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배령에 가기 위해 비바람을 뚫고 '38선'을 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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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우 기자]
"퇴직 기념으로 여행 가려고 하는데 어디 가고 싶은가?"
"안 가본 데 가게. 강원도 쪽이 좋을 것 같아!"
아내의 바람대로 9월 11일부터 4박 5일로 떠난 강원도 여행. "이제 오면 언제 오겠어?"라는 아내의 말이 마법의 주문이 되어 우리 여행은 7·80년대의 고등학교 수학여행처럼 잠시도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이곳저곳을 바쁘게 옮겨 다닌다.
▲ 미인 폭포 |
ⓒ 최승우 |
매일 이만 보 이상의 걸음으로 발바닥과 무릎이 아려오고 강행군의 후유증으로 오후에는 피곤이 엄습한다. '계획은 바뀌기 위해 존재한다'는 역설에 정면으로 도전하듯 폭우 속에서도 계획한 여행을 한 치의 빈틈 없이 실행한다.
고난의 행군을 시작한 지 어언 4일 차! 곰배령 탐방이다. 아내가 여행지를 강원도로 정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곳이 천상의 화원이라는 곰배령이었다. 꽃 잔치로 화려한 7·8월은 지났지만, 철 지난 곰배령의 모습도 사뭇 기대가 컸다. 비는 줄기차게 내렸으나 다행히 탐방은 가능했다.
꼼꼼한 성격인 나는 어떤 일을 추진해도 부족함이 없도록 철저히 준비하는 편이다. 그러나 아내의 퇴직 축하 여행이 주는 소중한 의미에 비해 여행 계획과 준비가 부실했다. 일기 예보가 맑음이라도 여행 준비에 우비를 챙겼던 편집적인 염려가 이번 여행에는 작동하지 않았다.
10시 탐방을 예약한 우리는 우비 대신 우산을 챙겨 들었다. 우중에도 곰배령 출발 지점인 점봉산 생태 관리 센터 앞에는 개인과 단체 탐방객 등 많은 사람이 모였고 우비보다 우산을 든 사람도 상당수였다. 준비 부족은 나만의 문제가 아니었고 다수의 비슷한 사람으로 안심이 되기도 했다.
곰배령 탐방은 왕복 4시간! 하산 통제 구역이 있는 원점 회귀 코스로 편도 5.1km의 거리에 고도 300m 정도를 올리는 산행은 놀며 걷는 길이다. 평탄한 코스를 알고 있는 듯 탐방객 중에는 치마와 단화 차림으로 걷는 사람도 있다.
▲ 곰배령 가는 길에 만난 이끼와 야생 버섯 |
ⓒ 최승우 |
운무 가득하고 선선한 바람을 피하려 곰배령 감시 초소의 벽에 기대어 커피를 마시는 중 문이 벌컥 열린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바람마저 부네"라며 산림청 직원이 말 한마디를 내뱉는다. 무심한 듯 건넨 말 한마디 속에 애써 올라온 탐방객의 실망감을 위로하려는 따뜻한 마음이 담긴 것 같아 저절로 미소가 머문다. 우리 민족이 '정'의 민족인 건 분명한 사실이다.
▲ 곰배령의 꽃 |
ⓒ 최승우 |
'남는 게 사진이다.' 곰배령 표지석 앞에는 저마다 방문의 흔적을 남기려고 사진 찍기에 열심이다. 일행으로 보이는 세 사람이 순서를 번갈아 가며 갖은 자세의 사진을 찍는다. 탐방의 증거를 남기려는 사람의 시선은 외면한 채 긴 시간 동안 사진을 찍는 그들의 행동에 눈살이 찌푸려진다. 곰배령 표지석 앞의 줄은 갈수록 길어진다. 간간이 내리는 비는 여전하고 바람과 안개가 밀려온다.
곰배령 우중 산행으로 눅눅한 습기와 불편한 시야를 경험했으나 남아있는 꽃이 주는 강한 생명력과 단출한 수줍음도 느꼈다. 맑은 날씨가 주는 선명한 실물의 아름다움을 체감할 수 없었지만, 운무에 가려진 산수 수묵화를 원 없이 감상했다. 비 오는 날의 여행은 사물의 실체와 풍경에 다가갈 수 없는 현실적 어려움을 겪는다. 한편으로 구름 너머의 세계에 대한 궁금함은 우리를 끝없는 상상의 세계로 안내한다.
▲ 38선 표지석 |
ⓒ 최승우 |
아내와 나는 곰배령에 가기 위해 비바람을 뚫고 38선을 넘었다.
여행 마지막 날인 내일은 과거 보러 한양으로 향했던 선비의 길! 문경새재를 넘는다.
길은 열려 있고 우리는 계속 넘고 걷는다. 발과 무릎이 아픈 만큼 추억도 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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