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부인’ 배경이 2576년 우주?… 연출가 시대의 오페라

장지영 2023. 10. 7. 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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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에 쓰인 시·공간 재현하는
대신 새롭게 해석하는 ‘레지테아터’
분위기는 물론 캐릭터·결말도 바꿔
지난 2016년 영국 로열 오페라하우스에서 선보인 알렉스 오예 연출 ‘노르마’의 한 장면. 오예는 고대 로마의 지배를 받던 갈리아 배경의 이야기를 현대로 가져왔다. 예술의 전당은 이번에 전관 개관 30주년을 기념해 이 작품을 선보인다. 예술의전당 제공


공연예술 역사에서 현대적 의미의 연출가가 등장한 것은 19세기 후반이다. 그 이전의 연출이란 극작가가 쓴 희곡을 충실하게 무대에 재현하고 배우를 연습시키는 수준에 그쳤다. 하지만 근대 연극의 출발점인 사실주의 연극과 함께 전면에 등장한 연출가는 공연을 시각화하고 해석적인 가치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20세기 전반이 되면 연출가의 역할로 재현보다 해석이 더욱 중요해졌다. 1930년대 독일 연출가 막스 라인하르트가 창시한 ‘레지테아터’(Regietheater)가 대표적이다. 레지테아터란 연출가가 텍스트에 쓰인 대로 시·공간을 재현하는 대신 새롭게 해석해 배경과 분위기는 물론 캐릭터나 결말까지도 바꾸는 것이다.

레지테아터는 1970년대 오페라계에도 전파됐다. 지휘자나 성악가가 중심이었던 과거와 달리 오페라계 역시 연출가가 오페라를 얼마나 참신하게 보여주는지가 중요해졌다. 특히 한국의 경우 오페라 장르 자체가 대중적이지 않기 때문에 레지테아터는 국립오페라단이 외국 연출가들을 초청해 만드는 작품에서 가끔 시도됐었다. 이마저 유럽에서처럼 파격적인 사례는 없었다.

세계 정상급 韓성악가 주인공 맡아

10월 레지테아터를 적극적으로 시도한 오페라가 잇따라 관객과 만날 예정이다. 12~15일 성남아트센터의 ‘나비부인’, 26~29일 세종문화회관과 예술의전당에서 각각 올라가는 ‘투란도트’와 ‘노르마’다. 패션 디자이너 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정구호, 한국 연극계를 대표하는 손진책, 스페인의 세계적 퍼포먼스 단체 ‘라 푸라 델 바우스’ 멤버인 알렉스 오예가 각각 연출을 맡아 원작과 다른 면모를 보여줄 예정이다.

특히 이들 세 작품에 세계 무대를 활동하는 한국 성악가가 주역을 맡은 것도 놓칠 수 없는 관극 포인트다. ‘나비부인’의 초초 역으로는 이 역할로 200회 넘게 유럽 무대에 선 소프라노 임세경(48)이 출연한다. 그리고 ‘투란도트’의 칼라프 역으로 한국 오페라 무대에 데뷔하는 테너 이용훈(50)이, ‘노르마’에는 거장 리카르도 무티가 발탁한 소프라노 여지원(43)이 각각 캐스팅됐다.


‘나비부인’은 이탈리아 작곡가 푸치니(1858~1924)의 대표작 중 하나로 1904년 초연됐다. 이 작품은 19세기 일본을 배경으로 어린 게이샤 초초와 미군 장교 핑커톤의 비극적인 관계를 담았다. 핑커톤이 초초를 현지처로 여기다가 미국으로 돌아갔지만, 초초는 홀로 아이를 낳아 기르며 핑커톤을 기다린다. 그러나 수년 뒤 아내와 함께 일본에 온 핑커톤을 보고 초초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500년 뒤 미래 우주 배경 ‘나비부인’

‘나비부인’은 아름다운 선율의 아리아 ‘어느 갠 날’ ‘꽃의 2중창’ ‘허밍 코러스’ 등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오리엔탈리즘과 여성의 헌신적 사랑의 판타지가 한데 엮인 내용이 현대 관객에게는 불편하게 다가온다. 정구호는 성남아트센터 무대에 오르는 ‘나비부인’의 배경을 서기 2576년 우주로 설정한 뒤 엠포리오 행성의 사령관 핑커톤이 평화 협상을 위해 파필리오 행성으로 갔다가 초초 공주를 만나 벌어지는 이야기로 바꿨다. 남녀 주인공을 동등한 협상자로 두고 기존의 강대국과 약소국이라는 제국주의적 요소를 배제한 것이 특징이다. 여기에 정구호는 SF적 상상력을 가미한 무대세트와 의상 등을 선보일 예정이다.

