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이 잦아지면 사람들은 ‘초록 그늘’로 숨어든다

문정임 2023. 11. 30.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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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나무 아래 사람이 모인다⑤] 제주도의 가로수

가로수는 도시 기후를 조절해 더위와 홍수 피해를 줄인다. 자연에 대한 도시민의 갈증을 채우고, 도시의 풍경을 만드는 오브제의 역할을 한다. 이 연재에서는 주요 도시의 관리 사례와 현황을 통해 가로수가 기후위기 시대 시민의 삶과 지역 사회에 미치는 다양한 효용을 살펴본다. <편집자 주>

매년 4월 제주는 찬란한 빛깔로 새 계절을 연다. 분홍 왕벚꽃이 길을 따라 도시 곳곳을 수놓기 때문이다. 제주시 전농로에서부터 제주대학교 입구, 연동과 삼양을 연결하는 연삼로, 월산로 등 주요 도로마다 만개한 벚꽃잎이 봄이 왔음을 알린다.
지난해 봄 제주시 삼도1동 거리를 찾은 시민들이 휴대전화 카메라로 벚꽃을 촬영하며 봄 계절을 만끽하고 있다. 뉴시스


벚꽃축제가 열리는 제주시 전농로는 구시가지를 가로지르는 1㎞ 구간에 60년이 넘은 왕벚나무가 마주보며 터널을 이루고 있다. 낙엽수인 벚나무는 꽃이 피고, 잎이 나고, 낙엽이 지는 한 해의 순환이 계절마다 거리에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낸다. 일부 나무가 도로 한쪽 차선을 점령했지만, 사람들은 왕복 2차선 좁은 도로를 교대로 지나는 수고로움을 기꺼이 감내한다.

1980년대 행정타운으로 조성된 신제주로터리 주변은 제주도에서 상록수 가로수가 가장 넓게 형성된 지역이다. 수령이 50년 가까이 된 담팔수와 후박나무가 군집을 이루고 있다. 육지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왕벚나무와 달리, 이들 상록수는 제주나 남부지역에서만 자라기 때문에 제주만의 독특한 가로 경관을 형성한다. 수고(樹高)만큼 넓은 수관(樹冠)은 촘촘하고 풍성한 녹음을 만들어 무더운 여름에도 사람들이 편안히 이동할 수 있게 해준다.

지난 주말 제주대학교 주변 도로에 노란 은행잎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문정임 기자


제주도에 따르면 제주의 왕벚나무 가로수는 총 1만7331본(2022년 기준)에 이른다. 전체 가로수의 23% 가량이다. 단일 수종으로는 가장 많다. 이어 후박나무(1만1204본), 먼나무(1만541본), 해송(3819본), 느티나무(3558본), 배롱나무(3555본), 담팔수(3226본) 등이 주요 수종을 이루고 있다.

가로수는 지속적으로 늘고 있다. 2019년 7만3754본에서 지난해 7만5005본으로 짧은 기간 1251본이 증가했다. 도로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나무를 베어내기도 하지만, 개설된 도로에 다시 나무를 심기 때문에 새 도로가 만들어지면 가로수가 같이 증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제주지역 가로수가 매년 늘어나는 것이 가로수가 충분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지구 온난화로 더운 날이 부쩍 늘면서 도심 녹지에 대한 시민 인식은 예전과 달라졌다. 도시를 아름답게 하는 조경 요소에서 더위를 실질적으로 감소시켜 줄 자연 그늘막으로 그 역할이 한층 분명하고 절실해졌다.


도시는 더워지고 있다. 지난해 제주도의 여름은 역대 가장 무더웠다. 제주기상청에 따르면 2022년 6∼8월 제주도 평균기온은 26도로 평년보다 1.5도 높았다. 단지 평년보다 ‘1.5도’ 높았는데, 기온은 1973년 이후 최고점을 찍었다.

밤더위도 일찍 찾아왔다. 서귀포와 고산(제주시 한경면)에는 6월 29일에 역대 가장 빠른 열대야가 나타났다. 사람들이 밀집한 북부는 8월 10일 낮 최고기온이 37.5도를 기록하며, 1923년 관측이 시작된 후 99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문제는 제주도의 날씨가 계속 더워지고 있다는 점이다.

기상청이 폭염일수를 집계하기 시작한 1973년 이후 최근까지 10년 단위로 폭염일수를 집계해보니, 1973~1982년 15.7일에서 2013~2022년 64일로 폭염일수가 4배 이상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폭염일수는 제주도가 전국에서 가장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기상청 ‘최근 30년간(1993~2022년) 기후 현황’ 통계에선 서귀포시와 제주시의 열대야 일수가 각각 966일과 964일로 전국에서 가장 긴 것으로도 집계됐다. 매년 한 달 이상 시민들이 열대야로 잠을 설치고 있는 것이다.

유난히 기온이 높았던 지난 달 제주시 신대로 거리의 모습. 50년이 넘은 담팔수가 거대한 녹음을 자랑하고 있다. 문정임 기자


도시 기후가 악화할수록 가로수의 역할은 커진다. 가로수는 폭염 대응에 가장 효과적이고, 비용이 적게 들며, 부작용이 적은 수단으로 주목받고 있다. 가로수는 시민들이 가장 원하는 폭염 대응책이기도 하다. 2021년 서울연구원이 시민 1000명을 대상으로 폭염 대책 선호도를 조사한 결과 ‘전기요금 인하’에 이어 ‘야외 그늘확보’가 가장 선순위로 조사됐다.

