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보면]서윤복은 신발 끈 풀린 채로 4㎞ 이상 달렸다(下)

이종길 2023. 10. 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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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마라톤 참가경비, 미군정청 도움으로 해결
보스턴 도착하자마자 주머니 탈탈 털린 선수단
서윤복 질주 방해한 보스턴 테리어 한 마리
성금으로 빨랫비누, 그릇 사온 손기정·서윤복

'알고 보면' 좋을 정보를 두서없이 전달한다. 영화를 흥미롭게 관람하는 팁이다.

*에 이어

*손기정은 여운형을 자주 만났다. 양정고 동창인 여홍구의 아버지로, 경성육상경기연맹 회장이었다. 평소 민족자주 정신을 부르짖으며 청소년 운동을 주창해왔다. 그는 손기정이 선봉에 서주기를 바랐다. 손기정은 여운형의 심부름을 자청하며 이곳저곳을 뛰어다녔다. 여운형은 부활한 조선체육회에서 회장으로 추대됐다. 그가 근로인민당을 만들었을 때다.

*손기정은 광복 이듬해 아이들을 보기 위해 처가가 있는 평양을 찾아갔다. 그리고 고향 신의주로 이동하는 길에 차내 방송을 통해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다. "이 기차는 북쪽으로 가는 마지막 기차입니다. 앞으로 38선이 생겨 내왕이 끊기게 됩니다." 손기정은 신의주에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갓 스물이 될까 말까 한 젊은이가 찾아와 "누가 오랍니다"라며 계속 따라다녀 두려움을 느꼈다. 고향에서 체육 활동을 해야 한다는 고향 친구들의 요청을 거절하고 황급히 트럭에 올라타 경성으로 돌아갔다.

*조선체육회는 조국광복을 기념해 경성운동장(훗날 동대문운동장)에서 전국종합체육대회를 열었다. 손기정은 광복된 조국 땅에 체육인들이 다시 모였다는 사실만으로 감격스러워했다. 격려 인사를 맡은 이승만은 "저기 서 있는 저 사람이 바로 손기정 선수 아닙니까? 세계적인 선수인 손 군을 위해 다시 한번 박수를 보냅시다"라고 소리쳤다. 손기정은 고개를 숙인 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동아일보사는 베를린올림픽 제패 10주년을 기념해 '회상의 저녁'이라는 만찬을 베풀었다. 이 자리에서 손기정은 권태하, 김은배, 남승룡, 이길용 기자 등과 뜻을 모아 마라톤보급회를 발족시키기로 결의했다. 안국동에 있는 자기 집에 태극기를 올리고 '마라톤 합숙소' 현판을 달았다.

*베를린 10주년을 기념하는 또 하나의 축승회가 8월 20일 덕수궁에서 열렸다. 식장 뒤편 벽에는 대형 태극기가 걸렸다. 단상에는 김구, 이승만, 미군 총사령관인 하지 중장과 아놀드 소장, 러치 군정장관 등이 자리했다. 손기정과 남승룡은 대한문으로 입장해 단상 앞에 섰다. 이승만은 "우리 민족은 일제 탄압 아래서 먹고 입고 호흡했을 뿐, 죽은 사람들이었다. 그런 중에 손, 남 양군이 조선의 명예를 걸고 싸워 승리를 거뒀다. 우리 3000만 겨레는 두 선수처럼 굳센 의지로 뭉쳐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진 김구의 격려사에 장내는 숙연해졌다. "나는 오늘까지 손, 남 양군으로 인해 세 번 울었습니다. 10년 전 중국 남경에서는 나라 없는 조선 청년이 조선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가슴에 붙인 일장기를 신문을 통해 보면서 가슴 아파 울었습니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손 군이 일본군에 들어가 싸우다가 필리핀 군도에서 전사했다는 잘못된 소식을 듣고 원통해서 울었습니다. 오늘은 죽었다던 손 군을 광복된 조국 땅에서 다시 만나는 뜻깊은 자리에 함께하게 됐습니다. 감격해서 울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베를린 10주년 기념식에 앞서 낮 3시에는 동아일보 주최로 마라톤대회가 열렸다. 광화문에서 노량진을 왕복한 경기에서 서윤복은 1등을 차지했다. 마라톤보급회 깃발을 올리고 합숙 훈련에 참여한 젊은 선수 가운데 가장 실력이 빼어났다.

