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0여년 전 주민 생활상 적힌 사료집 발견, 일반에 첫 공개
[이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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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75년 필사본 운수지 원본 |
ⓒ 이완우 |
과거 시대의 역사를 왕조의 정치 영역 중심으로 파악하는 경우가 많다. 각 지역의 역사, 문화, 사회, 자연, 풍속 등의 옛 군현의 자료는 대체로 부족한 상황이다. 조선 시대 초기에 <세종실록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 등 전국적인 관찬지지(官撰地志)의 편찬이 있었다. 조선 시대 후기에 편찬된 각 지방의 읍지는 그 지역의 현황 파악과 다양한 행정 자료의 수집을 위한 정보를 포함하여 향토의 사료적 가치가 풍부하다.
전북 임실군은 조선 시대에 임실현이었다. 이 지역은 삼국 시대에 신라와 백제의 국경 지대에 가까운 군사적 요충지였다. 운수(雲水)는 임실현의 별호여서 임실현의 객사는 운수관(雲水館)이 있었고, 임실현의 읍지(邑誌: 읍을 단위로 하여 작성된 지리지)로는 운수지(雲水誌)가 있었다.
임실현의 읍지인 향토사료집 '운수지'는 이 지역의 향토 백과사전 총람의 성격으로서, 1730년의 필사본 운수지, 1904년의 활판본 운수지, 1924년의 임실군지, 1960년의 임실군지, 1977년의 임실군지, 1997년의 임실군지와 2020년에 총 7권으로 편찬한 임실군지 등 시대별로 총 7 가지가 있었다.
1675년에 당시 임실 현감인 신계징이 지역의 선비 한필상 이시연과 함께 필사본 운수지는 제작하였다는 기록만이 문헌에 전해 왔고, 지금까지는 1730년대에 제작된 필사본 운수지가 알려진 최고의 향토 사료집 문헌이었다.
그런데 이 지역의 향토문화유산 탐구가인 김진영(64세, 임실군 오수면) 씨에 의하여 1675년에 제작된 필사본 운수지(이하, 운수지(1675))가 최근에 발견되어서 그 의미가 대단히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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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75년 필사본 운수지 처음 부분 |
ⓒ 이완우 |
임실군 성수면에 위치한 치즈테마파크의 임실N치즈 축제(10.6~9) 기간에 임실 향토역사문화자료 전시관이 임시로 설치되어 운영되었다. 이곳 전시관에서 새로이 발견된 운수지(1675)가 최초로 일반에 공개되었다.
전남 지역에는 가장 오래된 읍지로 현재의 순천시인 옛날 승평부의 승평지(1618)가 있다. 전북 지역에서는 이번에 새롭게 발견된 운수지(1675)가 가장 오래된 읍지로 인정받을 것으로 보인다.
임실군청의 김철배 학예연구사에 의하면 이 운수지(1675) 안에는 이 지역의 유래, 각 면의 현황, 건물, 산천과 자연, 인물, 풍속, 물산 등을 상술한 총 32개 항목이 담겨있다고 한다. 이 운수지(1675) 서책은 96쪽인데 1쪽당 18행이고, 1행당 36자 정도의 글자가 씌어서 전체의 글자 수는 5만 5천 자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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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75년 필사본 운수지 내용 중 경각산초당가 |
ⓒ 이완우 |
조선 시대에 임실은 완대로(完大路)인 전주와 남원의 중간 거점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전주의 전라감영에 전라도 56개 군현에서 6개 고을씩 차례로 방문하여 공무 처리를 하였다. 이때 여러 고을의 관원들이 임실현의 운수관에서 하룻밤 묶으며 전라감영에 들어갈 채비를 하였다.
전라감영으로 향하는 관원들이 임실현의 운수관에서 새벽 3시에 출발하면 전라 감영에 점심 때쯤 도착했다. 관원들은 이곳에서 오후에 공무를 보았다고 한다. 이렇게 임실 지역은 조선 시대에 관원들의 중요한 이동 경로의 거점이었던 셈이다.
