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단어 알아도 한글은 모르는 아이들, 심각합니다

신정섭 2023. 10. 9.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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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 문해력 낮은 세태, 세대 간 의사소통 단절 우려... 실태조사 범위부터 넓혀야

[신정섭 기자]

 광화문 세종대왕상(자료사진).
ⓒ PxHere
 
한글날은 대한민국의 5대 국경일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제577돌 한글날 기념식이 열릴 예정이다. 정부는 국어기본법 제20조에 따라, "한글의 독창성과 과학성을 국내외에 널리 알리고 범국민적 한글 사랑 의식을 높이기 위하여" 매년 10월 9일을 한글날로 정하고 기념행사를 한다.

'기념(記念)'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뜻깊은 일이나 사건을 잊지 않고 마음에 되새김"이라고 나온다. 하지만, 한글날에 훈민정음 반포를 기억하고 그 숭고한 뜻을 가슴에 되새기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추석 연휴 6일이 끝나고 또 찾아온 연휴에 불과한 건 아닐까. 한글날이 지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기념의 의미는 빛이 바래기 일쑤다.

'킹 받는다'는 MZ세대 언어... 외래어 사용도 늘어

'MZ(Millennial+GenerationZ) 세대'라고 불리는 요즘 아이들은 어떤 말과 글을 사용할까?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희한한 신조어를 만들어 내고, 어법을 무시하면서 한글을 정체불명의 언어로 전락시키고 있다고 하면 지나친 표현일까? 기성세대가 도무지 따라잡기 힘든 MZ 세대의 언어생활 일면을 들여다보자.

이건 일부 어른들도 해당되지만, 요즘 아이들은 "개맛있어", "개좋아" 이런 표현을 즐겨 쓴다. 접두사 '개-'를 '매우' 또는 '정말'이라는 뜻의 부사처럼 사용하는 것이다. '개살구', '개고생' 이렇게 명사 앞에 붙는 접두사를 제멋대로 형용사 앞에 가져다 붙인다. 국립국어원 누리집 <온라인가나다> 답변 사례에 따르면, 형용사 앞에 붙는 접사 '개-'의 용법은 표준국어대사전에 없다.

다른 신조어를 살펴보자. 웃음소리(ㅋㅋ)나 눈물(ㅠㅠ), 윙크(;-)) 등의 그림말(이모티콘)은 이미 일상화된 지 오래되었으니 빼고, MZ 세대들이 주로 활동하는 SNS나 유튜브 등에 자주 등장하는 아래 표현들 중 과연 몇 개나 그 뜻을 짐작할 수 있는지 헤아려 보길 바란다. 물론, 상당수는 이미 해묵은 표현이 되었고, 지금 이 기사를 읽는 순간에도 다른 신조어가 탄생하고 있을 것이다.

"어쩔티비", "킹받네", "머선129", "점메추", "좋댓구알", "설참", "웃안웃", "젊꼰", "케바케"

신조어뿐만 아니라 외래어도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국립국어원이 올해 3월 발간한 '2022년 국어 사용 실태 조사 보고서' 내용을 살펴보면, 외래어가 우리말을 상당 부분 밀어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단적인 예로, 전국의 만 20세 이상 69세 이하 성인남녀 2천 명 중 평균 41.8%가 결혼한 남자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부인을 소개할 때 '와이프'라고 말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아래 그림 참조). 20대는 65.3%, 30대는 68.1%가 '집사람' 또는 '아내' 대신 '와이프'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국립국어원이 올해 3월 발간한 '국어 사용 실태 조사 보고서' 내용 중 일부 화면 갈무리
ⓒ 국립국어원
 
세계화 시대에 영어를 사용하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집사람'이라는 호칭도 가부장제의 잔재를 드러내는 것이므로 문제가 될 게 없다고 볼 수 있으나, 그만큼 우리말이 위협받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남편은 '허즈번드'라고 칭하지 않으면서 아내만 '와이프'로 부르는 것도 특이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요즘 세대가 줄임말, 비속어, 신조어, 외래어 등을 즐겨 쓴다고 해서 한글이 곧바로 위험에 처했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다. 또래집단 구성원끼리 사용하는 은어는 어느 시대에나 있었고, 미디어 및 의사소통 기술의 발전, 세계화 및 고학력 추세 등의 시대적 흐름을 반영한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인다 해도 이상할 게 없다.

