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 서서 먹을 만... 날 '다른 존재'로 만들어주는 놀라운 음식

최우규 2023. 11. 5.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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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에세이] 서대문 석교식당에서 맛보는 양질전환의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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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규 기자]

 순댓국 (자료사진)
ⓒ 연합뉴스
 
순댓국을 좋아한다. 어렸을 적엔 손도 안 댔다. 어느 순간 좋아하게 됐다. 아마도 취직해서 술을 본격적으로 마시게 되면서인 것 같다.

나는 순대를 새우젓에 찍어 먹는다. 지역마다 찍어 먹는 양념을 달리하는 모양이다. 막장에 찍어 먹는 곳도 있고, 초고추장이나 소금을 간택하는 곳도 있다. 우리 집안은 새우젓 파(派)였고, 나도 그 입맛을 따랐다.

순댓국을 먹는 나만의 방식이 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순댓국이 나오면 빈 접시에 순대는 몽땅, 고기와 내장은 절반 정도 덜어놓는다. 뜨거운 걸 잘 못 먹기 때문이다. 그리곤 국물에 밥을 만다. 밥알에 국물이 잘 배야 한다. 여기에 새우젓 국물을 반 숟가락 정도 넣어 간을 맞춘다. 부추와 들깻가루는 과하지 않게 적당량만.

준비가 끝났다. 이제 남들은 눈치채지 못하는, 나만의 성찬이 시작된다.

순댓국 한 그릇에... 어느새 나는 볼빨간 사춘기다  

순대 하나를 골라 "후 후" 분 뒤 새우젓에 살짝 찍어 입에 넣는다. 단맛과 짠맛, 즉 단짠 원조는 순대가 아닐까.

콜라겐 껍질보다는 돼지 내장 껍질 순대가 좋다. 깨물었을 때 어금니에 저항하는 적당한 탄력의 식감. 이것만으로도 순대는 가성비 최고 음식 옥좌에 앉을 만하다.

순대를 정성껏 씹어 삼킨 뒤에는 소주 한 잔을 재빨리 털어 넣어야 한다. 아, 이는 선택의 문제다. 난 반주(飯酒)파다. 이 또한 취직해서 만들어진 기호다.

한 잔 소주로 순대 특유의 쿰쿰한 맛이 싹 가신다. 입안은 20도 안팎 알코올의 달면서 쓴맛으로 코팅된다. 심신 모두가 다음 한 입을 먹기 위한 최적의 상태로 리셋된다.

순댓국집에는 순대와 돼지 부속 고기가 함께 들어있는 '보통', 돼지 부속 고기는 뺀 '순대만', 여기에 양이나 질을 좀 더 올린 '특' 등 세 가지가 있다. 물론 순대 없이 돼지 부속 고기만 주기도 하는데, 이는 순대가 안 들었으니 여기서는 논외다.

요즘 '보통'을 주문하면, 한 그릇에 순대가 네댓 점 정도인 것 같다. 아쉬울 법하다. 한편으로 다른 고기와 밥까지 말아 먹을 요량이면 그 양이 적당하다고 볼 수 있다.

순대를 어느 정도 맛보았으면 고기 차례다. 머리 고기, 귀, 오소리감투(돼지 위) 등 부속 고기가 대기 중이다. 고기 조각을 숟가락에 수북이 쌓아 새우젓 새우 한두 마리를 고명처럼 올린다. 뜨거우니 조심해야 한다. 한입에 물으면 그렇게 고소할 수 없다.

양반님네나 서양에서는 버렸을 이 잉여(剩餘)가 우리 순대국밥에서는 고갱이라 해도 고개를 주억거릴 이가 많으리라. 오도독오도독 씹히는 질감을 즐기면 족하다. 물론 이때에도 소주 한 잔이 뒤따라야 제격이다.

건져 놓은 순대와 고기를 어느 정도 먹었으면 밥을 먹어야 한다. 앞선 과정 덕분에 국은 너무 뜨겁지 않게 내 입에 마침맞게 됐다.

국물이 잘 밴 밥알에 남은 부속 고기를 숟가락으로 최대한 많이 뜬다. 볼이 미어질 만큼 많이 넣어야 제맛이다. 국물의 감칠맛과 쌀밥의 쫀쫀한 촉감이 그렇게 궁합이 잘 맞을 수 없다. 두 번째 숟갈에는 밥과 고기와 깍두기가 올라간다. 순댓국 삼합이다. 마지막으로 소주 한 잔이 폴로 스루(follow through)를 해줘야 한다.