*서윤복은 편모슬하에서 자라 고학으로 경성상업실천학교(숭문고) 야간부를 나왔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일본인 회사에 다니다가 해방 뒤 고려대에 스카우트돼 마라톤 선수의 기회를 잡았다. 하루아침에 스타가 된 건 아니었다. 중장거리를 뛰다가 두어 번 풀코스 경험을 쌓고 마라토너로 나섰다.

*서윤복이 보스턴마라톤대회에 나갈 기회를 잡은 건 그야말로 우연이었다. 베를린올림픽에 출전한 바 있는 미국의 존 켈리가 어느 날 갑자기 손기정에게 엽서를 보내왔다. 켈리는 베를린에서 손기정이 신은 엄지와 나머지 네 발가락 사이가 갈라진 손모아장갑 모양의 가벼운 신발을 눈여겨보고 한 켤레를 얻어 갔다. 그는 그걸 신고 보스턴마라톤대회에서 우승했다. 손기정은 엽서를 받고 보스턴에 가는 방법을 궁리했다. 먼저 미군정청을 찾아가 그곳의 고문으로 있는 스매들리 여사를 소개받았다. 정식 초청장은 육상 단거리선수 출신인 멕시코계 공보관 프랭크 브리스톤이 나서서 받아줬다.

*보스턴마라톤대회 참가경비는 많은 이들의 도움으로 해결됐다. 딱한 사정을 들은 스매들리 여사가 먼저 300달러를 선뜻 내주었다. 자신의 후원자인 언더우드 계좌로 미국 내에서 빌려 쓸 수 있도록 5000달러의 수표를 떼어줬다. 소문을 들은 미군정청 장교들은 주머니를 털어 1500달러, 러치 군정장관도 1500달러를 쾌척했다.

*손기정 감독과 남승룡, 서윤복은 한밤중에 시장에 나가 싸구려 기성복 세 벌을 샀다. 외상으로 옷 가방도 준비했다. 김포에서 미군정청이 마련한 수송기를 타고 태평양을 횡단했다. 영어를 할 줄 아는 이는 한 명도 없었지만 보스턴에 도착해 많은 언론의 관심을 받았다. 기자들은 초라한 행색에 놀라며 "양복이 왜 그 모양입니까?"라고 물었다. 체재비를 담당하기로 한 교포 백남용 씨는 "비행기를 오래 타고 왔으니 구겨진 게지요"라고 답했다. 하지만 손기정은 "옷감이 원체 나빠서 그렇습니다"라고 설명했다. 당황한 백 씨는 선수단을 데려가 새 양복부터 맞춰줬다. 손기정은 그가 재정 보증인이니 그 정도는 인심 써서 해주는 것이려니 생각했다. 그러나 백 씨는 양복값을 내라고 했다. 손기정은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기가 막혔다. 가뜩이나 미국 땅에서 탄 비행기 삯, 이틀 밤 숙박비로 돈을 써서 주머니가 바닥이 날 판인데 어울리지도 않는 미제 양복값이라니. 주머니에 겨우 200달러 정도가 남았다. 이제 오도 가도 못할 판이었다."

*선수단은 경유한 호놀룰루에서 이틀을 묵으면서 웃지 못할 해프닝을 겪었다. 연습을 나갔다가 숙소를 찾지 못해 6시간 동안 길거리를 헤매다 교통 순찰대에 신세를 졌다.

*보스턴마라톤대회가 열린 4월 18일 보스턴 하늘은 맑게 개었다. 시내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교외 렉싱턴은 푸른 들판의 아지랑이로 온통 봄빛에 물들어 있었다. 한국 등 여덟 나라에서 모여든 153명이 출발점에 섰다. 한국은 독립되었으되 엄밀히 따지면 정부수립 이전의 상태라 선수 유니폼에 태극기와 미국 성조기가 같이 붙었다. 서윤복은 3위 입상도 장담할 수 없었다. 지난 대회 우승자인 핀란드의 히테넨은 2시간 26분대의 세계최고기록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스의 가이조르도 만만치 않은 강적으로 분류됐다.

*초반 중위권을 달리던 서윤복이 선두 그룹으로 나선 건 10㎞ 지점부터였다. 그는 28㎞ 지점에서 히테넨을 제치고 선두로 나섰다. 손기정 감독은 중간 지점에서 서윤복에게 조국을 위해 '뛰어라'가 아닌 '싸워라'라고 외쳤다.

