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정의 생활의 발견] 말이 아프고 또 무섭다는 말이지

2023. 11. 8. 0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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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정 시인

왜 이렇게 뭐가 많냔 말이지. 볼펜 말이지. 책 말이지. 찻잔 말이지. 옷 말이지. 쇼핑백 말이지. 운동화 말이지. 가만, 그러다가 배송할 물건을 건네는데 퀵서비스 기사님이 “신발을 보니까 식구가 참 많으신가 봐요” 하는 말이지. 부끄러움도 모르고 이 얘기를 전했다가 “그러고 보니 언니 발은 지네네요” 엉겁결에 별명이 생겼다는 말이지. 가만, 어쩌다가 이 말이란 발이 이다지도 많은 것투성이를 쏜살같이 지나쳐 내 앞에 오게 됐는가 하면 발 달린 말의 질주가 언제나 부지불식간에 이뤄져서가 아닐까 말이지.

심보선,‘인중’. [일러스트=김지윤]

얼마나 무시무시하냐면 그것은 어느 날 엄마의 검은 머리 위에 순식간에 내려앉은 흰 서리 같다는 말이지. 세월 말이지. 나이 듦 말이지. 어찌할 수 없음 말이지. 손으로 턴다 해도 물로 감긴다 해도 참빗으로 빗어낸다 해도 그 말의 바쁨은 도무지 멈춰 세울 수가 없어 제 속도를 못 이긴 어느 날 뒤집힌 물방개처럼 배를 하늘로 까고 사지를 부르르 떠는 날이 온단 말이지.

가만, 그러니까 말 말이지. 지금껏 내가 뱉고 살아온 말 말이지. 내 입에서 튀어나간 내 뱃속 내 말임에도 어느 때 여느 일 앞에 저 말은 내 말이 아니라며 빤한 거짓말로 나를 부정하는 나의 모자람 말이지. 왜 나는 앞보다 뒤일까 하면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 내 뒤통수를 못 보는 이가 나뿐인가 하는 두려움은 또 알아 말이지. 뒤에서 할 말 같으면 앞에서 해보란 말이지.

‘뒷담화’란 단어 뒤에 ‘하다’보다 ‘까다’가 어울림에 우리말은 어쩌면 이렇게 볶은 깨처럼 고소할까 고소하다 쓰는데 일순 입이 소태맛이더란 말이지. “네가 그만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편지 한 통에 내 말본새를 되짚던 나날 가운데 친구가 마음을 앓은 지 꽤 되었다는 얘기에 일순 마음을 놓는 내가 영 마음에 안 들었단 말이지. 그리하여 뭐가 많아서 좋은 건 색색으로 수북이 쌓여 있는 낙엽뿐임을 알았다는 말이지.

김민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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