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바꾼 '세 자매'의 공통점

이준목 2023. 10. 11.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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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tvN <벌거벗은 세계사> '중국을 뒤흔든 쑹씨 세 자매' 편

[이준목 기자]

중국의 국부 쑨원(손문), 중화민국의 총통 장제스(장개석), 공자의 후손이자 중국의 대부호 쿵샹시(공상희), 모두 중국 근현대사에서 자신의 이름을 굵직하게 남긴 거물들이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또 한 가지 흥미로운 공통점이 있다. 바로 이 세 사람의 아내가 모두 '친자매'라는 사실이다.

쿵샹시의 아내인 첫째 아이링(宋蔼龄), 쑨원의 배우자인 둘째 칭링(宋庆龄), 장개석과 혼인한 막내 메이링(宋美齡)은 모두 쑹씨 집안(송가)의 핏줄을 타고난 한 자매였다. 중국 청나라 시대 말기에 돈과 권력, 명예를 모두 독차지한 쑹씨 가문의 위세를 가리키는 말로 '쑹가황조(宋家皇朝)'라는 표현까지 등장했을 정도다. 쑹씨 세 자매는 남편과 함께 중국 근현대사의 중요한 순간들을 함께 겪으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야했다. 오늘날에도 중국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여성들로 남았다.

세 여성의 삶과 결혼
 
 tvN <벌거벗은 세계사> 한 장면.
ⓒ tvN
 
10월 9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 120회에서는 '중국을 뒤흔든 쑹씨 세 자매'편을 통하여 20세기 중국에 큰 존재감을 남긴 세 여성의 삶과 결혼이 역사에 미친 영향을 조명했다. 조영현 고려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이날의 강연자로 나섰다.

쑹씨 세 자매의 아버지인 쑹자수(송가수)는 하이난의 빈농 출신이었으나 미국에 입양된 이후 자수성가하여 성공한 기업가가 되었고, 상하이로 금의환향한다. 쑹가수는 중국의 미래와 개혁에 관심이 많았고 정부의 눈을 피해 비밀리에 지식인과 혁명가들을 후원해주면서 쑨원과도 인연을 맺게 된다.

미국식 교육의 영향을 받은 쑹자수는 "여성들도 고등교육을 받으면 나라에 이바지할수 있다"는 열린 생각의 소유자였고, 아들만이 아니라 딸들에게도 동등한 교육의 기회를 보장했다. 쑹자수의 세 딸 아이링, 칭링, 메이링은 개방적인 아버지의 덕분에 모두 미국에서 교육을 받으며 중국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자 신여성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됐다.

세 자매가 미국에서 꿈을 키워가고 있을 무렵, 중국에서는 신해혁명(1911-1912)이 일어나며 청 제국이 무너지고 중화민국이 건립되면서 새로운 질서를 놓고 혼란의 시기에 빠져있었다. 쑨원은 '삼민주의'를 주장하며 중국 민중들의 지지를 얻어 혁명정부의 임시대총통에 올랐다.

하지만 쑨원은 독자적인 군사력이 없는 혁명정부의 한계를 절감하고, 중국의 분열과 혼란을 막기위하여 공화국을 세운다는 조건으로 군벌인 위안스카이에게 권력을 양보했다. 야욕이 컸던 위안스카이는 쑨원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서서히 독재자로 변모하여 새로운 황제가 되고 싶다는 본색을 드러낸다. 쑨원은 쑹자오런과 손을 잡고 위안스카이를 견제하기 위하여 국민당을 창당했고, 쑹자수는 그런 쑨원의 최대 후원자이자 조력자로 활동했다.

쑹자수의 장녀 아이링은 미국 유학을 마치고 중국으로 돌아와 쑨원의 개인비서가 된다. 46세의 쑨원은 당시 23살의 젊고 총명하던 아이링을 보고 한눈에 반했다. 하지만 쑨원은 당시 이미 아내와 가족이 있는 유부남이었다. 아이링은 쑨원의 구애를 부담스러워했고 가족들도 쑨원의 청혼을 결사반대했다.

1914년 위안스카이의 권력장악이 본격화되면서 국민당 당대표였던 쑹자오런이 암살당한 데 이어 국회가 강제로 해산되는 사태가 벌어진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쑨원과 쑹씨 가족은 중국을 떠나 일본으로 도피한다. 아이링은 여기서 쿵샹시를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진다.

