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1mm 들깨를 숲처럼 키우는 사람들이 있다

최새롬 2023. 10. 30.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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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을 뚫고 나와서도 한번 더 벌이는 사투, 살아남는 게 완전히 운인 세계

가족이지만 아주 다른 사람들, 농사 짓는 부모님 vs. 마케터 딸이 함께 농사일 하는 이야기. <기자말>

[최새롬 기자]

10월 말의 들깨는 내가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네가 부은 들깻모는 잘 안 올라온다." 

지난여름(7월 중순) 어머니에게 전화가 이렇게 왔었다. 들깻모가 안 올라온다니, 심각한 문제다. 그런데 어머니는 웃음을 참지 못하겠다는 목소리이다. 깻모가 안 올라온다는 말에 나는 겁 먹은 채 대답했다. 

"좀… 기다려보면 나오지 않을까요." 
"나는 종자를 5개씩 넣었는데. 니는 정말로 3개씩만 넣어서 그런 것 같어(웃음). 
어쩐다니?" 

내가 들깨 농사를 망치는 건가. 어머니의 전화는 타박이나 원망은 아니었고, 그저 나를 조금 놀리고 있었는데 놀림을 당한 나는 땀이 삐질삐질 났다. 

진짜로 안 나오면 어떡하지? 들깨 싹이 나오게 하는 일은 내가 해본 적이 없는 영역이다. 깨를 부은 지 몇 주가 지났다. 광고 타깃이 잘못되었으면 조정하면 되고 고객이 카피(광고 문구)에 반응하지 않으면 카피를 수정하면 된다. 그러나 들깻모는… 내가 어떻게 고칠 수가 없다.

할 수 있는 말은 그저 '조금 더 기다려보자'는 것이었고, 실제로도 그럴 수밖에 없었으므로 들깻모는 이제 믿음의 영역으로 넘어온 것이었다. 간절하게 마음을 보태는 일밖에는 없었다.
 
 7월 초 들깨가 심어진 밭. 하찮아 보였다.
ⓒ 최새롬
   
 9월 말 들깨는 무성하다. 굉장하다. 비가와서 웃자라고 엎쳤다.
ⓒ 최새롬
추석 연휴 고구마 수확까지 여름내 양파와 감자 일을 돕고 든든한 일꾼의 면모를 보였던, 땀으로 빚어진 신뢰가 무너지는 것은 차치하고, 부모님의 농사를 망치게 생겼다. 내가 부었던 들깨 모판은 1/3쯤 되었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고, 이렇게 시간이 지나서는 깻모는 다시 부을 수 없다. 농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그때이니까. 때를 놓치고 기도한다. 

들깨 심기는 7월, 양파 수확이 끝날 무렵 작게 시작되었다. 우선 깻모를 부어야 한다. 농사일의 대부분이 그렇듯 참깨도 쭈그려 앉기에서 시작했다. 깨가 얼마만 한 크기인지 잘 모르겠다면 최근 먹었던 김밥에 뿌려진 참깨를 생각하면 된다. 여기 희고 납작한 참깨, 거무스름하고 동글동글한 들깨는. 그런 크기를 심어 모종으로 키운다. 이때 '붓는다'라는 말을 쓰는데, 액체에 어울리는 단어 같으나 작은 알갱이에게도 붓는다고 표현하니 재미있다. 

들깨는 아주 작아서, 처음엔 이것을 키운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600평의 밭이라고 알려줘도 그 크기를 바로 떠올리기 어려웠던 것과 1만 여 개의 양파 머리를 만지고도 그것이 어떤 다 합쳐 어떤 무게와 규모인지를 상상하기가 어려웠던 것도 잠시, 이제는 다른 스케일에 적응해야 한다. 

물을 컵에 붓듯이 깨를 붓는 일이면 좋았을 텐데. 실제로는 깨 종자(씨앗)를 3~5개를 모판에 올려놓는 일이었다(그리고는 흙으로 덮는다). 종자를 심어서 기르는 포트는 구멍이 총 128구로 가로가 8개, 세로가 16개이다(8*16=128). 손가락 한 마디 위에도 십수 개를 놀릴 수 있는 작은 깨를 들고 3개와 5개 사이를 맞춰 골라 심다보면, 아니 이건 붓는 것이 전혀 아닌데, 왜 들깻모를 '붓는다'고들 표현하는 건지 의아해진다. 일의 어려움을 감추려는 속셈이라고 밖에 여길 수 없다. 

깨마저 기를 쓰고 나와야 한다니 

날짜가 지나면 들깨 싹이 나온다. 이때 들깨 싹은 초밥 먹을 때 옆에 올라오는 무순을 떠올리면 비슷하다. 싹은 조금 자란 듯싶을 때 쳐야 한다. 3개를 남기고 나머지를 자르는데, 이것의 길이와 두께를 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게 작고 여리다. 그중에 또 여린 것을 찾아 가위로 잘라야 한다. 여린 것만 자르라니, 이게 냉혹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깻모를 붓느라 코를 모판 가까이 대고, 등을 동그랗게 만 채로 어머니에게 묻는다.

"어머니, 그럼 첨부터 깨를 하나씩 넣으면 안 되나요." 
"안 돼. 서너 개를 넣어야 서로 기를 쓰고 나온다." 

이 작은 들깨들도 경쟁을 해야 한다니. 기를 쓰고 나온다는 말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정말 딱 3개씩만 열심히 세서 넣었던 것이다. 꼭 경쟁을 해야 한다면 최소한으로 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또, 자르는 싹을 최소화하는 것이 들깨에게도 좋을 것 같았다. 부디 방만하고 느긋한 마음으로 컸으면 했다. 그리고 나중에 어머니에게 문제의 전화가 걸려온 것이다. 

