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인간시장'까지... 처참했던 병자호란 이후

이준목 2023. 11. 8.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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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리뷰] tvN <벌거벗은 세계사>

[이준목 기자]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tvN
 
병자호란(丙子胡亂)은 1636~1637년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한 전쟁으로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판도를 크게 뒤바꾼 사건이었다. 청은 병자호란을 통해 조선을 굴복시켰고 이후 명나라까지 멸망시키며 중원을 차지한 동아시아의 패권국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리고 조선은 패전의 대가로 국가와 군주의 위상 추락, 후계구도의 혼란, 군사-경제적 부담까지 사회를 지탱해온 모든 질서가 흔들리는 대혼돈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11월 7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 124회에서는 '드라마 <연인>으로 본 청의 시작과 병자호란'편을 통하여 조선사 최대의 굴욕으로 여겨지는 병자호란과 청 제국의 탄생 배경을 조명했다. 조영현 고려대 역사교육과교수가 이날의 강연자로 나섰다.

드라마 <연인> <추노>, 영화 <남한산성> <최종병기 활> <올빼미> 등 한국 대중문화에서 조선 인조 시대와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은 꾸준히 등장하고 있다. 최근 인기리에 방송중인 MBC 드라마 <연인> 역시 비극적인 시대의 격랑에 휩쓸린 젊은 연인들의 로맨스를 다루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여기서 병자호란은 드라마의 서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배경으로 등장하며 전쟁, 포로 납치, 사회적 편견, 정치싸움의 희생양 등 주인공들이 겪게 되는 고난들은, 직간접적으로 모두 청나라와 조선의 관계에서 비롯된다.

임진왜란과 누르하치의 성장

청나라의 뿌리는 여진족(만주족)이며 퉁구스계 종족 집단 가운데서도 만주 일부 지방에 살았던 숙신-말갈계의 후손인 유목 민족이었다. 농경 민족 국가인 조선이나, 중국의 한족 왕조에서는 이들을 '오랑캐'로 부르며 천시했다. 오랑캐는 몽골어 '오랑카이'에서 유래하여 들과 산에서 문명없이 사는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유목인들을 낮잡아 부르는 말이다.

16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여진족은 거대한 명나라와 조선 사이에서 변방의 작은 나라에 불과했다. 이들의 규모는 중원을 지배한 명나라와 비교하면 1/100밖에 되지 않았지만 뛰어난 궁술과 기마술을 갖춘 '전투민족'으로 일찍부터 동아시아에서 명성을 떨쳤다. 오늘날 여진족과 청나라 시대하면 떠올리는 트레이드 마크가 된 '변발'도 전투에서 위생과 편의성을 고려하여 앞머리와 정수리를 밀어버린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또한 여진족은 흔한 선입견과 달리 유목생활만 했던 것이 아니라 농사를 병행하며 생활했다. 강력한 전투력과 농업을 통한 정착생활의 안정성이라는 두 가지 강점을 모두 갖춘 여진족은 다른 유목민족들에 비하여 빠른 성장을 위한 잠재력을 갖춘 민족이었던 것.

명나라는 이러한 여진족의 성장 경계하여 이이제이(以夷伐夷)를 노선으로 삼아 항상 여진족의 분열을 유도하는 전략을 시도했다. 실제로 여진족은 해서 여진-야인 여진-건주 여진으로 분열되어 오랫동안 잠재력에 비하여 힘을 하나로 모으지 못했다.

하지만 16세기 들어 누르하치가 등장하여 30여 년에 걸쳐 분열된 여진족 세력을 하나로 통합하고 후금을 건국하면서 동아시아 판도에 일대 태풍을 불러오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누르하치의 성장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 또다른 사건은 바로 임진왜란이었다. 조선과 명나라는 7년에 걸친 일본과의 전쟁으로 인하여 여진족 관리를 신경쓸 여력이 없었다. 결과적으로 조선과 명나라가 임진왜란을 승리하기는 했지만, 그 사이 힘을 키운 여진족에 차례차례 정복 당하는 비극의 씨앗이 된다.

