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사상 전파했다고? 희철이에 대한 오해 푸시라

김성수 2023. 11. 28.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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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한희철 40주기 추모식 준비하는 '친구' 이은희 박사 ⑥

[김성수 기자]

전두환 정권기인 지난 1983년 12월 11일, 그날은 나와 철도학교 동문인 한희철이 군대에서 의문사한 날이다. 희철은 1978년 12월 국립 철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철도청에 근무하다 1979년 3월 철도장학생으로 서울공대에 입학했다. 당시 철도고는 학비가 무료였고 졸업 후 철도공무원으로 취직이 100% 보장되던 터라 특히 지역의 공부 잘하는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오는 12월 11일이면 희철 이 땅을 떠난 지 어느덧 40년이 된다. 그가 죽은 날 나도 군복무 중이었다. 진실이 은폐되고, 사실이 감추어진 엄혹한 시절, 그래서 나도 당시 군대에서 그의 억울한 죽음을, 죽음의 원인을 전혀 알지 못했다. 지금은 거의 상투어가 되다시피 한 '자유', '민주주의', '사회정의'의 가치를 추구하다가 그는 23살의 젊은 나이에 망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그 희생덕분에 나는 40년이 흐른 지금도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
  
 한희철 40주기 추모식 포스터
ⓒ 이은희
 

역사는 흐르고 사람은 가도 정신만은 남는다. 산자가 망자에 대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는 그가 남긴 정신과 열망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일일 것이다. 그것은 그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다. 희철이 온갖 어려움과 시련 속에서 지켜온 가치를 손상과 상실의 위험에서 지켜내기 위해서다. 그의 삶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지를 돌아보는 일도 그의 삶을 영광으로 채색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늘 우리가 근거하고 지향해야 할 바를 그가 남긴 삶의 흔적을 통해 감별해 내기 위해서다.

이은희 단국대 초빙교수는 희철의 철도고 동기이자 지난 1970, 1980년대 희철과 함께 우리사회의 민주화를 꿈꾸었던 '절친'으로서 지금 '한희철 40주기 추도식'을 준비하고 있다. 아래는 지난 10일부터 24일까지 이 교수와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 오는 12월 9일 한희철 40주기 추모식을 준비 중인데 그동안의 추모행사와 이번 추모행사에 대해 소개하면?

"1984년 12월 8일 7시 희철의 사망 1주기를 맞으면서 철도고 친구들과 성남 YMCA 동료들, 성남 노동운동 단체와 함께 성남시 수진동 천주교회에서 제1주기 한희철 추도 미사를 개최했다. 1주기 이후에 이수열을 비롯해 희철의 동료들이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한희철 추모모임을 결성했다. 이후 서울대 가톨릭 학생회와 졸업생 모임, 성남시대학생연합회(후에 터사랑청년회) 등과 함께 30주기 추도식을 성남시 수진동 성당에서 마지막으로 개최하기까지 한희철 추모 행사를 꾸준히 개최했다.

최근 3년 전부터 추모연대의 군의문사대책위와 강제징집녹화선도공작진실규명위원회(강녹진)가 결성되며 강제징집 및 녹화사업 피해자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의 열망이 고조되고 진실위 2기에서 한희철 사건 등 군의문사 사건에 대한 재조사 결정을 하는 등 한희철 사건과 관련된 상황이 변했다. 이에 39주기를 맞는 지난해 2022년 12월 8년간의 추도행사의 공백을 깨고 희철을 기억하는 몇몇 철도고 동문과 서울대 한희철 동기들의 발의로 일단 소규모로 '한희철 추모행사'를 재개하기로 했다. 그 후 희철의 유족과 함께 한희철 추모모임이 주최하고, 추모연대 군의문사대책위와 서울대민주동문회의 후원을 받아 39주기 추모 행사를 마석 모란공원에서 개최했다.
  
 한희철 묘역
ⓒ 이은희
 

희철의 사망 40주년을 목전에 둔 지난해 39주기 추도식이 끝난 후 마석의 한 카페에 동석했던 참석자들은 '한희철 40주기 추도식'을 갖기로 했다. 그래서 40주기 추모행사는 희철을 기억하는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참석해 기억 나눔을 하는 장으로서, 또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 속에서 그의 죽음의 역사적, 현재적인 의미를 반추하며 나눌 수 있는 행사로 하자는 데 뜻을 모았다.