현재 제주에는 740㎞ 도로연장에 7만5000본의 가로수가 식재돼 있다. 거리 길이 대비 가로수 식재 비율은 1%를 밑돈다. 전국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다.

제주도는 한해 120만그루 나무 심기를 추진하며 가로수 확장에 사활을 걸고 있다. 하지만 공원이나 자투리 공간에 작은 크기의 묘목과 관목을 주로 심다 보니, 당장 가로수의 변화를 체감하기는 쉽지 않다.

드론으로 촬영한 신제주로터리 주변 전경. 후박나무와 담팔수 등 남부지역에서 자라는 상록수가 거대한 녹음을 형성하고 있다. 제주도 제공


도시의 가로수가 도시 기후에 실질적인 대응 능력을 갖기 위해서는 나무 그늘이 넓게 형성돼야 한다. 제주의 상황은 가로수가 크게 자라기에 녹록지 않다. 가로수를 심으려면 보행로가 넓어야 하는데, 대중교통 인프라가 빈약한 제주지역은 차량 통행량이 많아 교통정체를 해소하기 위한 도로 확장에 더 몰두해왔다.

지난해 제주 인구 1인당 도로 길이는 4.8㎞, 강원(6.4㎞) 전남(5.8㎞) 경북(5.2㎞)에 이어 17개 시도 중 4번째로 길었다. 구석구석 도로 연결이 잘 되면 운전시야 확보를 위해 가로수 단절 구간이 그만큼 길어진다. 듬성듬성 식재된 가로수는 보행자의 열 스트레스를 낮추는 데 방해 요소가 된다.

도민들의 인식은 달라지고 있다.

지난해 제주도는 광양사거리~연동 입구 구간에 ‘가로변 버스차로’를 ‘중앙버스차로’로 바꾸는 공사를 추진하면서 서광로 구간 가로수를 무더기로 베어내다 도민사회 반발에 부딪혔다.

사람들은 1단계 중앙버스차로제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제주도가 섣불리 2단계 사업에 돌입, 가로수 700그루 벌채를 추진하려는 데 쉽게 동의하지 못했다.

지난 1월 오영훈 제주도지사는 해당 부서에 사업 재검토를 지시했다. 얼마 뒤 제주도는 양문형 버스 도입을 통해 도로확장 없이 중앙버스차로제를 추진하겠다는 새로운 계획을 발표했다.

비슷한 시기 제주시 오일시장 입구 제성마을에서는 도로확장 과정에서 마을 입구에 심어져 있던 벚꽃나무가 잘려나가자 주민들이 우르르 제주시청으로 몰려가 피켓을 드는 일도 있었다.

지지대 철사가 나무 생육을 방해한다며 한 시민이 민원 게시판에 올린 사진. 제주시청 홈페이지에서 발췌


행정 민원 게시판에는 지지대 조임 철사가 제거되지 않았다거나, 과도한 전정에 대해 우려하는 글을 올라온다. 좁은 식수대, 나무를 감고 올라가는 덩굴, 가로수의 성장을 저해하는 각종 현수막과 전구 설치에 대한 민원도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거대 현안에 집중하던 시민사회단체도 가로수를 거론하기 시작했다. 제주참여환경연대는 지난해부터 시민참여단을 모집해 도심 가로수를 모니터링하고 있다. 가로수 학교를 열어 가로수 시민 강좌도 진행한다.

행정기관도 달라지고 있다. 제주도는 사람 중심의 가로환경 개선에 집중하고 있다. 최근 제주도와 제주시, 서귀포시 녹지과는 합동으로 조사팀을 꾸려 도심지역 가로환경 현황 조사를 벌였다. 기계적으로 나무를 심고 전정하던 지자체가 도시 가로수의 상태를 직접 들여다 보기 시작한 것이다. 내년에는 읍면지역을 조사한다.

협업행정 지침도 새롭게 마련했다. 제주도는 도로를 개설·정비하는 과정에서 가로수 식재 또는 제거가 이뤄질 경우 도로 부서와 녹지 부서가 계획을 공유하고 의견수렴 과정을 거치도록 했다.

이 같은 지침은 실질적인 정책 변화로 나타나고 있다. 도로를 줄이고 녹지를 늘리는 도로다이어트 사업이 올해 처음 제주시청 앞 구간에서 추진되고 있다. 차도를 줄여 보행로를 넓히는 공사가 시행되는 것은 제주에선 처음이다.

내년 착공하는 화북광장~연삼로 도로확장사업은 왕복 6차선 도로를 계획하려던 것을 왕복 4차선으로 줄이고, 녹지와 보도를 늘리는 것으로 사업 계획을 세웠다.

전문가들은 기후 위기가 심화할수록 가로수에 대한 관심이 커질 것이라고 말한다. 최진우 가로수시민연대 대표는 30일 국민일보와 통화에서 “도시 기후가 악화할수록 사람들은 내 주변에 녹지공간이 충분한 지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기 시작한다”며 “도시에서 녹지를 더 늘리기 어렵다면 도로변의 가로수를 통해 나무 그늘 면적을 확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제주=문정임 기자 moon1125@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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