힘을 키운 누르하치는 결국 여진족을 통일하고 후금을 건국하며 본색을 드러낸다. 누르하치는 독자적인 만주 문자를 만들고 팔기군 제도를 정비하여 철저한 준비를 마친뒤 마침내 명나라를 향한 전쟁을 선포했다. 누르하치의 후금군은 빠른 기동력의 기마병을 활용하여 명군을 각개격파하며 1619년 사르후 전투에서의 대승을 기점으로 명을 몰아내고 만주의 패권을 완전히 장악한다.

후금군은 기세를 이어 명의 본토를 노렸지만 산해관(山海关)에서 명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히며 주춤한다. 산해관을 지킨 장수는 명나라의 마지막 명장으로 꼽히던 원숭환(1584-1630)이라는 인물이었고, 당시 최강병기로 꼽힌 화포 홍이포(紅夷砲)의 화력을 앞세어 6배가 넘는 후금군을 격퇴하는 전공을 세운다.

승승장구하던 누르하치는 산해관 공략을 위한 영원성 전투(1626년)에서 명군에 패배한 후 8개월 만에 중원 정복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 그 뒤를 이은 인물은 누르하치의 8남은 홍타이지(청 태종 숭덕제/1592-1643)였다.

'청 실록'에 따르면 홍타이지는 독서를 즐겨 경사에 밝고 전략에 뛰어나며 재능이 비범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누르하치는 홍타이지를 자신의 눈과 같은 존재로 평가하며 유독 총애했다.

하지만 홍타이지는 즉위하고도 당장 전권을 휘두르지는 못하고 막강한 권력을 지니고 있던 형제들과 함께 사실상의 공동 통치를 해야 했다. 홍타이지로서는 황제의 세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형제들을 누를 만한 확실한 업적이 필요했다. 아버지 누르하치의 숙원이던 명나라 공략이 산해관에서 막혀 지지부진하던 홍타이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조선이었다.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tvN
 
홍타이지는 명나라 장수 모문룡의 군대가 후금의 후방이자 조선의 영역권이었던 가도에 주둔하고 있다는 것을 빌미로 이들에 대한 토벌을 핑계삼아 조선 침공을 위한 명분을 잡았다. 당시 후금은 교역단절로 극심한 식량난에 허덕이고 있어서 보급처가 필요하던 상황이었다. 때마침 조선에서는 인조 반정이 일어나 중립외교를 펼치던 광해군이 폐위되고 명과의 사대관계를 강조하던 인조 정권이 등장하면서 홍타이지는 광해군의 복수를 빌미로 전쟁을 일으켰다.

1626년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며 홍타이지의 후금군이 첫 번째로 조선을 침공한다. 기병을 앞세운 후금군은 파죽지세로 진격해왔고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한다. 바다를 넘어 강화도를 공략할 만한 수군이 없었던 데다 어차피 전쟁을 오래 끌 생각이 없었던 홍타이지는 조선에 화친을 요구했다. 양국이 형제의 맹약을 맺고 조선이 후금을 형님으로 모시면서 막대한 공물을 바치라는 조건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조선 정부는 이를 수락한다.

조선 공략에 성공한 홍타이지는 다시 명나라와의 전쟁에 나섰다. 원숭환을 제거하지 않고서는 명나라를 완전히 무너뜨릴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홍타이지는, 명나라 조정의 부패를 이용하여 원숭환을 모함할 계획을 세운다. 명나라 숭정제는 홍타이지의 이간계에 넘어가 원숭환을 체포하여 끝내 처형시키고 만다. 최후의 명장을 허무하게 잃은 명나라는 설상가상 각지에서 농민반란까지 일어나 더욱 사면초가에 몰린다.

홍타이지는 1636년 국호를 청(大淸國)으로 바꾸고 황제국을 선포한다. 홍타이지 집권 이후 청나라는 10년 사이에 조선과 몽골을 정벌하고 홍이포까지 확보하며 세력이 더욱 융성했다. 홍타이지의 황제 선포는 만족주의 '한'과 몽골족의 '칸'을 넘어서 대륙 전체의 지배자가 되겠다는 야심을 선언하는 장면이었다.

