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 산책]섬유로 그려낸 산수화…1세대 섬유예술가 이신자의 개척기

김희윤 2023. 9. 23. 11:38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회고전 '실로 그리다'
내년 2월 18일까지, 작품 90여점 공개
1970년대 태피스트리 국내 첫 소개
"전공했다면 새로운 시도 못했을 것"

"자수를 전공하거나 섬유미술을 배워서 작업한 게 아니었기에, 제멋대로 하느라 힘들기도 했지만 내가 전공자였다면 오히려 이렇게 하지 못했을 거다. 전공하지 않고 도전한 자유로운 작업이 이렇게 섬유미술이 발전하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이신자 대규모 회고전 '실로 그리다' 전시 전경. [사진제공 = 국립현대미술관]

올해 93세의 섬유미술가 이신자는 거장이 아닌 현역으로 남고 싶은 작가다. 지금, 이 순간도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말하는 그의 대규모 회고전 '실로 그리다'가 2024년 2월 18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개최된다.

국내에 '섬유예술'이라는 단어조차 없던 1970년대, 태피스트리를 국내에 소개하며 한국 섬유예술의 영역을 구축하고 수많은 제자를 양성한 작가의 생애와 작업 세계 전반을 조명하는 이번 전시에서는 작가의 작품 90여점과 아카이브 30여점을 대중에게 선보인다.

작가는 대학에서 응용미술을 공부한 뒤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바늘과 실을 이용해 섬유 작업을 시작했다. 그는 "배우지도 않았고 그냥 그림을 그린다는 기분으로 바늘에 실을 꿰서 했다"('한국근대공예가 연구-이신자' 중)고 당시를 회고한다.

이신자 1961년작 '노이로제'. [사진제공 = 국립현대미술관]

그는 초기 작업에서 전통적 섬유 소재 대신 밀포대, 벽지, 방충망, 종이와 같은 일상 속 재료와 한국적 정서가 담긴 평범한 소재를 주로 사용했다. 1972년 국전에 출품한 '벽걸이'는 국내에 처음 선보인 태피스트리 작품으로 전통적인 태피스트리의 단조로움을 극복하고 독특한 재질감과 입체적인 표현으로 화제를 모았다.

전시는 작가의 작품 세계가 형성되는 과정을 연대기 순으로 나눠 변화 과정을 조망한다.

1950∼1960년대 초기작에서는 '새로운 표현과 재료'라는 주제로 대담하고 자유로운 작가의 시도가 담긴 작품을 소개한다. 염색과 자수가 독립적으로 구분되던 시기, 작가는 파라핀을 이용한 납방염 기법으로 염색하고 실로 수를 놓아 한 화면에 염색과 자수를 동시에 담아냈다. 쇠망에 염료를 묻혀 바탕을 찍고 그 위에 천을 붙이거나 수를 놓는 실험적인 기법에도 도전했다. 크레파스나 안료를 칠하고 천을 덧대는 아플리케(appliqu?) 등 기성 작가들과 다른 자유로운 기법들로 비판받던 작가는 이런 여론을 의식한 듯 1961년 작품에 '노이로제'라는 제목을 붙여 당시 감정을 녹여내기도 했다.

이신자 1985년작 '기구 I' [사진제공 = 국립현대미술관]

1970~1983년까지는 '태피스트리의 등장'을 주제로 1972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를 통해 국내에 태피스트리를 최초로 소개한 시기 작품을 다룬다. 유년 시절 할머니 베틀에서 직조 과정을 익힌 작가는 틀에 실을 묶어 짜는 최초의 태피스트리 작업을 완성한다. 이후 '숲'(1972년), '어울림'(1981년) 등 짜인 실을 밖으로 돌출시키는 부조적 표현을 통해 입체적 질감을 구현한다.

1984∼1993년은 '한국 섬유미술의 개화기'로 이신자의 작업이 절정에 이른 시기였다. 고향 울진 앞바다에 반사된 일출과 석양의 빛, 산과 나무의 형상을 태피스트리로 표현하며 한 폭의 그림 같은 작품을 완성했다. 1980년대 초 남편 장운성 화백과 사별한 뒤의 상실과 절망을 붉은색과 검은색의 대비로 표현하기도 했다. 회화 같은 태피스트리 작업에 매진한 그는 생명에 대한 경외와 부활의 의지를 담은 다양한 작품을 완성해낸다.

1990년대 이후 작가는 금속 프레임을 하나의 창으로 사용해 자연을 관조하는 시선의 풍경을 선보였다. '부드러운 섬유-단단한 금속'을 주제로 한 전시 공간에서 '산의 정기' 시리즈(1990년대)를 만날 수 있다. 여기에는 작가가 유년 시절 아버지 손을 잡고 오르던 산의 정기에 스민 파도 소리, 빛, 추억, 사랑, 이별 등 자신을 평생 지배했다고 말하는 자연의 영원한 생명력이 담겨있다.

지난 21일 경기 과천시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이신자 작가가 본인의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이번 전시에는 작품과 함께 작가의 드로잉과 스케치 등 아카이브, 인터뷰 영상, 다양한 활동사진을 소개해 작품세계에 대한 접근성을 높였다.

이 작가는 "섬유미술이 회화 분야에 빠지지 않고 독자적 분야로 발전하길 바란다"며 "앞으로 더 발전할 수 있도록 젊은 작가들이 좋은 작품을 많이 선보이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Copyright ©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