김철배 학예연구사는 이 운수지(1675)에 서문은 없고 신계징 현감의 발문만 있으며, 필사본으로 글씨체가 여럿이지만 그 형식과 글씨의 크기는 대체로 일정하다고 밝혔다. 그는 이번에 새롭게 발견된 이 운수지(1675)가 이 지역 향토의 역사문화 자료로서 의미가 크며, 향토의 역사를 새롭게 조명하는 동기가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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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죽도 벽공 소조 |
ⓒ 이완우 |
이 운수지(1675)를 발견한 향토문화유산 탐구가인 김진영씨는 이 운수지(1675)의 한지가 조선 시대의 전통 한지 기법의 하나인 외발뜨기 홑지로 제작한 한지임을 이 지역의 한지장 전라북도 무형문화재인 김일수(임실군 덕치면)씨가 확인해 주었다고 밝혔다.
김진영씨는 또 이 운수지(1675)를 상세히 검토해 본 내용을 설명했다. 보통 읍지들은 각 고을의 면 단위까지의 현황이 기술되었는데, 이 운수지(1675)에는 당시 임실현의 13개 면 아래의 모든 마을까지 구체적 지명이 나오고 주민들의 생활, 토지와 산천의 현황이 명확하게 기재되어 있다고 한다.
이 지역에 설화나 이야기로 구전되는 내용이 이 운수지(1675)에 기록된 예화를 들려 주었다. 임실의 중기사가 소실이 되고 철불과 석불은 남아 있었다. 이 사찰의 동종(銅鐘)과 경전(經典)이 섬진강 강가에 묻혔고, 날씨가 궂거나 비가 오면 이 묻힌 것들에서 소리가 난다는 전설이 구비 전승된다. 그런데 이 운수지(1675)에 이러한 내용이 명확하게 문자로 기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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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작도 호죽도 소조 제작 |
ⓒ 이완우 |
이 지역 강진면에 섬진중학교의 안산인 다래끼봉이 있는데 치마대(馳馬臺)라고도 부른다. 후백제를 창업한 견훤(甄萱 867~936, 재위 892~935)이 이곳에서 말을 달리며 군사 훈련을 했다는 전설이 이 지역에 옛이야기처럼 아스라이 전해온다. 그런데 이 운수지(1675)에 견훤대(甄萱臺)라고 지명이 명확하게 기재되어 있다. 견훤 전설의 신뢰성을 확인해 주는 의미가 크다.
지금까지는 임실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서원은 신안서원(新安書院)으로 알려졌었다. 그러나 이번 운수지(1675)에 신안서원에 관해서는 한 줄도 언급이 없다. 청웅면 구고리에 있는 학정서원(鶴亭書院)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지역의 향토사가 바르게 쓰여야 할 방향을 운수지(1675)가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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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작도 소조 |
ⓒ 이완우 |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 시대 흐름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는 현실이다. 향토문화유산 탐구가인 김진영씨는 인터넷 '티스토리'에 '흘러가는' 블로그를 운영하며, 향토 자료들과 자신이 답사한 내용을 게재하고 있다.
그는 임실읍 성수면과 오수면의 경계 말재 정상 큰 바위에 조성된 조선 시대의 송덕비를 찾아내었다. 조선 시대에는 큰길이었던 옛날 고개에서 근대화된 문물인 신작로가 생기면서 잊힌 문화유산들이었다.
임실군 오수면 오수리에서 2022년 6월 초에 1938년(무인년)에 지어진 기와집 한 채가 해체되었다. 팔작지붕 5량으로 정면 4칸 측면 3간 구조의 한옥이었다. 김씨는 해체되는 한옥의 지붕 박공에서 민화 양식의 호작도(虎鵲圖)와 호죽도(虎竹圖) 벽면 소조를 발견하였다.
그는 중장비를 동원해 힘든 과정을 거쳐서 한옥 박공의 벽면에서 박공 장식 두 점을 신중히 분리하여 액자 형태로 보존하였다. 소조 두 점은 각각 가로 150cm, 세로 105cm에 무게가 100kg으로 동일한 크기와 무게이다.
김진영씨는 이 지역의 역사와 문화유산의 현장을 찾아 10여 년 동안 답사 활동하며 문헌 자료나 역사적 유물을 수집해왔다고 한다. 그동안 그가 기울인 향토와 문화유산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보면, 그가 가치 있는 운수지(1675)를 발견한 일은 어쩌면 우연이 아니고 필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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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75년 필사본 운수지 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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