정구호는 “그동안 본 적 없었던 새로운 ‘나비부인’이지만 음악을 통한 인물의 감정선은 원작이 지닌 정서 그대로 관객이 따라가도록 연출할 것”이라며 “‘나비부인’을 이렇게까지 해석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고 전했다.

그런데 레지테아터가 기존 오페라의 아리아와 레치타티보를 유지하는 것과 달리 정구호는 자막만 바꾼다는 점에서 편의주의적 연출이라는 비판을 유발할 가능성이 크다. 즉 관객이 대부분 이탈리아어를 모른다는 이유로 무대 위 아리아와 레치타티보와 다른 내용의 자막을 다는 것이 타당한지 의문이다. 지난 2017년 정구호가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를 한국 정서로 각색한 ‘동백꽃 아가씨’를 선보일 때도 비슷한 방식이었지만 당시엔 맥락상 설정이나 캐릭터 변환이 자연스러웠다.

기존 중국풍과 결말 바꾼 ‘투란도트’

푸치니의 유작인 ‘투란도트’는 고대 중국을 배경으로 남자를 혐오하며 결혼을 거부하는 투란도트 공주를 둘러싼 이야기다. 투란도트가 낸 수수께끼를 풀지 못한 구혼자들이 참수당하는 가운데 왕국을 잃은 칼라프 왕자가 마침내 수수께끼를 풀어낸다. 그리고 칼라프는 자신을 사랑하는 시녀 류의 희생으로 투란도트의 사랑을 쟁취하게 된다.

푸치니가 류의 죽음 장면까지만 작곡한 뒤 타계하는 바람에 지금의 ‘투란도트’는 지휘자 토스카니니의 감독 아래 작곡가 프랑코 알파노가 미완 부분을 마무리한 것이다. 다만 아무리 동화 원작이라도 투란도트가 갑자기 사랑에 빠지는 결말의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초연부터 나왔다. 레지테아터의 유행 이후 ‘투란도트’는 중국풍 무대를 벗어나는가 하면 결말을 바꾼 프로덕션들이 나오게 됐다. 특히 페미니즘의 영향으로 투란도트가 칼라프와 억지로 맺어지는 대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결말이 종종 나오고 있다. 이외에 칼라프가 류의 죽음에 감동을 받아 투란도트 대신 류의 시신을 안고 퇴장하는 결말, 남자를 혐오하는 투란도트가 결국 칼라프를 사형시키는 결말 등도 있다.

서울시오페라단의 ‘투란도트’도 중국풍을 벗어나는 것은 물론 기존의 결말을 비틀 예정이다. 손진책은 “이번 작품에서 가장 주목한 것은 칼라프를 위해 목숨을 바쳐 헌신한 류였다. 류가 지키고자 한 숭고한 가치를 더 깊이 되새기는 연출을 선보이고자 한다”고 밝혔다.

현대 배경에 근본주의 다룬 ‘노르마’

이탈리아 작곡가 벨리니(1801~1835)의 ‘노르마’는 화려한 기교가 특징적인 벨칸토 오페라의 대표작이다. 여주인공 노르마의 아리아 ‘정결한 여신이여’는 소프라노에게 고난도 테크닉을 요구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1831년 초연된 이 작품은 고대 로마의 지배를 받는 갈리아 지방의 드루이드교 여사제 노르마의 사랑과 질투, 복수, 용서, 희생 등에 관한 이야기다. 노르마는 순결 서약을 깨뜨리고 로마 총독 폴리오네와의 사이에서 아이까지 몰래 낳아 키우고 있다. 하지만 폴리오네는 또 다른 사제 아달지사와 사귀며 노르마를 배신한다. 결국 노르마는 제사장인 아버지를 비롯해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폴리오네와 함께 죽음을 택한다.

예술의전당이 이번에 전관 개관 30주년을 기념해 선보이는 ‘노르마’는 2016년 영국 로열오페라하우스 시즌 개막작으로 초연됐던 작품이다. 연출가 오예는 작품의 배경을 현대로 옮긴 뒤 개인의 욕망과 종교의 근본주의라는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냈다. 십자가로 가득 찬 무대세트는 스페인의 종교재판소나 미국의 백인 우월주의 단체 쿠 클럭스 클랙(KKK)의 무시무시한 근본주의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한국 공연을 앞두고 잠시 서울을 다녀간 오예는 “오페라가 과거의 전통에만 머물면서 관객과 소통할 수 없으면 박물관에 가야 한다”면서 “이제 오페라를 현재에 맞게 이야기를 각색 또는 연출하는 게 필요하다. 특히 현실의 문제들을 오페라에 녹여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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