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예수] “외국인 노동자는 소중한 선교 자원… 역파송의 힘 상상 초월할 것”

맹경환 2023. 10. 14.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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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노동자들의 벗
양주 빛오름선교교회 이형노 목사
은행 지점장 출신으로 ‘외국인 노동자의 벗’을 자처하는 빛오름선교교회 이형노 목사. 최근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에서 만난 이 목사는 “사역을 하면 할수록 외국인노동자가 하나님께서 이땅 가운데 보내주신 소중한 선교 자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고 말했다. 장진현 포토그래퍼


경기도 양주 빛오름선교교회의 표어는 ‘나그네를 순례자로, 외국인 노동자의 벗’이다. 국내 이주민의 정착을 돕고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교회의 정체성을 짐작할 수 있다. 네팔 베트남 캄보디아 등 국가별 교회 3곳이 있고, 외국인노동자를 위한 한글학교도 운영 중이다. 은행 지점장 출신으로 2006년 교회를 개척한 이형노(65) 목사는 최근 “불신 집안에서 태어나 예수님을 만나리라곤, 목사가 되리라곤, 더더욱 이주 외국인을 위한 목회를 하리라곤 꿈에도 생각을 못 했다”며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설명이 안 된다”고 말했다.

자전거로 집까지 바래다주던 집사님

전북 옥구군 시골 마을(현재 군산시로 편입)에서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이 목사는 어려서 굶는 날이 더 많았다. 아버지가 사업 실패 후 집을 떠난 뒤 어머니는 홀로 생계를 위해 생선 행상을 했다.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친구 손에 이끌려 읍내 교회의 여름성경학교란 곳에 처음 갔다. 이 목사는 “먹을 것도 주고 놀거리도 많고, 지금 생각하면 교회가 도피처 같은 곳이었다”고 했다. “그때 이후로 교회를 떠난 적이 없었다”는 이 목사는 “처음 교회의 정과 사랑을 느끼게 해 주셨던 ‘한 분’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고 했다. 바로 교회에서 집까지 2.5㎞나 되는 시골길을 늘 자전거로 바래다주셨던 집사님이다. 이 목사는 “자전거도 귀하던 시절인데 그분과의 추억, 받은 사랑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목사가 교회에 다닌 이후 동생들과 할머니가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고 어머니도 나중에 신자가 되어 권사 직분을 받았다. 여동생들도 모두 목회자 사모나 권사로 섬기고 있다. 이 목사는 “우리 집을 찾아주신 예수님은 가족 모두 새로운 삶을 살게 하셨다”면서 “가장 가난하고 소망 없을 것 같았던 우리 집의 변화에서 주님은 살아계시고 삶의 구원을 베풀어 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담담하고 습관적인 신앙생활

이 목사는 대학 갈 형편이 되지 않아 일찍 취직할 수 있다는 군산상고(현 군산 상일고)를 선택한다. 재학 중에는 학생은행에서 근로장학금을 받으며 학비와 생활비를 보탰다. 고등학교 3학년이던 1976년 11월 국민은행에 합격해 이듬해부터 은행원 생활을 시작했다.

서울에 올라온 이 목사는 바쁜 일상에 신앙생활이 나태해졌다고 한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전도에는 열정을 다했다. 그는 “처음 교회 갈 때부터 동네 친구들을 끌고 교회에 가면서 다른 건 몰라도 전도는 항상 1등이었다”면서 “은행에서도 창구에서 만난 손님들을 전도하기에 바빴다”고 말했다.

교회학교를 거치면서 나름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했다고 생각했던 이 목사는 서울에서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게 됐다. 그는 “은행 동기를 따라 국민은행 합숙소 근처 교회 대학청년부에서 예배를 드릴 때였다”면서 “그동안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던 국가고시를 주일날 보는 문제점을 지적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지금까지 내 신앙이 얕은 신앙이었다는 생각이 들어 부끄러웠다”고 고백했다.

이 목사의 신앙은 한 단계씩 성장해 간다. 이 목사는 85년 개척 준비를 하던 목사님을 고향 친구의 소개로 만나 참여한 교회에서 89년 31세에 안수집사까지 됐다. 몇 년 뒤 경기도 문산 지점에서 근무하던 시절 선배로부터 당시 아파트 한 채 값에 해당하는 금액의 사기를 당했다. 근무지 인근 자그마한 교회에서 새벽예배를 빠지지 않고 드리고 있을 때였다.

그는 “날짜도 잊지 않는다. 1992년 4월 19일. 새벽예배를 드리며 간절히 기도하고 나오는데 교회 옆 나무들이 크리스마스트리처럼 반짝이며 너무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춤을 추고 있었다”면서 “그날 이후로 그 어려움의 눌림에서 벗어나고 하나님만 붙들고 나가면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갈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말했다.