이후 지난 5, 6개월의 준비과정을 거친 지금 '한희철 40주기 추도식'을 준비하는 모임에는 기존에 추도식을 주도해 왔던 서울대가톨릭학생회와 그 졸업생모임, 나를 포함하는 한희철의 추모모임 이외에 새로이 희철의 철도고 동문과 서울대한희철동기모임, 서울대강제징집자모임이 참여하고 있으며 후원단체로 강제징집녹화 피해자와 군의문사사건의 진상규명운동을 주도하는 서울대민주동문회, 군의문사대책위, 강녹진, 성남민주화운동사업회, 국립철도고등학교총동문회 등이 지지와 성원을 보내고 있다."

- 한희철의 삶을 기억하고 되살리는 일이 오늘, 특히 20대 젊은 세대들에게 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지?

"공기와 물이 우리 인간의 삶에 필수적인 요소이지만, 요즘 같은 봄철의 탁하고 유독한 황사나 여름철의 극심한 가뭄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공기와 물의 중요성을 깨닫기 어렵다. 마찬가지로 언론의 자유, 집회·시위의 자유와 같은 민주주의 사회의 기본적 인권과 안전한 근로조건, 경제적 약자에 대한 최저생활비 보전, 적절한 수준의 최저임금 등 서민, 노동자, 빈민 등의 기본적 권리 등의 민주주의와 기본인권의 중요성은 불의한 정권의 인권 탄압, 경제적 수탈이나 경제적 약자에 대한 지원 박탈 등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나 세대는 깨닫기 힘들다.

지난 2002년 의문사위가 희철이 '민주화운동과 관련해 공권력의 위법한 행사로 사망했다'라고 인정한 지 21년이 지난 지금도 희철의 친구, 동료 들 중 많은 이들은 여전히 희철이 대한민국 사회에 아주 위험하고 낯선 사상과 행동을 했기 때문에 사망하게 된 것이라 오해하고 있는 듯하다.

사실 민주화운동 하기 전의 희철과 민주화운동에 눈을 뜬 이후의 희철은 본질적으로 같은 사람이다. 대학 시절 이른바 운동권의 길에 들면서 보통 대학생과 달라 보이는 점이 있었다면, 그가 이 사회의 경제사회적 약자들, 민족분단과 동족상잔의 고통을 받은 피해자들에 대한 더 많은 공감과 애정을 가졌다는 것이다. 또한 지성인이자 독실한 가톨릭교도로서 그들과 함께 보다 인간적인 사회를 만들어 나가는 데 더 많은 시간과 정열을 쏟았다는 것뿐이다.

그럼에도 많은 희철의 옛 친구들, 고교나 대학의 동문들이 그에 대한 이야기를 꺼리는 이유가 희철이 우리 대한민국에 아주 '위험한' 사상을 전파하고 행동을 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면, 나는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 번 분명히 말하고 싶다. 오해들을 푸시라! 그가 그렇게 보였다면, 그것은 그의 사상과 행동이 위험했기 때문이 아니다. 비정상적인 국가권력이 희철의 사상과 행동을 그렇게 위험하게 보이게끔 왜곡했고 그 왜곡된 이미지를 의심 없이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왼쪽 앞에서부터 한희철의 막내 동생 애영의 딸, 둘째 영숙, 애영, 이은희 박사 오른쪽 앞에서부터 한희철의 누님 한영희, 한희철 철도고 동기 안병국, 서울대 동기 이수열.
ⓒ 이은희
  
 
 시위 중인 이은희 박사
ⓒ 이은희
 
 추모식 준비하는 한희철의 친구들. 왼쪽부터 박주태(서울대동기, 철도고운전과8회) 이은희 박사, 김창홍(서울대 기계설계학과 동기), 박제호(서울대 공대 동기, 전 강녹진 공동대표).
ⓒ 이은희
 

희철이 사망 전에 남겨 놓은 글에서 그리고 그의 동료들의 증언에서 희철은 3년 정도의 짧은 민주화운동의 경험을 통해 그에게 가장 걸맞은 미래의 꿈을 찾았다. 그의 꿈은 대학을 졸업한 후에 가톨릭 신부가 되어 그가 사랑하는 대한민국의 민중들과 함께 웃고 울고 사랑하며 사는 것, 그의 삶의 모델이었던 진정한 '예수'의 삶을 따라 사는 것이었다. 불행히도 그의 꿈은 이 땅에서 실현되지 못했지만, 그가 꿈꾸던 저 세상 천국에서는 분명히 이루어졌을 것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라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말씀이 생각난다. 우리는 1980년대에 불의하게 정치 권력을 찬탈하고 집권한 전두환 등의 신군부세력에 의해 희철과 같이 무고하게 희생되었던 수많은 시민, 학생, 정치인의 삶과 죽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희철의 삶과 죽음을 돌이켜보는 이 40주기 추모 행사가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자유, 민주, 인권, 통일과 같은 기본 가치를 수호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상기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끝으로 이 기사를 읽고 감회를 나누어 주신 몇 분의 글을 인용하며 연재를 마친다.
 