문제는 그와 맞물려 한글 문해력이 날이 갈수록 낮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와 관련한 체계적인 연구 결과는 찾아보기 어려우므로-'국어 사용 실태 조사'의 대상을 만 18세 이하 청소년으로 확장할 필요가 있다- 학교에서 오랫동안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수집한 '경험증거'를 제시하고자 한다. 아래는 실제로 필자가 수업 시간에 고3 학생과 나눈 대화 내용이다.

"선생님, fret over의 뜻이 '조바심 내다'라는데 조바심이 뭐예요?"
"조는 곡식 이름이고 바심은 탈곡의 우리말 표현이지. 조는 힘들여 비벼도 좀처럼 떨어지지 않거든. 초조하고 급해진다는 뜻이야."
"헐! 우리말은 왜 그렇게 어려워요? 그럼, procrastinate의 한글 번역 '늑장부리다'는 무슨 뜻인가요?"
"느릿느릿 꾸물거리는 태도를 말하지. '늑장 대응' 이런 말 못 들어봤니?"

혹자는 입말인 구어(口語)와 글말인 문어(文語)는 엄연히 다른데, 어떻게 일상생활에서 국어사전에 있는 말만 쓸 수 있느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일리가 있는 지적이다. 하지만, 말을 부려 쓸 수 있는 허용치라는 게 있지 않을까. 사회 구성원 중 다수가 줄임말이나 비문, 외래어, 비속어를 표준어처럼 사용한다면, 그로 인해 의사소통이 제대로 안 되는 지경에 이른다면 문제가 달라진다.

무엇보다도, 날이 갈수록 초등학생들이 정체불명의 신조어를 생산하여 퍼뜨리는 주체로 떠오르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학교에서 교과서를 통해 배우는 언어와 또래 아이들과 주고받는 언어가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 넓다.

10년 후 우리 아이들이 쓰는 말을 어른들이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긴 할까? 같은 한국말인데 들을 때마다 해석이 필요하다면 뭔가 대책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1회성 기념식 할 게 아니라, 근본적 대책 마련해야

국가적 차원에서 근본적인 대책을 고민해야 할 때다. 물론, 정부가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있는 건 아니다. 국어기본법 제6조(국어 발전 기본계획의 수립) 1항은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은 국어의 발전과 보전을 위하여 5년마다 국어 발전 기본계획을 수립·시행하여야 한다"고 정하고 있고, 이 법령에 따라 현재 제4차 국어 발전 기본계획(2022~2026년)이 시행되고 있다(아래 그림 참조).
 
 국어기본법에 따라 정부가 수립한 '제4차 국어발전 기본계획'의 비전과 목표 및 전략(화면 갈무리)
ⓒ 문화체육관광부
 

*말뭉치: 언어 연구를 위해 텍스트를 컴퓨터가 읽을 수 있는 형태로 모아 놓은 언어 자료
**세종학당: 전 세계에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보급하기 위해 설치한 교육 기관(국고 지원)

제4차 국어 발전 기본계획의 전략은 4차 산업혁명 시대의 국어 정책 기반 조성, 쉽고 바르게 소통하는 언어 환경 조성, 언어 다양성 환경 기반 조성, 한국어 생태계 확장, 한글문화 및 산업 활성화 등 다섯 가지다.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게 없지만, 두 번째 전략인 '쉽고 바르게 소통하는 언어 환경 조성' 목표를 상대적으로 소홀히 대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특히, "바르게" 소통하는 언어 환경을 위해 얼마나 많이 노력하고 있는지 피부로 체감하기 어렵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국립국어원이 실시하는 '국어 사용 실태 조사'의 대상에 만 18세 이하 청소년이 빠져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세대 간 의사소통의 단절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하여, 청소년 말글살이 실태 조사 및 올바른 국어 사용 관련 사업을 강화해야 하지 않을까.

언어,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는 통로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Die Sprache ist Das haus des seins)"이라고 말했다. 언어는 존재가 머무르는 곳이고,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는 통로이며, 의사소통의 수단을 넘어 인간의 사유를 지배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우리 민족의 얼이 살아 숨 쉬는 한글이 이렇게 함부로 훼손되고, 오염되고, 망가지고 있는 현실을 그대로 놔두면 안 될 것이다. 존재의 집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대통령과 교육부장관,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의 어깨가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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