다음 날 새벽예배에 나갔을 때 목사님은 성경 공부를 제안했다. 당시에는 목사님과 단둘이 새벽예배에 참석하던 때라 매일 새벽, 예배 대신 간단히 기도하고 성경 공부를 시작했다. 이 목사는 “교재를 주고 예습을 주문하셔서 한 과에 3시간 정도는 미리 공부해야 했다”면서 “1년 가까이 계속해서 신·구약은 물론 이스라엘 역사까지 공부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서울 본 교회 담임 목사님이 이 목사를 장로로 피택하려 한다는 말을 전했고 결국 35세의 ‘어린’ 나이에 장로가 됐다. 그는 “장로로 피택되고 장로 고시를 봐야 했는데 그때 성경공부를 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면서 “하나님의 계획하심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동기 중 가장 먼저 지점장이 되기도 했던 이 목사는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더 승진하지 못하고 2015년 명예퇴직을 한다. 그사이 크고 작은 사기를 당하며 낙담은 했지만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이 목사는 “주어진 직분에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자 새벽예배를 비롯해 모든 공예배에 빠짐없이 참석하면서 믿음을 유지하고 키워갔었다”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담담하게, 어쩌면 습관적으로 신앙생활을 했던 것이 삶의 위기 때문에 시험에 빠지지 않았던 이유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야 이형노 너 목사 될 거지”

중학교 때였다. 당시 장로였던 교감 선생님이 교무실에 간 이 목사에게 대뜸 “야 이형노, 너 목사 될 거지”라고 하는 거였다. 목사가 되겠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던 때라 황당해하며 지나갔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는 그 말씀이 남아있었던 것 같다. 이 목사는 “특별한 이유도 없이 막연하게 신학을 공부해야겠다는 부담이 항상 있었다”고 말했다.

98년쯤부터는 그 부담이 더 커졌지만 직장인이라는 여건상 무시하며 지냈다. 하지만 하는 일마다 꼬이기 시작하더니 다시 한번 지인에게 큰 사기를 당하게 된다. 이 목사는 “모든 어려움이 하나님이 주신 감동, 즉 신학을 공부하라는 말씀에 불순종해서 일어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면서 “결국 신학 공부를 더 미룰 수 없었다”고 말했다. 직장은 그만둘 수 없어 이미 야간으로 학부(숭실대 회계학과)를 마친 터라 신학대학원도 야간에 공부할 수 있는 곳을 수소문했다. 마침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현 아신대) 신대원에 야간 목회학 석사과정이 신설돼 2001학번으로 입학하게 된다. 이 목사는 “신대원 입학 후 거짓말처럼 사기 사건이 해결되고 2학년 때는 지점장으로 승진해 현재 빛오름선교교회가 있는 양주지점장으로 부임했다”고 말했다.

2004년 이형노 목사가 목사 안수를 받던 날 장모님과 부모님, 백경희 사모와 함께했다.


서울의 한 교회에서 전도사 생활을 시작한 이 목사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매일 새벽예배와 주일 오후 예배에서 설교했다. 신대원을 하나님의 은혜로 마친 그는 한국독립교회선교단체연합회에서 2004년 목사 안수(현 국제독립교회연합회 다문화위원장)를 받았다.

소중한 선교 자원, 외국인 노동자

2006년 경기도 양주의 공장 한켠에 자리 잡은 컨테이너에서 시작된 빛오름선교교회.

목사 안수 뒤 바로 천보산민족기도원에서 매주 토요일 오후 7시 집회 인도자로 섬기던 이 목사는 직장생활과 목회를 병행하기로 하고 개척에 나선다. 우연히 양주에서 경매가 진행 중이던 공장을 발견하고 컨테이너에 ‘빛오름선교교회’라는 간판을 붙였다. 교회의 1호 신자는 그 공장에서 야간 경비원으로 근무하던 분이었다. 2년 뒤 공장이 팔리면서 서울로 옮기려던 차에 중국 교포 부부가 등록하자 이 목사는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양주의 다른 곳으로 교회를 이전했다. 그 무렵 한국기독실업인회(CBMC) 의정부지회의 거듭된 제안을 받아들여 2009년부터 외국인 노동자 선교 사역을 시작했다.

이 목사는 우선 한국어교실을 열고 직장 알선과 비자 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다행히 CBMC 의정부지회에서 외국인 노동자에게 저녁 식사를 제공하는 등 도움을 줘, 많은 외국인노동자가 몰려들었다. 한글학교 등록 수강생이 700여명까지 됐었다. 외국인 성도가 늘자 이 목사에게는 뜻하지 않은 시련이 찾아왔다. 외국인 사역을 반대하는 내국인 성도의 목소리가 커진 것이다.

빛오름선교교회 내 캄보디아교회의 문화행사 장면.


이 목사는 “외국인 노동자를 도와줘도 도움받을 때뿐이고 나쁜 짓을 할 것 같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막연한 불안감을 국내 성도들이 갖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 목사는 교회의 정체성을 외국인 노동자 선교로 분명히 했고 많은 내국인 성도가 떠나는 아픔을 감내해야 했다.

이 목사가 사역자로서 항상 마음에 품는 말씀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이다. 그는 “외국인 노동자, 특히 이슬람권 친구들을 상대하다 보면 필요할 때는 다가오지만 필요를 채우면 복음에 대해 말할 기회조차 주지 않을 때가 많다”면서 “시간만 낭비하는 것 아니냐는 회의가 들기도 한다”고 고백했다. 그때마다 이 목사는 이 구절을 되뇌며 ‘하나님께는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 예수님의 마음은 이런 자에게 가 있으시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는다.

“사역하면 할수록 이들이 하나님께서 이 땅 가운데 보내주신 소중한 선교 자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사도행전 8장에서 에티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내시가 빌립에게 복음을 전해 듣고 세례를 받은 뒤 에티오피아 복음 전파에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이 땅에 와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복음으로 변화시켜 역파송한다면 그 효과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것입니다.”

맹경환 선임기자 khmae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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