제가 중3때 오빠가 돌아가셨어요. 그땐 오빠 죽음의 억울함도 모르고 철도 없어서 '어떡하지. 오빠가 왜 죽었을까?' 하고 그냥 가슴에 묻어두기만 했는데 어른이 된 후로는 오빠 기사를 접할 때마다 가슴 절절이 뜨거운 눈물이 앞을 가려요. 오빠를 포함한 애국열사들의 희생에 고개 숙이고 오늘을 되짚어 보며 우린 어떤 자세로 살아야하나 하고 반성해봅니다. 산자여 따르라. - 한애영, 한희철 여동생.
 
희철의 부친은 전쟁 상이용사로 도장 파는 일을 하며 어렵게 살았다네요. 철저한 반공주의자로 학교 반공강연 연사로 오기도. 한희철은 바로 그런 불행한 부친의 삶이 이념과 전쟁 때문이고 그래서 평화를 원했는지 모릅니다. - 원희복, 전 경향신문 기자, 철도고 한희철 동기.
 
이은희 박사의 글을 읽으며 가슴이 울컥해지고 먹먹해집니다. - 김거성, 문재인정부 청와대 시민사회수석.

한희철! 오랜시일이 지났지만 지금도 맑고 순수했던 그의 모습이 또렸이 떠오르네요. 식사 전후 꼭 성호경 긋고 식사 기도 하였고 착한 얼굴에서 평화가 가득 전파되는 기운을 받았지요~♡ 내 기억속에 늘 보고 싶었는데 기사로 접하니 더 보고 싶어요. - 천환.

저는 (한희철이) 스스로 자신의 몸에 세 발의 총격을 가할 수 있다는 것 자체를 믿지 않습니다. - 신은미, 재미동포.

신은미 선생의 위와 같은 메일을 받고 나는 내가 10년 전에 쓴 허원근 일병 의문사 사건이 떠올랐다. 당시 나는 이렇게 썼다.
 
서울고법 민사9부(부장판사 강민구)는 "M16 소총으로 흉부에 2발, 머리에 1발을 쏴 자살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어 보인다"며 "같은 총상으로 자살한 사례가 있다"고 덧붙이며 허원근 일병 사건을 자살로 결론지었다.

이런 강민구 판사의 판결을 읽고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판사님이 군대 갔다 오셨나?" 우리 60만 군대의 강력한 화기인 M16을 허일병이 우측 가슴에 1발 쏘고, 그래도 안 죽자 다시 좌측 가슴에 1발 쏘고, 또 그래도 안 죽자 3번째로 다시 머리에 1발을 쏘고 죽었다. 그래서 자살이다?

그러면 국방부는 이렇게 화력이 안 좋은 M16을 당장 교체해야 한다. 1미터도 안되는 근접에서 3발이나 발사해도 안 죽는 총을 어떻게 우리 군인들이 안심하고 사용할 수 있겠는가?

상식적으로 허 일병이 자살을 원했다면 스스로 쏘기도 힘든 M16을 처음부터 머리에 쏘았을 것이다. 나는 군대에서 M16을 수도 없이 쏴봤다. 이 총은 소리가 크고 반동도 심해서 보통사람들은 총소리만 들어도 뒤로 자빠질 것이다. 그런데 자살 할 사람이 먼저 우측과 죄측 가슴에 각각 1발씩 2발을 쏴보고 그래도 안 죽자 머리에 1발을 다시 쏘고 자살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도저히 말이 안 된다.

나는 강민구 판사가 M16으로 사망한 사망자들의 상처를 보았는지 의문이 든다. M16을 가슴에 맞으면 등 쪽으로 주먹이 들어갈 정도로 큰 구멍이 난다. 그런데 그런 주먹만한 총상을 두 번이나 입고서 다시 머리를 쏴서 자살했다는 것은 군대를 다녀 온 사람 중에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전혀 납득 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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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의문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자살했다는 한희철) 가슴에 난 삼각형 모양의 세 발의 (M16) 총상과 달리 등 뒤에는 3발의 (M16)총상이 일(ㅡ)자형으로 나있었다는 모순되는 검시관의 시신 상태에 대한 보고서의 모순점 등은 의문사위가 인용한 법의학적 판단에 여전히 의문점이 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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