쿵샹시는 공자의 후손이자 미국 유학파 출신의 성공한 기업가였다. 첫 눈에 반한 두 사람은 일본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아이링은 이후 남편 쿵샹시의 고향인 중국 산시성으로 이주했고 자신의 미국 유학 시절 쌓아 놓은 인맥과 로비를 활용하여 남편인 쿵샹시의 사업을 더우 번창하게 하는 데 기여했다. 훗날에 최고권력자가 되는 장제스의 잠재력을 알아보고 동생 메이링과의 만남을 적극 주선한 것도, 남편 쿵샹시가 중화민국 정부의 여러 요직을 맡게되는 것도 아이링의 수완이 큰 영향을 미쳤다.

한편 아이링이 결혼하면서 쑨원의 개인비서 일을 그만두게되자 빈 자리를 메운 것은 동생인 칭링이었다. 칭링은 어린 시절부터 정치에 매우 관심이 많았고 쑨원은 혁명영웅으로 동경해왔다. 아이링의 결혼에 상심했던 쑨원은 이번엔 칭링을 보고 또다시 사랑에 빠졌다. 당시 쑨원의 나이는 48세, 칭링은 21세였다.

쑹씨가문은 이번에도 쑨원과 칭링의 결혼에 반대했으나, 칭링은 집을 몰래 탈출하여 쑨원에게 갔다. 쑨원도 칭링과 결혼하기 위하여 아내를 버렸다. 두 사람은 결국 1915년 10월 25일 결혼식을 올린다. 이에 분노한 쑹자수는 쑨원과 절교를 선언하게 된다.

당시 칭링이 남긴 편지에 따르면 "나는 중국을 도울 수 있고 쑨원 박사도 도울 수 있어. 그는 나를 필요로 하고 있어"라는 대목을 통하여 자신의 정치적 우상과 결혼하려는 그녀의 심리를 읽을 수 있다. 그나마 쑹씨 가족 중에서 칭링의 선택을 유일하게 이해하고 지지해준 사람은 막내인 동생 메이링 뿐이었다고 한다.

1916년 위안스카이가 급사하면서 중국은 여러 군벌들이 난립하여 내전의 혼란에 휩싸인다. 중국으로 돌아간 쑨원은 1921년 광저우에서 정부를 수립하고 중화민국 총통에 취임했다. 쑨원은 난립한 군벌들을 정벌하고 분열된 중국을 다시 통일하겠다는 북벌(국민혁명)을 선언하지만, 군벌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힌다.

1922년 6월 16일, 광동성의 유력 군벌이던 천중밍이 쑨원을 제거하기 위하여 그의 관저에 폭격을 쏟아붓는 사건이 벌어진다. 아내 칭링은 임신중이었음에도 자신이 짐이 될까봐 남편 쑨원에게 먼저 대피시킬 것을 권하며 "중국에 나는 없어도 괜찮지만 당신이 없으면 안 된다"고 설득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칭링의 희생과 헌신으로 쑨원은 무사히 위험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또한 이 당시에 함선을 지휘하여 쑨원을 안전하게 탈출시킨 또다른 인물이 바로 장제스였다. 쑨원의 목숨을 구한 것이 계기가 되어 이후 장제스는 쑨원의 전폭적인 신임을 얻게 된다.

칭링은 남편을 먼저 탈출시킨 후 본인도 무사히 살아나오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 과정에서 아이가 유산되고 불임 판정을 받게되는 아픔도 겪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칭링은 '마담 쑨원'으로 불리우며 중국 민중들에게 큰 감동을 줬고 쑨원의 아내를 넘어서 정치적 동지로 위상이 급상승했다.

1924년 쑨원은 북벌을 위하여 공산당-소련과 협력하기로 결정하면서 '1차 국공합작'을 맺는다. 하지만 1925년 3월 12일, 국공합작 1년여 만에 58세의 쑨 원이 혁명의 꿈을 다 이루지 못하고 간암으로 사망하면서 중국의 역사는 다시 요동치게 된다.

쑨원은 죽기 전에 "공산당과 국민당이 합작하여 혁명을 완수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하지만 쑨원 사후 국민당내 좌우파의 대립이 극심해지면서 쑨원의 유지는 흐지부지되었고 국공합작과 북벌 계획도 모두 무산되었다.

쑨원의 미망인 칭링은 남편을 잃은 슬픔을 뒤로 하고 1926년 1월 33세의 나이로 본격적인 정치에 입문한다. 칭링은 국민당 전국대회의 중앙대표위원에 선출되었고, 정치활동을 하면서 공산당 인사들과도 가까워지게 된다. 이제 칭링은 쑨원의 이념을 대변하는 독보적인 여성 정치인으로 무시할 수 없는 위상을 지니게 되었다.