한편 홍타이지는 황제가 된 후 다시 한번 조선에 눈을 돌린다. 홍타이지가 두 번째로 조선 침략을 추진한 이유는 대외적으로 황제의 위엄을 과시하려는 의도와 함께, 정묘호란 이후에도 명과의 관계를 포기하지 않은 조선을 응징하여 후방을 안전하게 하고, 명나라 공격을 위한 물자를 확보하려는 목적이 포함되어 있었다.

일설에 따르면 즉위식에 강제로 참석한 조선의 신하들이 황제에 대한 복종을 의미하는 삼배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를 끝까지 거부한 것이 조선 재침공을 결심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국제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조선 정권은 1636년 인조가 각지에 '절화교서(화친을 끊는 것)'를 내려 후금과의 국교 단절을 선언하면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다. 당시 조선은 청나라의 거듭된 갑질과 무리한 공물요구로 반청감정이 극에 달한 상태였다. 그러나 이는 조선 침공이 명분을 찾고 있던 홍타이지로서는 때마침 울고 싶은데 뺨 때려준 격이었다. 홍타이지는 "조선이 먼저 형제의 맹약을 끊었다"고 질책하며 전쟁의 책임을 조선 탓으로 돌렸다.

드라마 <연인>에서는 극 중 주인공 이장현과 소현세자의 대화를 통하여 병자호란의 발발 원인을 논쟁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당시 인조 정권은 외부로는 청의 전쟁 압박, 내부로는 명에 대한 사대를 강조하는 사대부들의 비난 여론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장현은 "어차피 저들은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조선을 침략했을 거다. 조선의 임금과 조정이 나약하고 무능해서 전쟁이 일어났다는 말은 그저 책임을 조선에 떠넘기려는 술책일 뿐"이라고 일갈한다.

과거에는 전쟁의 원인을 국제정세를 읽지 못한 무능한 인조와 조선 사대부들의 책임으로만 보는 시각이 강했다. 하지만 각종 사료들을 통하여 인조 정권의 실제 외교 노선이 광해군 시절의 중립적 실리외교와 큰 차이가 없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현대 사학계에서도 조선의 내부적인 문제나 외교전략과는 별개로, 당시 청나라의 사정을 고려할 때 무슨 핑계를 대서든 조선을 침략했을 것이라는 해석이 유력해지고 있다.

'제국주의의 폭력성'에서 비롯된 비극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tvN
 
1636년 결국 청나라는 병자호란을 일으켜 조선을 다시 침공한다. 홍타이지의 전략은 직도(수도를 기습하는 것)였다. 청나라는 상인으로 위장한 기병들을 앞세워 빠른 속도로 진격했다. 당시는 소빙하기로 전 세계의 기온이 크게 하락한 시기였고, 압록강이 얼어붙으며 청나라 기병들이 거침없이 진군할 수 있었던 길이 되어버린 것도 조선에게는 불운이었다.

조선 정부의 또다른 판단착오는 청군에 대한 대응전략이었다. 조선은 청군과의 전면전을 피하여 산성 위주의 공성전을 지시했지만, 청군의 목표는 처음부터 왕을 속전속결로 잡는 것이었기에 오히려 속수무책으로 진격을 방치하는 결과가 되어버렸다. 청군이 한양까지 코앞에 이르러서야 장계를 받은 조선 조정은 황급히 피난길에 올랐지만 원래 의도했던 강화도로 가는 길이 막히면서 결국 가까운 남한산성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청군은 인조가 있는 남한산성을 포위한다. 당시 산성에는 1만 2천에서 1만 8천 정도의 조선군이 주둔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청군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외부에서 남한산성을 구원하기 위한 근왕군이 달려오지만 훈련도 되지 못한 지원병들은 청군에게 잇달아 허무하게 격파당했다.

