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멸치 대신 정어리 액젓 담근다…김장까지 바꾼 온난화 [극과 극 한반도 바다]

박진호, 안대훈 2023. 11. 3.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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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방멸치 없고 쓰레기만 가득


지난 9월 17일 경남 남해군 지족해협에 있는 죽방렴 통발 안에 멸치 대신 해양쓰레기가 가득 차 있다. 안대훈 기자
지난 9월 17일 오후 3시20분 경남 남해군 지족해협. 이곳에서 남해 대표 특산물인 ‘죽방멸치’를 26년째 잡아 온 어민 박대규(63ㆍ죽방렴자율관리공동체위원장)씨는 한숨부터 내쉬었다. 선착장에서 약 500m 떨어진 바다에 설치한 ‘죽방렴(竹防簾)’에 멸치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아서다. 참나무 기둥에 대나무 발을 두른 지름ㆍ높이 각 10m인 거대한 원통형 통발에는 해양 쓰레기만 가득 차 있었다. 죽방렴은 남해 지족해협에만 있는 전통 어업으로, 좁은 물길에 함정 어구를 둬 조류에 떠내려온 고기를 잡는 방식이다.
경남 남해군 지족해협에 있는 죽방렴 통발 안에서 박대규 죽방렴자율관리공동체위원장이 해양쓰레기를 치우고 있다. 안대훈 기자
박대규 죽방렴자율관리공동체위원장이 죽방렴 안에서 2시간 가까이 해양쓰레기를 치우고 얻은 수확은 바다장어 8마리와 꽃게 4마리가 전부였다. 안대훈 기자

박씨가 2시간 가까이 해양쓰레기를 치우고 얻은 수산물은 바다장어 8마리와 꽃게 4마리가 전부였다. 정상적인 상황이면 사각형 바구니 5~7개(100~140㎏)는 생멸치로 가득 찼다. 마른멸치 20~25㎏을 만들 양이다. 박씨는 “멸치 구경하기 어렵다”며 “지난 4월부터 6개월 가까이 일했는데, (마른 멸치) 200㎏밖에 못 만들었다. 이 정도 기간이면 1t정도는 만들었어야 했다”고 말했다.


‘보물 멸치’ 안 잡혀, 무형문화재도 ‘흔들’


2018년 11월 경남 남해군에서 한 어민이 죽방렴으로 잡은 멸치를 말리고 있다. 한 번의 조업으로 어획한 양이다. 사진 박대규 죽방렴자율관리공동체위원장
죽방멸치는 수협에 위판하지 않고 주로 개별 판매하는데, 품질에 따라 1㎏당 5만~30만원을 받아 ‘보물 멸치’로 통한다. 일반 멸치보다 적어도 5배는 비싸며, 백화점에선 90만원에 판매되기도 한다. 그물로 잡는 다른 멸치와 달리, 어획 과정에서 비늘과 살이 상하지 않아 맛과 상품성이 좋기 때문이다.

죽방멸치 어획량은 감소세다. 남해군에 따르면 2020년 55t에서 2021년 31t, 2022년 30t으로 줄었다. 남해군과 어민은 ▶수온 상승 등 해양환경 변화 ▶잦은 태풍ㆍ호우로 인한 해양쓰레기 유입 ▶정어리떼 출몰 등을 원인으로 본다. 군 관계자는 “올해 특히 멸치가 안 잡힌다. 해양 환경이 변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했다.

경남 남해군 지족해협에만 있는 죽방렴. 물살이 센 좁은 바다 물목에 대나무발을 세워 물고기를 잡는 원시어업으로, 무형문화재이자 국가중요어업유산이다. 안대훈 기자

이 때문에 550년 넘게 맥을 이어온 문화유산 ‘죽방렴’마저 존립기반이 흔들리고 있다. 죽방렴은 국가무형문화재ㆍ명승ㆍ국가중요어업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박씨는 “앞으로 5~10년 동안 멸치가 안 잡히면 문화재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라며 “집중 호우때 남강댐 수문을 열면 쓰레기가 쌓이고, 멸치 서식을 방해하는 정어리까지 득실대니 죽을 맛”이라고 했다.


남해 멸치 ‘반토막’…서해로 갔나


죽방멸치만 안 잡히는 게 아니다. 최근 10여년 동안 남해 전체 멸치 어획량이 반토막 났다. 통계청 국가통계포털에 따르면 남해 멸치 어획량은 1970년 5만229t으로 시작해 1980년 14만7471t, 2010년 22만34t을 기록했다. 하지만 지난해 절반 수준(10만7160t)으로 줄었다.
김영옥 기자

반면 서해 멸치 어획량은 증가했다. 1970년과 1990년 각 400t, 2462t에 불과했는데 지난해에는 2만3124t을 기록했다. 국립수산과학원(수과원)은 기후변화에 따른 수온 상승 영향이 큰 것으로 본다. 최근 55년간(1968∼2022) 남해 연평균 표층(表層) 수온 상승률은 1.07도다.

