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컷칼럼] 잊지도 말고 조장하지도 말라
지난 2일 김석균 전 해양경찰청장이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판결을 받았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9년 7개월 만이다. 김 전 청장을 비롯한 해경 간부들은 참사 당시 구조에 필요한 주의 의무를 다하지 않아 303명을 숨지게 하고 142명을 다치게 한 혐의(업무상과실치사 등)로 재판을 받아왔다. 박근혜 정부 때 발생한 사고 대처의 법적 책임을 규명하는 작업이 문재인 정부를 지나 윤석열 정부에 와서야 결론이 난 셈이다.
해경 간부 모두가 면죄부를 받은 건 아니다. 참사 현장에서 구조를 지휘했던 김경일 당시 123정장은 오래전에 징역 3년의 중형이 확정됐다. 김문홍 전 목포해양경찰서장과 이재두 전 3009함 함장은 사건 보고와 관련해 허위문서를 작성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준석 세월호 선장에겐 살인 혐의로 무기징역이 선고됐다.
세월호 구조 책임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나오기 나흘 전인 지난달 29일엔 이태원 참사 1주기 추모 행사가 열렸다. 이날 오전 6시쯤 이태원 사고 현장을 돌아봤다. 행사가 준비되기 전이어서 평상시 그대로의 이태원을 볼 수 있었다. 침울하리란 예상과 달랐다. 밤새 술 마신 다양한 국적의 청년들로 거리가 북적였다. 천사 복장을 비롯해 핼러윈 차림을 한 남녀도 종종 눈에 띄었다. 159명이 숨진 사고가 난 골목의 한 술집에선 경쾌한 음악이 밖으로 크게 새 나오고 있다.
골목의 대로 쪽 입구엔 추모공간이 마련됐다. 벽엔 시민들이 붙인 쪽지가 가득하다. 옆에서 40대 유튜버로 보이는 서너 명이 촬영하고 있다. 한 외국인 청년이 소주를 들고 와 컵에 따라두고 한참을 울며 앉아 있다. 그 뒤로 파티 복장의 여성 두 명이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며 걸어간다. 주변엔 밤샘 영업을 하는 케밥집들이 젊은이들로 붐빈다. 한쪽에선 추모를 하고 한쪽에선 핼러윈 파티를 즐기는 모습에서 이태원이 일상을 찾아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이날 오후 이태원과 서울광장에서 열린 추모식에 윤석열 대통령은 오지 않았다. 대신 어릴 적 다녔던 서울 성북구 영암교회에서 추모 예배에 참석했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 오늘은 제가 살면서 가장 큰 슬픔을 가진 날”이라고 했다.
‘이태원 1년’ 행사 안 간 대통령
세월호 참사 1주기 상황 떠올라
희생자와 유족을 위로하는 추모 행사는 정부 주요 인사가 불참한 채 진행됐다. 인요한 국민의힘 혁신위원장과 오세훈 서울시장 등의 참석으로 ‘반쪽 행사’를 겨우 면했다.
세월호 참사 1주기 때도 대통령이 추모 행사에 참석할지 이목이 쏠렸다. 박 전 대통령은 당일 추모행사에 참석하지 않고 중남미 4개국 순방 차 콜롬비아로 출국했다. 출국 전 박 전 대통령은 전남 진도 팽목항을 찾아 “세월호 사고 1주기를 맞아 희생자와 실종자분들을 진심으로 애도한다”고 말했다. 당시 광화문광장 추모집회에선 “박근혜 퇴진”구호가 나오고 경찰이 물대포로 대응하면서 희생자 어머니가 갈비뼈 골절상을 입었다. 박 전 대통령은 최근 중앙일보에 연재하는 회고록에서 “세월호 참사는 내 재임 중 벌어졌던 일들 가운데 가장 처참했던 기억으로 남아있다”며 “당시 국정을 책임졌던 내가 누구보다 큰 비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왔다”고 했다.
그때도 해경청장을 사퇴시키지 않았고 훗날 법적 책임을 묻는 절차가 진행됐다. 해경 수뇌부 재판의 선례를 따른다면 이태원 참사의 법적 책임은 차차기 대통령 취임 직후쯤 가려진다는 계산이 나온다. 부실 대응의 책임을 사법적 판단의 영역으로 넘기는 일이 얼마나 허망한지 말해준다.
야당 인력 동원도 추모에 부담
이태원 참사 1주기를 앞두고 더불어민주당에선 시·도당에까지 추모대회 참석을 독려했다. 김대기 대통령비서실장은 지난 7일 국회 운영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윤 대통령의 불참 이유를 묻는 질의에 “정권퇴진 운동을 하는 단체들이 많았다”며 “민주당은 총동원령을 내렸다”고 답했다. 추모식에선 인요한 위원장에게 “한국인도 아니지 않으냐”는 비아냥이 나오기도 했다. 이런 정치권의 움직임이 참사 유족에게 힘이 되기보단 오히려 많은 국민을 등 돌리게 한다는 사실을 세월호 참사가 가르쳐줬다. 민주당이 유족의 한 발 뒤로 물러서 있어야 정부와 여당이 추모 대열에 합류할 가능성이 커진다.
맹자는 ‘공손추’에서 ‘물망, 물조장(勿忘, 勿助長)’을 강조했다. 마음으로 잊지도 말고, 억지로 조장하지도 말라는 의미다. 철학자 강신주는 “‘망’과 ‘조장’ 사이 혹은 ‘물망’과 ‘물조장’ 사이 그 어딘가를 지키며 균형을 잡아야 한다”며 “아끼는 일은 정말 힘든 일”이라고 했다. (『한 공기의 사랑, 아낌의 인문학』)
이 균형점을 찾아 참사를 대할 때 비로소 우린 유족을 제대로 위로하게 된다.
글=강주안 논설위원 그림=윤지수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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