홍타이지와 두 달에 걸쳐 산성을 포위하고 양국이 군신의 예를 맺을 것과 인조가 직접 나와 항복할 것을 조건으로 요구했다. 청과 조선은 협상을 위하여 여러 차레 국서를 주고 받았는데 홍타이지는 "짐이 대군을 이끌고 너희 8도를 무찌르려고 하는데, 네가 부모처럼 섬기는 명나라가 어떻게 너희를 구해주는지 궁금하다"며 조롱하기도 했다. <병자록>에 따르면 청군은 포로로 잡은 조선인들을 잔혹하게 학살하고 유기하여 공포감을 유발했고, 홍이포를 산성에 발사하여 위협하면서 항복을 재촉했다.

그런데 당시 청나라도 전쟁을 오래 끌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최근 학계의 연구에 따르면 당시 청군의 진영에는 천연두에 크게 유행했다고 하며, 홍타이지가 남한산성을 적극 공격하지 못하고 항복을 재촉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연인>에서는 이를 각색하여 천연두 정보를 입수한 조선이 항복에 유리한 조건을 이끌어냈다는 식으로 재해석하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 조선 조정에서는 이러한 청군의 내부사정을 알 길이 없었고, 압박에 쫓긴 인조는 결국 청의 요구조건을 받아들여 항복을 결심한다. 성 밖에 나온 인조는 왕의 용포가 아닌 하급관리의 옷을 입고 홍타이지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례를 올린다. 이것이 바로 한국 역사상 가장 굴욕적인 사건 중 하나로 꼽히는 '삼전도의 굴욕'이다.

양국은 '정축조약'을 맺고 조선은 청나라에 막대한 세폐와 원군 제공까지 요구 받게 됐다. 조선인들은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고통을 받았다. 청나라는 많은 조선인 포로들을 잡아갔고 인조의 아들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까지 볼모로 데려갔다.

병자록에 따르면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 수도 인근 60만 인구 중 상당수가 조선인이었다'고 한다. 조선에서 끌려간 포로들은 '피로인'으로 불리우며 노예시장에게 사고팔리는 물건처럼 거래되었다. 특히 여성 피로인들은 청나라 장수의 첩이 되기도 하고, 이를 질투한 청나라 여인들이 뜨거운 물을 끼얹고 손가락을 자르는 등 온갖 학대에 시달렸다고 한다. 견디다 못해 도망가다가 잡힌 조선 포로들이 다시 잡하면 다리 힘줄을 잘리는 잔혹한 처벌이 뒤따랐다.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tvN
 
여성 피로인들은 조선으로 운좋게 살아 돌아가도 환영받지 못했다. 이들은 유교 사상이 지배하던 가부장적이고 남성중심사회였던 조선에서 '오랑캐에게 몸이 더럽혀졌다'는 이유로 같은 조선인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아야 했다. 이러한 조선 포로와 여성 피로인들의 참상은 <연인>에서도 잘 묘사되어 있다.

조선에 잔혹한 비극을 초래한 홍타이지는 6년 만인 1643년 51세로 급사했고 6세였던 아들 순치제가 뒤를 이었으나, 생전 홍타이지가 경계했던 동생 도르곤(누르하치의 14남)이 섭정왕이 되면서 권력이 넘어간다. 홍타이지가 죽고 불과 1년 만에 명나라는 이자성의 농민반란으로 멸망한다.

이후 청제국은 이자성과 명나라 저항세력을 몰아내고 명실상부한 대륙의 지배자가 된다. 전성기의 청나라는 전 세계 인구의 3분의 1를 지배하는 거대한 제국을 건설하며 중국의 마지막 왕조가 된다. 

'무력은 모든 것을 정복하지만 그 승리는 오래가지 못한다.' 미국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의 격인이다. 정묘-병자호란의 진정한 원인은 약소국의 잘못이 아닌 강대국이 지닌 '제국주의의 폭력성'에서 비롯된 비극이었다.

조선사 최대의 굴욕적인 사건은 중국대륙의 패권 교체라는 거대한 역사적 흐름과 맞물려서 발생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가장 큰 희생양이 된 것은 결국 힘없는 약자인 서민과 여성들이었다. 역사의 흐름을 이해하는 올바른 지혜, 평화를 지켜낼 수 있는 힘을 갖췄을 때만이 같은 비극을 피할 수 있다는 교훈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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