그렇게 순댓국 한 그릇에 소주 반병(을 지향하지만, '아차' 하는 순간 한 병이 된다)을 비우고 가게 밖으로 나온다. 이때의 나는 양질 전환을 한 사람이다. 가게를 들어갈 때와는 전혀 다른 존재가 돼 있다.

아까는 배고프고 기운 빠진 데다 희망이 절망으로 절반쯤 넘어간 우울한 사람이었을 지도 모른다. 아무 생각도 없이 그저 허기를 달래고 싶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한 숟가락, 한 숟가락, 한 잔, 한 잔 감칠맛과 둔중한 알코올이 쌓이면서 아까의 우울은 1만 광년 바깥으로 밀려나 버렸다. 국밥집 옆 양장점 쇼윈도에 비친 나는 볼빨간 사춘기다.

여기서 소설가 구보씨처럼 다시 거리를 거닐지 아니면 차가운 아메리카노 한잔으로 정신의 고삐를 다시 당길지는 당신 마음에 달렸다.

석교식당에서의 '양질 전환'
 
▲ 석교식당 순댓국 석교식당의 순댓국과 반찬. 양념장을 풀기 전 오리지널 그대로다.
ⓒ 최우규
 
동네에 재래시장이 있다. 서울 서대문구 영천시장이다. 이곳 중간쯤에 석교식당이 자리하고 있다. 들어서자마자 쿰쿰한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탁자와 의자는 반듯하게 서 있지 않다. 가게 기둥과 냉장고, 부엌 등을 요리조리 피하면서 놓았기 때문이다. 각 잡힌 서양 성벽이 아니라 아스텍 피라미드처럼 삐뚤빼뚤하면서도 아귀를 맞춰 놓았다.

벽에는 시장, 총리, 장관, 대선 후보 등의 사진과 사인이 잔뜩 걸려 있다. 얼굴과 글귀를 맞춰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재외 공관장 회의 때 이 집에서 순댓국을 날라다 먹었다.

김치는 2종이다. 삶은 양배추, 무채, 고추와 양파가 기본 반찬이다. 공깃밥은 보통 식당보다 3분의 2밖에 안 준다. 처음엔 불만이었다. 순댓국에 부속 고기가 많아서 그런 것 같다. 나는 공깃밥을 추가해 본 적이 없다.

맛있다는 순댓국집을 꽤 다녀봤다. 내 입맛엔 이 집이 제일 잘 맞는다. 이 집이 제일이라고 주장하지는 않겠다. 입맛처럼 주관적인 게 또 있을까.

19세기 독일 철학자 루트비히 안드레아스 포이어바흐(Ludwig Andreas Feuerbach)는 'Der Mensch ist was er isst'라고 했다. '먹는 게 그 사람'이라는 뜻이다. 다시 풀어쓰면 먹는 것을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는 말이다. 맞는 말 같다.

내가 먹고 마시는 게 내 표징(表徵)이다. 접대 도우미가 나오는 호사스러운 술집에서 기름진 음식에 최고급 양주를 마시는 사람과, 가족과 둘러앉아 "오늘은 고기가 많이 들었네"라며 김치찌개에 소주 한잔을 하는 사람은 음식 차이만큼이나 다르다. 그렇기에 정치인들은 불리하면 재래시장에 달려가서 어묵과 떡볶이를 먹으며 서민 음식 애호가 흉내를 낸다.

석교식당에는 한 그릇에 6000원 할 때부터 다녔다. 직장이 멀어져 한참 발길을 끊었다가 1년 전부터 다니고 있다. 그새 내부 리모델링을 했다. 순댓국 보통은 1만 원을 받는다. 그래도 소주 반병으로 양질 전환까지 맛보니 잘된 일 아닌가.  

너무 유명해져서 붐비는 시간에는 20분 정도 서서 기다릴 수 있다. 애매한 시간에 가면 사장님은 "재료가 떨어졌어요"라고 손사랫짓하신다. 아쉽지만 반갑다. 이 집 맛이 나만의 기호가 아닌, 보편의 것이라는 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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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일기는 일기장에'라는 댓글에도 이곳에는 세상 사는 이야기가 많이 올라옵니다. 저도 제 사는 이야기 한 꼭지 올립니다. 제 소셜미디어에도 쓴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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