한편 쑹씨 가문의 막내딸 메이링은 1927년 12월 장제스와 결혼했다. '정략결혼'의 전형이었던 두 사람의 인연에는 재미있는 뒷이야기들이 전한다. 당대 최고 명문가 출신에 엘리트 신여성이었던 메이링은 평소 "'영웅'이 아니면 내 배우자가 될 수 없다"고 할만큼 콧대가 높았다고 한다.

부친 쑹자수의 사후에 메이링의 혼사는 맏언니 아이링의 몫이 되었다. 아이링은 의외로 당시 유력한 거물들을 제쳐두고 국민당 장교로 쑨원을 구하며 이름을 알려가던 장제스에 주목했다. 장제스는 중국의 지도자가 되겠다는 야망에 불타는 인물이었지만 당시만 해도 가문 배경이나 재력은 미천했고 심지어 유부남이었다. 장제스 입장에서도 출세를 위하여 중국의 국부인 쑨원과 명문 쑹가 가문과 같은 집안이 된다는 든든한 배경이 꼭 필요했다.

아이링은 식사 초대를 빌미로 장제스 부부를 불러 성격에서 개인사까지 꼼꼼하게 질문하여 사실상의 남편 면접을 치렀다. 메이링도 아이링의 설득에 장제스를 주목하게 됐고, 자신의 상하이 집 주소를 전했다고 한다.

다만 메이링은 장제스에게 결혼 확답은 주지 않고 그가 얼마나 출세하는지 천천히 지켜봤다. 장제스는 이후 군부에서 탄탄한 입지를 다지며 세력을 키웠고, 쑨원 사후 1년 만인 1926년에는 국민당의 1인자이자 군총사령관 지위까지 올라 북벌에서 눈부신 전공을 올리자 메이링은 비로소 장제스와의 결혼을 승낙한다.

1927년 장제스는 아내와 결별한 이후 메이링과 결혼식을 올리면서 의도적으로 중화민국 국기와 쑨원의 사진을 함께 내걸었는데, 이는 장제스가 쑨원의 계승자임을 선포함으로써 권력의 정통성을 획득한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1928년 북벌을 완성한 장제스는 공식적으로 국민당 주석이자 중화민국의 통치자로 등극했고, 그토록 영웅을 동경했던 메이링도 자신이 원한대로 중국 최고권력자의 아내가 됐다.

메이링의 결혼을 가장 반대한 인물은, 놀랍게도 둘째 언니 칭링이었다. 메이링이 칭링과 쑨원의 결혼을 유일하게 지지해준 것과는 정반대로, 칭링은 메이링이 사랑이 없는 정략결혼을 한다고 비판했고 결혼식마저도 끝내 불참하면서 악연의 시작을 알렸다.

1927년 권력을 잡은 장제스와 국민당 우파가 당내 좌파와 공산당을 제거하기 위하여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국공합작은 붕괴되어 국민당과 공산당간 기나긴 내전의 서막이 열린다. 공산당에 우호적이었던 칭링과 장제스의 관계도 더욱 악화된다.

장제스로서는 자신의 권력독점에 반대하는 공산당은 공존할 수 없는 눈엣가시같은 존재였다. 이러한 장제스의 대항마로 등장하여 공산당의 리더가 된 인물이 바로 마오쩌둥이다. 마오쩌둥의 홍군은 1934년 장제스의 대규모 토벌을 피하여 옌안으로 만2천Km거리를 걸어서 탈출하는 '대장정'을 단행하며 세력을 재건했다.

공산당은 토지개혁을 주장하며 중국 인구의 대다수인 농민들의 지지를 얻었다. 여기에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으로 일본의 대륙침략이 본격화되면서 장제스는 공산당을 토벌할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

1936년에는 장제스가 군벌 장쉐량에게 피랍되어 감금당하는 '시안사변'이 발생한다. 장쉐량은 장제스에게 '국민당과 공산당이 싸움을 멈추고 함께 손을 잡아 일본을 몰아낼 것'을 요구했다.

당시 메이링은 남편 장제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놀랍게도 직접 협상에 나섰다. 목숨을 걸고 적진을 찾은 메이링은, 측근에게 불행한 일이 생기면 자신을 총으로 쏘라고 미리 이야기를 해놨다고 한다.

메이링은 공산당과의 협력과 장쉐량의 안전보장을 조건으로 장제스를 설득하겠다고 약속하며 장쉐량을 설득했다. 기적적으로 협상은 성공하며 장제스는 석방되었고 정말로 제2차 국공합작이 단행된다. 메이링이 단순히 권력자의 아내로서만이 아닌, 상당한 외교적 수완과 담력을 지닌 여걸이었음을 처음으로 보여준 대목이다.