*보스턴마라톤대회 코스에는 웨슬레이언 칼리지란 여자 대학이 있었다. 해마다 마라톤대회가 열리면 이 학교 여학생들은 모두 수업을 중단하고 교사 앞을 통과하는 코스에 나와 선수들에게 열렬한 응원을 보냈다. 응원과 갈채는 레이스에 지친 선수들에게 격려가 되었으나 부작용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적잖은 선수들이 여학생들 앞에서 힘을 과시하려고 지나치게 스피드를 내다 페이스를 잃어버렸다. 이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학생들의 응원 소리에 미국 선수들이 갑자기 페이스를 올리며 선두를 향해 마구 달려 나갔다. 대회 전 보스턴 교포들로부터 관련 이야기를 들은 서윤복은 '저래서는 안 되지'라고 생각하며 페이스를 조절했다.

*서윤복이 선두로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스턴 테리어라는 복슬강아지 한 마리가 코스 가운데로 뛰어들어 훼방을 놓았다. 서윤복은 발로 쫓아내려다 그만 나뒹굴고 말았다. 리듬이 흐트러진 사이 히테넨에게 선두를 뺏겨 다시 추격하는 위치가 됐다. 남은 거리는 약 10㎞였다. 서윤복은 '심장이 터진다'는 마의 고개, '하트 브레이크 힐'을 승부처라고 생각했다. 북한산 자락 정릉과 삼청동 골짜기를 뛰어오르던 생각을 하며 가슴이 찢어질 듯한 고통을 참아냈다. 언덕 중턱에서 히테넨을 다시 앞지르고 선두를 쾌주했다.

*서윤복은 38㎞ 지점에서 새로운 장애를 만났다. 신발 끈이 풀어지기 시작했다. 여기서 걸음을 멈추고 끈은 다시 매면 또 역전당할지 모를 일이었다. 서윤복은 꾀를 냈다. 도로변에 준비돼 있던 식수대의 물그릇을 잡아 발에 부었다. 끈은 더 이상 풀리지 않았다. 그렇게 끝까지 달려 결승 테이프를 끊자 축하의 폭죽이 터졌다. 2시간25분39초. 세계최고기록을 아슬아슬하게 돌파한 신기록이었다. 2위 히테넨(2시간29분39초)과는 4분 차였다. 3위는 미국의 테드 보겔(2시간35분)이 차지했다. 남승룡은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12위로 들어왔다.

*보스턴마라톤대회 우승은 세계무대에서 태극기를 달고 이룬 최초의 승리였다. 이를 지켜보며 손기정은 눈물을 흘렸다.

*서윤복은 우승 뒤 "어떻게 그런 힘을 길렀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당신들은 바쁘면 차를 타고 가지만 우리는 두 다리로 달린다"고 답했다.

*보스턴마라톤대회가 열린 즈음 이승만의 외교 사절로 미국을 방문 중이던 임영신 중앙대학장이 보스턴을 찾아왔다. 그는 여비가 모자라 돌아갈 길이 난감하다는 사정을 듣고 모금 운동에 앞장섰다. 그 덕에 1000달러에 이르는 거금이 모였다.

*훗날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에 선출돼 20년 동안 자리를 지킨 애버리 브런디지는 서윤복의 우승 소식을 전달받고 국제육상경기연맹 임원인 헬리스를 통해 이듬해 런던올림픽에 한국이 참가하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약속했다.

*손기정 감독, 서윤복 등 선수단은 미국 이민 초기 농촌노동자로 가서 고생하며 품팔이하던 노인들이 거친 손으로 악수를 청하며 눈물을 흘리자 감동했다. 노인들은 "이 박사를 도와 날품팔이로 번 돈 50센트, 1달러씩 모금해서 나라의 독립을 빌었다네. 그렇지만 진정한 독립운동은 올림픽에서부터 희소식을 전해준 당신들이 하고 있구먼"이라며 기뻐했다. 선수단은 환영회에 모인 동포 2세들이 우리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섭섭해하기도 했다. 그들의 말은 도산 안창호의 아들 필립 안 씨가 통역했다.