수과원 관계자는 “멸치 어획량 변동성이 매우 컸던 지난 10년 동안 여름철 수온이 평년보다 높을 때가 많았다”라며 “이때 정상적인 산란이나 성장을 못 하면서 어획량이 큰 폭으로 줄었다”고 설명했다.


멸치↓ 정어리↑…“정어리로 액젓 담가”


남해에서 멸치는 줄지만, 정어리가 늘고 있다. 국가통계포털을 보면 올해 1~8월 전국 정어리 어획량은 2만2866t이다. 이 중 경남에서만 1만7991t으로, 지난 한해 전체 어획량(1만2030t)을 넘어섰다. 정어리는 2006년만 해도 통계에 기록되지 않을 정도로 어획량이 미미했지만, 지난해부터 급증했다.
지난 27일 오후 경남 거제시 둔덕면 '젓갈전문업체' 해금강식품 마당에 정어리를 염장(鹽藏)한 드럼통 약 1만개가 놓여 있다. 안대훈 기자
멸치 젓갈용 드럼통에 소금에 절인 정어리가 숙성되고 있다. 안대훈 기자

어족 자원이 변화하자 수산가공식품 업계도 비상이다. 궁여지책으로 멸치가 아닌 정어리로 ‘액젓 담그기’를 시도하는 업체도 있다. 지난달 27일 오후 경남 거제시 둔덕면 젓갈전문업체 ‘해금강식품’에는 소금에 절인 정어리 250㎏ 담긴 드럼통이 잔뜩 있었다. 개수만 1만개에 달했다. 원래는 멸치를 염장(鹽藏)했어야 할 드럼통으로, 매년 3만개는 채웠다고 한다.

권윤석(56) 해금강식품 대표는 “멸치가 안 나니 정어리로라도 액젓을 만들어보려 한다. 팔 물건이 있어야 생계가 가능하니까”라며 “멸치도 기본 3년간 숙성하는데, 우선 1년 정도 지켜보고 추후 성분 분석도 의뢰할 것”이라고 했다. “제품 미완성인데, 정어리를 너무 많이 납품받은 것 아니냐”는 기자 질문에 권 대표는 “어민이 살아야 나도 산다”며 “(정어리로 만들) 상품이 잘 되길 바랄 뿐”이라고 했다.


대형 멸치잡이 어선…100척 넘게 사라져


근해 대형 멸치잡이 선단도 감소하고 있다. 국내 멸치 어획량의 60% 이상을 차지하는 기선권현망 선단은 지난 3년 동안 72개(2020년)에서 50개(2022년)로 줄었다. 기선권현망은 바다에서 그물을 끌며 멸치를 잡는 형태를 말한다. 1개 선단이 그물배(본선) 2척, 어군을 찾는 어탐선 1척, 가공ㆍ운반선 2척 등 최소 5척으로 구성된다.

이 기간 해체돼 ‘고철덩이’가 된 기선권현망 어선만 89척이다. 멸치 어족자원 보존과 기선권현망 수지 악화 등을 이유로 대대적인 감척이 진행된 결과다. 어획량 감소가 시작된 2010년대로 범위를 넓히면 395척(2014년)에서 271척(2022년)으로 124척이 사라졌다.

기선권현망 어업 모식도. 자료 해양수산부


100년 역사 멸치수협도 위기


전국 50개 기선권현망 선단 중 34개가 경남 통영 멸치권현망수협(멸치수협) 소속이다. 1919년 설립돼 104년 역사를 가진 멸치수협이다. 국내 유통 멸치 가운데 50%를 담당한다. 하지만 멸치 자원감소 등으로 1989년 93명에 이르던 조합원 수가 현재 30명대로 쪼그라들었다.
기선권현망 선단 조업 모습. 사진 해양수산부

최필종 멸치수협 조합장은 “지속 가능한 어업을 위해서라도 자원 관리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기선권현망은 법적으로 멸치만 잡게 돼 있다”며 “안 그래도 어획량이 줄어 힘든데, 조업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혼획되는 밴댕이(디포리)·정어리 등 때문에 조업정지를 당하는 이중고를 겪고 있어 규제 완화 등 대책이 필요하다”고 했다.

남해·거제·통영=안대훈·박진호 기자 an.daeh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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