'기다려보자'고 말은 했지만, 정말로 싹이 나오지 않으면 어쩌지 싶어 내심 초조했다. 경쟁이 느슨했던 탓인지 내가 부었던 깻판은 싹이 천천히 겨우 올라왔다. 다음에 집에 갔을 때, 싹 자르기를 했다. 이 작업은 마음이 아프다. 싹이 너무 작고, 움튼 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냥 다 같이 잘 자라게 두면 안 되나요." 
"안 돼. 세 개만 남기고 잘라야 혀. 그래야 더 튼튼하게 자란다."
 
 이것은 참깨. 참깻모 싹자르기 작업 중이신 어머니. 참깨와 들깨 싹 자르는 방법은 같다. 모판도 같다.
ⓒ 최새롬
  
호되게도 어머니는 3개만 남기고 싹을 다 잘라야 한다고 하셨다. 그새 무수히 올라온 깻모, 처음에는 어떤 것이 튼튼한가를 보고 잘랐는데, 나중에는 다 비슷해서 고르기가 어려웠다. 여기서 살아남는 것은 완전히 운이다.

이렇게 작은 깨를 붓고 싹이 나길 기다려 싹을 자르고, 다시 여러 날이 지나면 노지 밭에 옮겨 심는다. 웬만치 자라서야 옮겨 심는 줄 알았으나 밭에 심긴 들깨모는 저것이 겨우 초록이구나 할 정도로 하찮았다. 눈을 한참 아래로 두고 찾아야 하는 땅바닥과 다름없는 키.

들깨는 모종이 되어도 작다. 들깨모를 밭에 심고 나면, 그것이 뭔지 잘 모르는 사람이 보더라도 안쓰러운 마음이 들 것이다. 그러나 어린 시절을 지나 다 자란 들깨는 굉장해진다. 성성한 들깨는 거의 나무와 유사한 목질을 갖게 되어, 깨를 베고 남은 깻둥(깨를 베어낸 자리)에 다칠 수도 있다. 깻둥에 다친다고? 믿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이다. 발이 걸려 넘어지거나 단면에 손이 다치기도 한다.
 
 무성하게 자란 들깨. 비가와서 웃자라고 누워 계시다. 두들겨봐야 농사의 성패를 알 수 있다고.
ⓒ 최새롬
 
1mm, 0.1cm 키의 들깨가 자라서 나무가 된다는 이야기. 10월이 지나 무성하게 자란 들깨는 이미 내 허리춤은 우습게 넘어선 상태다. 눈 앞에 펼쳐진 깻잎들은 몇 장인지 셀 수도 없고, 세려고 드는 일조차 어리석어 보인다.

이 들깻잎이 통상 우리가 먹는 깻잎이다. 그냥 싸 먹기도 하고, 장아찌를 담가 먹기도 하는. 들깨는 그렇게 두 개의 계절을 지나 500평을 울창하게 뒤덮었으나, 비가 와서 웃자라고 바람이 불어서 엎어졌다. 비바람에 고단하게 자랐다. 

한편, 들깻모를 부을 무렵부터 다른 밭에서는 참깨 수확이 시작되었다. 어떤 깨가 심어지는 무렵에 다른 깨를 벤다는 것이 흥미롭다. 참깨는 어떻게 수확할까. 깨 수확이라고 하면 가장 흔한 이미지는 아마도 도리깨질일 것이다.

그러나 도리깨질하기 전에는 밭에 들어가 깨를 베야하고, 깨밭에 들어가는 사람은 정해져 있다. 이렇게 작은 깨를, 가벼운 깨를 나는 정작 밭에서 만져보지도 못했다, 수확에 전혀 가담하지 못했다. 힘이 센 사람만이 들깨 밭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작은 깻잎 한 장 펼쳐 놓을 때
 
 작은 참깨를 밭에서는 아무나 만질 수 없다. 조심스럽게 참깨를 수확중이신 아버지.
ⓒ 최새롬
 
무슨 소리인가. 참깨 수확은 조심스러움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깨는 조금만 흔들어도 쏟아진다. 사방팔방 튈 수 있다니 깨로서는 좋은 일이겠으나, 애써 키운 농부에게는 안된 일이다. 밭에서 깨가 쏟아지는 일은 전혀 웃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깨가 쏟아지지 않게 힘을 주고 뿌리째 뽑든지, 아니면 깻둥을 꽉 잡고 낫으로 베어야 한다. 깨가 베어지는 줄도 모르게, 즉 깨에 진동이 전해지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손수레에 옮겨 담고 또 조심스럽게 트럭에 옮겨 실어서 하우스에 펼쳐 놓고, 마침내 참깨를 턴다.

작은 것을 붙드는 데에는 얼마나 큰 힘이 필요한지. 깨는 감자와 양파보다 훨씬 가볍지만, 만약 쥔다면 한 번에 백 개는 우습게 쥘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나는 밭에서 깨를 만져볼 수 없었다.

농사의 어떤 장면들. 튼튼하게 참깨가 나기 위해서는 경쟁이 필요하며, 살아남는 것은 완전히 운이다. 하찮아 보이는 들깻모 붓기가 이후 농사를 가름하는 중요한 장면이었다는 것을, 싹이 올라오지 않아 초조한 마음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이제 밭을 떠나 식탁으로 가보자. 흔하게 볼 수 있는 밑반찬 깻잎장이 쌓여 있다. 손바닥만 한 깻잎을 밥 위에 펼쳐 놓을 때 이 이야기가 가끔 떠오르면 좋겠다. 들여다보면 이 깻잎 한 장에 계절 두세 개가, 아주 하찮은 초록을 지나 아주 작은 알맹이일 적부터 고군분투하여 자란 일대기가, 1mm 크기의 들깨를 숲처럼 키우는 사람들이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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