*선수단은 워싱턴, 로스앤젤레스 등에서 받은 성금으로 국내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빨랫비누와 그릇 등 일상 용품을 잔뜩 사서 돌아왔다. 배편 귀로에 일본에 들렀을 때는 도쿄에 머물고 있던 비운의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이은 공을 찾아 인사했다. 그는 1900년 영친왕으로 책봉됐으나 열한 살 때 볼모로 잡혀 와 일본에 억류돼 있었다. 해방을 맞았으나 불안한 정쟁이 계속되는 조국을 걱정하고 있었다. 이은 공은 쉰한 살에도 정정했으며 또렷한 우리말과 애국의 일편단심으로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고 있었다.

*선수단은 인천항에 도착해 개선했다. 서윤복은 보스턴에서 받은 월계관을 그대로 쓰고 있었고, 손기정은 자랑스럽게 대형 태극기를 흔들었다. 이날 인천제일 부두에 나온 환영인파는 수만 명이 되는 듯했다. 선수단은 이튿날 서울까지 카퍼레이드를 벌이며 과도정부와 조선체육회가 마련한 환영식에 참석했다. 선수가 아닌 단장 겸 감독을 맡은 손기정은 국민적 환영에 감사하면서도 뼈 있는 한마디를 던졌다. "저희가 미국원정을 떠날 때는 모두 어디에 계셨습니까? 저는 어떤 애국자보다 서윤복 군이 더 큰 일을 해냈다고 생각합니다. 저희가 마음 놓고 운동할 수 있도록 안정된 사회를 만들어 주십시오." 남승룡도 거들었다. "우리가 떠날 때는 쓸쓸하게 떠났는데 이기고 돌아오니 이렇게 성대한 환영을 해주었습니다. 11년 전 제가 손기정 군과 베를린에 갈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피상적인 환영보다는 우리 체육계의 젊은이들을 위해 정신적·물질적 지원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며칠 뒤 선수단은 경교장을 찾아가 백범 김구를 만났다. 김구는 베를린과 보스턴의 영광을 회고, 비교하며 서윤복을 특별히 칭찬했다. 서재로 들어가 멋진 휘호 한 점을 만들어주었다. '족패천하(足覇天下)'라는 이 글은 표현이 적절하기도 하지만 광복과 함께 민족의 기운을 상징하는 의미 있는 것이어서 서윤복이 애지중지 아끼는 보물이 됐다.

*1948년 봄 체육계에서는 런던하계올림픽 출전을 위한 다각적 준비가 진행됐다. 대책위원회는 외교·정책 문제보다 재정 확보를 위한 후원회 조직이 더 급했다. 정부도 없는 상태에서 이 숙제를 풀어나갈 수 있을지 난감한 상황이었다. 국제적 여론도 아직 완전 독립이 되지 않은 한국에 참가 자격을 줄 수 없다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IOC 승인을 얻기 위해 스톡홀름총회로 가던 전경무 대책위 부위원장은 비행기 사고로 숨졌다. 미국에 있던 이원순 씨가 총회에 참석해 어렵게 승인받았다. 우여곡절 끝에 참가 자격을 얻은 한국은 최정예부대를 보내야 했다. 선봉은 당연히 마라톤이 맡았다. 그러나 서윤복은 심리적 중압감 탓인지 컨디션이 좋지 않았고, '샛별' 최윤칠도 장시간 여행에 지쳐 공식연습에 나서지 못했다. 최윤칠은 20㎞ 지점을 지나 3위권으로 나섰으나 32㎞ 지점에서 얼굴을 찡그리더니 돌연 멈춰버렸다. 손기정 감독이 무어라 소리를 지르자 근육이 땅겨서 못 뛰겠다는 시늉을 하며 주저앉아버렸다. 서윤복도 27㎞ 지점을 지난 뒤부터 뛰다 걸으며 고통스러워했다. 연도(沿道) 관중과 부딪칠 만큼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한 채 2시간 59분 36초(27위)를 기록했다. 홍종오는 이보다 3분여 먼저 들어와 25위를 했다. 레이스는 마흔한 명 가운데 서른 명이 3시간대의 저조한 성적을 기록할 만큼 난코스였다.

참고 자료 : 손기정 지음·발행처 휴머니스트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2022)', 김지환 지음·발행처 책과함께 '모던 철도(2022)', 조동표 지음·발행처 삶과꿈 '마라톤은 살아있다(1995)', 최인진 지음·발행처 신구문화사 '손기정 남승룡 가슴의 일장기를 지우다(2006)', MEDIA2.0 편집부 지음·발행처 MEDIA2.0 '스포츠 2.0(2007~2008)' 등.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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