |
ⓒ 배은설 |
그러고 보니 그만이 아니었다. 창문을 사이에 두고 열차 안에 있는 이도, 바깥에 있는 이들도 눈이 마주치면 자주 서로에게 손을 흔들어줬다. 말간 웃음을 가진 해맑은 아이들뿐만 아니라, 이곳에서는 어른들도 함께 손을 흔들어줄 줄 알았다.
서로 전혀 모르는 사이지만 서로에게 환한 미소를 전해주는 데 어색함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기차가 역에 섰을 때, 해변가를 천천히 걷고 있는 사람들을 봤을 때, 정동진 레일바이크를 타고 있던 사람들이 기차를 향해 손을 흔들었을 때, 나도 괜히 더욱 크게 손을 흔들었다.
▲ 바다열차에 사람들이 보내온 사연들. |
ⓒ 배은설 |
그 중 눈길을 끄는 건 역시 짧은 문자 속에 담겨 있는 갖가지 사연이었다. 엄마아빠와 함께 놀러 와서 신난다는 아이의 문자도, 함께 온 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나열하며 즐거운 여행을 하자는 문자도, 내 옆에 있어줘서 고맙다며 이 자리를 빌려 사랑을 고백하는 문자도, 만삭일 때 남편과 둘이 찾아왔었는데 이제는 셋이 되어 다시 왔다는 문자도 모두 기꺼웠다.
그렇게 풍경과 사람을 보다보니 벌써 한 시간 정도의 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 바다 열차를 타고 떠난 겨울 바다 여행 |
ⓒ 배은설 |
바닷가 근처 허름한 가게 한 곳을 가리키며 저 집 '망치탕'이 맛있다고 귀띔해 주셨던 택시 기사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이름도 생소한 망치탕이 과연 뭘까 궁금했다. 동해해서만 먹을 수 있는 별미인가 싶었다. 가보니 과연 대기줄이 길었다. 대기순서표 격인 번호 적힌 밥주걱을 쥐고는 기다렸다.
30여분의 기다림 끝에 우리의 숫자 7이 불렸다. 그렇게 처음으로 망치탕을 맛봤다. 울퉁불퉁 못생긴 생선인 망치는 입 속에서 사르르 부드럽게 녹았다. 시원하면서도 뜨끈한 국물이 목구멍을 타고 흘러들어가 금세 온몸을 덥혀 줬다. 겨울바람이 부는 바깥, 작은 가게 안은 온기로 가득했다.
추운 날 탄 바다열차도, 추위에 언 몸을 금세 녹여준 뜨끈뜨끈한 망치탕도 모두 좋았다. 망치탕은 언젠가 또 먹을 수 있겠지. 하지만 바다열차는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다시 타기 어려워질 것이다.
강릉-동해-삼척 해변을 이어 달리는 바다열차는 푸른 파도 철썩이는 풍경을 담았고, 들뜬 얼굴을 한 사람들을 담았고, 그 사람들의 사연을 담았다. 오랜 시간 추억과 낭만을 싣고 달리던 기차 한 대가 열차 노후화 및 지자체 재정 상황 등의 이유로 머지않아 과거 속의 이야기가 된다고 하니 아쉽기만 하다.
앞으로도 더 빠르고 편한 교통수단들은 더 많이 생겨날 테지. 기차 같은 교통수단은 자꾸만 뒷전으로 밀려날 것이다. 하지만 기차여행이란 언제 떠나도 설레는 것. 전국곳곳을 누비고 다니는 기차들이 남아 있는 한, 언제고 설레는 여행도 여전히 남아있는 것이라 여기며 못내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덧붙이는 글 | 위 글은 개인 블로그 (https://blog.naver.com/tick11)에도 함께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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