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용할 양식처럼 주신 말씀, 순례길 여정마다 펼쳐지다

2023. 11. 1. 03:09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유진소 목사의 산티아고 순례기] <2>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중 아헤스에서 부르고스 가는 길의 십자가 모습. 오른쪽 사진은 유진소 목사와 유미은 사모가 산티아고 순례길 중 철의 십자가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는 모습.유진소 목사 제공


안식년을 맞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로 하면서 두 가지 부담이 있었다. 하나는 무엇인가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름의 의미를 가지고 800㎞ 순례길을 걷는 것이기에 이 모든 것을 글로 써서 남겨두어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다. 또 하나는 성도들과의 소통이었다. 하나님이 내 마음에 주신 발랄한(?) 생각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할 수만 있다면 성도들과 함께 걷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께서 주신 기막힌 아이디어가 바로 ‘카미노, 말씀과 함께 걷다’였다. ‘카미노’ 즉 순례길을 매일 호산나교회 큐티(QT·말씀 묵상) 매거진 ‘말씀과 함께’에 나오는 성경 말씀을 묵상하면서 걸어보자는 생각이었다. 그러면서 그 묵상 내용을 교회 말씀 묵상 나눔 사이트에 올려 성도들과 소통을 해보자고 생각했다. 하루하루 걸은 순례길 이야기를 통해 순례자의 삶이라는 아름다운 진리를 나누고자 했다.

그리하여 나는 매일 온종일 걸은 뒤 알베르게(숙소)에 들어가 씻고 정리한 후 오후 5시가 되면 스마트폰을 꺼내 호산나교회 온라인 교인센터의 ‘말씀과 함께’ 사이트를 열고 말씀 묵상과 나눔을 시작했다. 이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순례길은 단순하게 계속 걷는 일의 반복이었지만 날마다 이런저런 변수가 생겨 매일 저녁 같은 시간에 맞춰 말씀 묵상을 한다는 게 쉽지 않았다.

어느 날은 너무 피곤해 도저히 할 수 없는 날도 있었고 또 어떤 날은 일정에 차질이 생겨 숙소에 제대로 들어가지도 못했다. 스마트폰만으로 묵상 내용을 입력해 전송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나의 두꺼운 손가락과 노안(老眼)이 이를 더 짜증 나게 했다. 어느 날은 거의 다 써서 올렸는데 앞의 내용을 수정하려다가 그만 전체 내용이 삭제돼 다시 작성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성도들과 이미 약속했고 내 소식과 묵상 내용을 기다리는 분들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매일 매일 빼먹지 않고 말씀 묵상을 올릴 수 있었다. 정말 우리의 영적인 생활은 스스로 굴레를 씌우지 않고는 제대로 감당할 수 없는 것인가 보다.

그렇게 말씀 묵상을 올리면서 감동을 받았던 것은 하나님이 매일 정확하게 필요한 말씀을 주셨다는 것이다. 성경 본문의 내용이 그날 일정이나 상황과 전혀 상관이 없을 것 같았지만, 그날 하루 걸었던 순례길을 말씀 앞에 펼쳐 놓으면 기가 막히게 적용이 되는, 참으로 신기하고 놀라운 체험을 했다. 평소 교회에서 큐티 강의를 하면서 강조했던 것을 직접 경험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실제로 순례길에 오른 지 10일째 되는 날이었다. 그날 주신 말씀은 사무엘상 25장 본문이었다. 다윗이 식량 원조를 요구했으나 이를 거절하고 다윗을 모욕했던 거부(巨富) 나발을 죽이러 갈 때 그의 지혜로운 아내 아비가일이 다윗의 노여움을 푸는 장면이 담긴 내용이었다. 이 본문에서 주신 말씀은 화가 난다고 자신의 본분과 방향을 잊어버리고 칼을 휘둘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내용과 똑같은 일이 그날 순례에서 일어났다. 나와 아내는 나헤라를 출발해 산토도밍고로 향하는 길을 걸었다. 그러다 오르막 언덕 위에서 좌판을 벌여놓고 짝퉁 콜라를 팔던 스페인 장사꾼과 그야말로 한판 붙을 뻔했다. 순례 길에서 노상 판매는 불법이어서 장사를 할 수 없으니까 ‘기부(Donation)’이라고 적은 푯말을 세워놓고 물건을 팔고 있었다. 그런데 장사꾼은 내가 기부한 돈이 자신이 원하는 만큼이 아니라 생각하고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러다가 내가 근처 공원 수돗물로 진흙 묻은 신발을 닦고 있었는데 장사꾼이 내게 오더니 인종차별적인 말로 소리를 질렀고 나도 그야말로 소리를 지르며 싸울 뻔했다. 순간 나는 너무 분하고 원통했지만 관광이 아니라 순례를 하러 온 것임을 깨달으며 겨우 이겨냈다. 순간 나발을 죽이겠다고 칼을 차고 씩씩거리면서 가다가 아비가일을 만나 정신을 차린 다윗의 경우와 비슷해 깜짝 놀랐다.

순례길 묵상은 이런 식으로 계속됐다. 그래서 놀라웠고 주님의 은혜에 감사했다. 무엇보다 성도들의 반응이 놀라웠다. 성도들은 나의 못난 묵상 나눔을 읽으며 기쁘게 참여했을 뿐 아니라, 어떤 성도님은 ‘엘 카미노 데 산티아고’의 ‘카미노 프란세스’를 인터넷에서 찾아 그 지역 지도를 확인하면서 묵상 나눔을 읽고 은혜를 누리기도 했다. 성도들은 일상의 삶 속에서도 순례에 동참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것은 삶의 파일럿 프로그램이다. 삶이라는 순례길 걷기를 산티아고 순례길을 통해 축소판으로 경험하는 셈이다. 그렇기에 ‘카미노, 말씀과 함께 걷다’는 그 자체로 산티아고 순례길이 주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였고 축복이었다. 우리는 삶이라는 순례길을 어떻게 걸어야 하는가. 어떻게 걸어갈 수 있는가. 그 답은 ‘말씀과 함께 걷는다’에 있다. 산티아고 순례길 33일은 이를 분명하게 확인한 시간이었다. 나와 성도들은 장소는 달랐지만 말씀 안에서 그렇게 순례길을 걸었다.

유진소 부산 호산나교회 목사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