1937년 중일전쟁이 시작되면서 곳곳에서 큰 패배를 겪은 중국은 국가적 존망의 위기에 놓인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중국을 구하기 위하여 앞장섰던 것이 바로 쑹씨 세 자매였다.
 
 tvN <벌거벗은 세계사> 한 장면.
ⓒ tvN
 
세 자매는 함께 손을 잡고 사비를 털어 구호단체를 설립하고 항일전쟁을 지원하는 각종 활동에 앞장섰다. 칭링은 본래 장제스를 싫어했지만 조국의 위기가 우선이라는 대의명분상, 개인적인 감정을 접어두고 자매들과 협력했다.

또한 메이링의 활약은 세 자매 중에서도 단연 돋보였다. 그녀는 유학 경험을 살려서 미국과의 외교 전면에 나섰다. 루스벨트 대통령으로부터 비행기와 공군지원을 약속받는 성과를 이뤄내며 세계 최초의 용병 공군부대인 '플라잉 타이거즈'의 탄생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메이링은 중국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미국 의회에서 유창한 영어로 대중지원을 호소하는 연설을 선보이며 기립박수를 받기도 했다. 당시 미국에서도 메이링의 활약이 꽤 인상적이었는지 타임지 표지를 장식할만큼 화제가 됐다. 또한 메이링이 미국의 지원에 대한 보답으로 판다를 선물한 것이 오늘날 중국의 트레이드마크인 '판다 외교'의 사초이기도 하다.

제 2차대전에서 연합국의 승리가 가까워지면서 연합국 주요 지도자들은 '카이로 회담'을 통하여 일본에 대한 대응과 아시아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했다. 문제는 중국의 지도자였던 장제스가 영어를 못했다는 것이다.

장제스를 대신하여 이번에도 협상과 통역을 담당한 인물은 아내 메이링이었다. 당시 회담에 참석한 장제스, 루스벨트 미대통령, 처칠 영국 총리의 옆에 함께 앉아있던 유일한 여성이 바로 메이링이었다. 그녀는 유창한 언변과 외교력으로도 당시 외신에서도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여성" "능수능란한 암호랑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2차대전이 끝난 후 쑹씨 세 자매의 운명은 엇갈렸다. 중국의 패권을 놓고 국공내전이 재개되면서 세 자매의 관계도 돌아올수 없는 강을 건녔다. 둘째 칭링은 남편 쑨원의 정치사상을 이어갈 계승자로 공산당을 선택했다. 첫째 아이링과 막내 메이링은 국민당의 손을 들었다. 메이링은 남편 장제스가 집권자였고, 아이링의 남편 쿵샹시도 국민당의 재정부장을 맡고 있던 고위관료였다.

기나긴 내전은 공산당의 승리로 끝났다.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은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의 수립을 선포했고 칭링은 쑨원의 미망인이라는 정치적 영향력을 고려하여 신정부의 부주석으로 선임되어 현대중국의 여성으로는 가장 높은 지위에 오르는 기록을 남긴다.

한편 그해 12월 7일 장제스는 200만 명의 군인과 주요 인사들을 데리고 중화민국 정부를 타이완 섬으로 옮긴 '국부천대'를 단행하면서 아이링과 메이링도 남편들을 따라 대륙을 떠나게 된다.

이후 아이링은 1973년 미국 뉴욕에서, 칭링은 1981년 베이징에서 각각 세상을 떠났다. 세 자매 중 가장 장수한 막내 메이링은 남편 장제스 사후 미국으로 건너가 2003년 10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메이링은 19세기, 20세기, 21세기 3개의 세기를 모두 경험하고 청나라 말기에서 현대 중국과 대만의 역사를 모두 경험하는 기록을 세웠다. 세 여성 모두 남편들보다 장수했고, 어쩌면 남편들 이상의 업적과 영향력을 남긴 능력자들이기도 했다.

'돈을 사랑한 여인(아이링)' '인민을 사랑한 여인(칭링)' '권력을 사랑한 여인(메이링)' 세 자매를 대표하는 수식어이자 중국인들에게 보편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이미지이기도 하다. 세 자매는 혁명의 목소리가 꿈틀대기 시작하던 혼란의 시대를 배경으로 성장했고, 자신의 의지와 선택으로 서로 다른 삶을 개척해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그녀들의 삶은 오늘날 현대 중국의 파란만장한 변천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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